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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3. 2020

리듬 & 알고리즘 - 자동 생산 시대의 불량 식품


1.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는 발음상으로 ‘리듬’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도 그 둘은 어원 상의 뿌리를 공유한다. 옛 그리스어 ‘rhythmos’에서 ‘Algorithm’에서의 ‘rithm’과 ‘rhythm’이 파생되었다. 그리고 각 단어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리트머스란 흐름을 뜻한다. 알고리즘이란 특정한 논리적 흐름을 공식화한 것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리듬이란 본래의 맥락에서 음악적으로 나아간 ‘흐름’을 지칭한다. 정리하자면 이들 각각은 원문, 논리적 원문, 음악적 원문이라 할 수 있다.


세 개의 단어를 한 자리에 소환한 것은 이들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일종의 ‘판본’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리트머스가 그리스(적 맥락)의 자연에서 발견한 세 가지 요소, 로고스·파토스·에토스라는 수사의 삼각형을 모두 내포한다면, 알고리즘은 로고스에 리듬은 파토스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알고리즘은 논리를 따라가므로 두말할 것도 없고, 리듬은 음악의 구성요소라는 점에서 감정이 담겨있노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


사실 이 글은 알고리즘과 리듬에 대해 각각 생각하던 중에 떠올렸다. 먼저, 알고리즘에 관한 생각은 넷플릭스나 왓챠와 같은 영화 추천 서비스가 역설적으로 관객의 영화 취향에 ‘침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알고리즘이라는 게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개인의 영화 취향을 제안하기 위할 용도로 발명되었으나, 오히려 그렇게 제안되는 영화 취향 속에서 일반 관객은 개인의 취향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비극적인 결론이다. 또한 취향이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를 채워넣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부터 계속되는 유입이 사고의 정상화를 막는다. 이런 과정 속에 관객에게는 ‘취향’이라는 파토스도, ‘담론’이라는 로고스도 남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파토스의 재유입 과정에 은밀히 개입해 오는 것은 다름 아닌 에토스이다. (에토스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한다.)


여기서 영화 담론이라는 로고스는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파토스와 면밀한 관계가 있다. 이는 프랑스와 트뢰포가 당대에 무시되었던 히치콕을 작가의 지위로 복권시킨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로고스에 어긋나는 사실에 반기를 들고 극복하는 과정이 개인의 파토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순히 취향만으로 이성적 성찰을 끌고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논리적이지 못하기에 담론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되던 파토스에 주인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것 자체가 ‘파토스화 된 로고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취향을 잃어버리게 되는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담론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주인적 지위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오직 하수인만이 그곳에 남는다.


3.


이것이 현대 영화 문화에서 ‘나레이션’ 서비스와 겹쳐질 수 있다. 기존에도 ‘GV’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을 제안하는 게 근래의 ‘라이브톡’이다. 이 라이브톡을 통해 관객들은 영화 한 편을 다 이해했다는 교과서적 뿌듯함을 얻게 되며, 그곳에는 자신의 생각과 영화 담론을 경합하는 무대가 아니라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모니터 안의 인강이 펼쳐져 있다. 물론 그런 식의 주입식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주입식 교육의 장점은 단기간 내에 빠른 정보 습득을 할 수 있다는 점이고, 바쁜 현대인에게는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지적 양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것이 나레이션에게도 주어진다. 영화 나레이션-해설 문화가 갖는 단점은 영화 담론과의 경합을 실천적으로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육생들은 안구와 스크린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스파링을 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는 영화가 영상 문화의 일원이자 시각 매체라는 점에서 아주 큰 실책이다. 관객이 단순히 수동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개인의 주체의식을 돌파당해 영화 담론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 담론이라는 게 나레이션하는 이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된다는 점이다. 만약 개인이 마주한 게 자신이 만들어 낸 영화 담론이라면, 그것을 극복하는 건 내면의 거울상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겠지만,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알고리즘의 형태로 제공되는 편리함이다. 넷플릭스나 왓챠와 같은 영화 추천 서비스를 넘어서 유튜브에 떠도는 영화 해설은 알고리즘의 형태로 우리 곁에 도달한다. 그것도 가장 밀접한 스마트폰이라는 장치에 말이다.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대 사회이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하여도 유튜브 알고리즘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취향’을 제안할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이 식민지 시대의 열강과 같은 암묵적 ‘지배’라는 점을 우리가 모를 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취향이라는 파토스를 수호하기 위해, 파토스화 된 로고스를 본격적으로 복권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저항해야만 한다.


4.


앞서 말했듯 영화 담론이 나레이터에 의해 인도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에토스가 조미료처럼 뿌려진다. 그렇게 제공된 영화를 맛있게 받아먹는 우리는 몸이 상해가는 것도 모른 채 적극적으로 감미료를 향유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 단연 돋보이는 나레이팅 장치는 지식인 집단이나 외부 세력도 아닌 ‘트위터’이다. 트위터는 한 건의 발언을 자신의 계정으로 가져오고,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팔로워에게 확산하는 것에 특화된 서비스이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가 확산하는 과정과도 같아서, 숙주로부터 RNA를 받아 자기만의 입맛대로 변형한 후에, 재채기나 기침과 같은 비말의 형태로 인접한 개체를 감염시킨다. 트위터 서비스가 에토스를 변형하는 것 자체에는 통제의 불가능성만이 있을 뿐, 본래적 의도가 자신의 담론을 발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르게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 그대로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그 자체로는 생명이 아니고 오직 숙주 감염을 통해서만 유기체적 특성을 발휘하며, RNA라는 불안정함으로 인해 변화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이렇게 빠르게 전달되는 담론의 전파는 요동치는 그래프 곡선을 그리며 불안정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이는 리트머스도, 알고리즘도 되지 못한 채 단지 리듬으로만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것들은 빠르게 ‘리트윗’되는 와중에도 #태그를 통해 일렬 중대로 늘어섬으로써 완전한 무정형이 되는 것을 방지한다. 심지어는 팔로워에게만 공개 옵션을 택함으로써 자신과 어울리는 숙주를 취사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담론의 특성은 단지 속도 차이만이 있을 뿐 유튜브 알고리즘과 같은 타 서비스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곤 하나, 트위터에서는 ‘스노우볼링’으로 칭해지는 흐름이 위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비교적 큰 효과를 지니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스노우볼링이라는 단어를 트렌드로 대체해도 문맥상으로는 이해에 큰 무리가 없겠지만, 우리 곁에 도달하는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거대한 눈덩이와도 같다. 그리고 그런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뒤늦게 상부-나레이터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었음을 인지하더라도 말이다.


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레이션 없이 영화에서 에토스를 획득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영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윤리적’이 될 수 있는가. 윤리가 하나의 관념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기준만이 있을 뿐 뚜렷한 답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리는 어느 정도 개인의 주관을 따르고, 개인의 주관이라는 말을 예술가의 예술적 세계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그건 마치 리듬과도 같아서 손쉽게 변형되고 유행되고 심지어는 혼합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필모그래피’에서 사상적 흐름과 변형을 확인하는 작업이 그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씨네 21에 기고된 로만 폴란스키를 둘러싼 논쟁을 참조하라.)


다르게 말하면 영화에서 어떤 리듬을 확인하는 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디 해석이라는 게 본래 맥락의 변형 혹은 확장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작가를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흐름도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중간에 나레이션이 개입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개인의 수준에서는 통제될 수 있는 바이러스가 대중적 수준에서는 전혀 통제되지 못한다. 이 스노우 볼링 속에서는 영화를 통해 윤리를 자기 주관대로 가공하는 작업이 아니라, 윤리를 영화를 통해 합리화하는 역설이 이루어진다. 정확하게는 알고리즘에 의해 주입받은 윤리를 자신의 것으로 ‘취함(Drunken)’으로써 무비판적으로 담론을 수용하고, 그것이 마치 본래부터 자신의 의견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위장자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수용되는 담론이 ‘파토스화 된 로고스’라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파토스화 된 로고스를 본격적으로 복권하기 위해 지배로부터 끊임없이 저항하던 것은 소리 없는 감염에 의해 저지되고 논파되며, 이 소리 없는 감염이 바로 알고리즘이다. 그는 로고스인 척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파토스인 흐름이고, 이 흐름에는 나레이터의 개별적 윤리가 감미료로 첨가된다. 즉 알고리즘에 의해 빠르게 생산되고 전파되는 이 식품의 이름은 바로 패스트푸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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