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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6. 2020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밤을 낮보다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인간은 밤에 활동하는 동물이 아니었고, 그래서 불을 밝혔으며, 어둠이 물러가자 어둠 속의 맹수 또한 사라졌다. 그것은 호랑이나 표범과 같은 동물이었는데, 배고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내면의 동물이기도 했다. 맹수가 없다 하더라도, 제약된 시야 속에서 먹을 것을 확보하는 행위는 불가했으며, 그런 이유로 밤은 고립되고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좀비 영화에서의 밤처럼, 그저 숨을 죽인 채로만 보내야 하는 ‘죽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현대에 밤에 깨어있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 건 언제든지 밝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인프라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밤의 유희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가 가로등이 되었을 때, 파리의 밤은 꼽추가 아닌 벨 에포크의 시절이 되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 있던 꼽추와 집시들은 도심의 캄캄한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존에 어둠을 상징하던 맹수들을 몰아내고 ‘바로 그 맹수’가 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잭 더 리퍼가 등장한 시기가 이 시절이었다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러나 현대의 밝은 거리는 우리를 ‘어둠보다 더한 야만’으로 물들게 하였다. 이전 시대의 어둠은 일몰부터 일출까지의 특정한 구역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빛과 어둠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빛을 통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지도는 손쉽게 수정될 수 있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둠에 대한 통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둠을 ‘조련’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을 조련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숨을 수도 있다는 것과도 같다. 세상 곳곳에 불을 밝히는 뉴스가 있다면,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뉴스를 교란하는 이들도 있다. 양지가 있다면 음지도 있다는 말에 불과한 게 아니다. 빛의 발명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둠을 탐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야맹증에 걸리게 되었고, 어둠 속에 숨어든 것들을 찾아내기에는 시각적으로 무리가 있다. 이 과정 속에 우리는 빛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내면의 맹수를 분리해낸다. 그리고 그 맹수는 어둠 속에 남아 야생을 배회하게 된다.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도시의 풍경이 ‘어반 판타지’라는 이름의 환영이 된 것은 우리가 그런 맹수를 은연중에 알아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신사숙녀’가 거니는 가로등 아래의 불빛이 꺼질 때, 그곳에는 배후의 감춰진 맹수가 고개를 든다. 런던의 산업화가 잭 더 리퍼라는 괴물을 만들어내었듯이, 21세기의 4차 산업혁명에서는 현실이라는 양지가 인터넷이라는 음지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신사숙녀이기를 포기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내면의 맹수를 인터넷에 풀어놓는다.


현실이 있기에 인터넷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자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이 없는 곳에는 늘 인터넷이 자리하게 된 게 인터넷의 발명으로 인해 역전된 모습이다. 오늘날 인터넷은 IOT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가로등과도 같은 역할을 대체한다. 와이파이와 같은 라우터가 은은한 ‘전파’를 발산하고 있고, 그것은 에디슨의 필라멘트 전구가 뿜어내던 작은 빛과 별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어둠에 대한 통제권한이 됨으로써 벌어진, 위계의 역전이 자아낸 풍경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에 인터넷에 접근할 권한은 디지털 어세스라는 이름으로 정보화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복지가 된다. 인터넷으로부터 동떨어진 이들을 두고서 우리는 ‘디지털 문맹’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는 마치 꼽추가 집시를 만나던 시기의 소외된 어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어둠은 그렇게 외곽에 자리한 이들이 아니라 빛을 지배하는 이들이다. 빛을 통제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든지 어둠으로 숨어들 권한이 있다. 이들은 좌푯값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 벡터가 어디로든 향할 수 있다. 


양지의 신사숙녀들이 어둠으로 숨어들 때 그들은 내면의 야성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래서 인터넷은 그 자체로 거대한 어둠이면서도 무법지대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 현실이 만들어낸 것은 AR과 같은 현실 기반의 풍경이 아니라 현실의 배후에 잠긴 깊은 어둠이다. 인터넷은 거리 위에 놓인 가로등이 아니라 가로등 없이 더는 살 수 없게 된 도심 속 풍경이다. 이 대목에서 빛이라는 건 하나의 권력이 되어 맹수를 조련하는 도구가 된다. 인터넷 속 맹수를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우리가 가로등을 의식하는 덕택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대한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도, 인터넷 시대에 필수적으로 참가하게 되는 그곳에서 내면의 야성을 모두 드러낸다는 뜻도 아니다. 인터넷을 잠재 현실로 읽게 되면 의식과 그 외 기타를 뜻하는 도식으로 연결될 위험이 크다. 이 도식이 위험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모두 내면의 야성이 잠들어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풀려나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잠정적 범죄의 가능성을 심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리바이어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야생에 놓여있지 않다. 바로 그 점이 동굴 안에서 프로메테우스를 기다리던 시절과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스마트폰이라는 편리한 기기는 작디작은 자가발광소자(OLED)의 무수한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켜짐과 꺼짐을 통해 화면을 표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꺼짐을 통해 표현되는 암부 영역은 몹시 어둡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그것과 같다. 어둠을 기본값으로 하여 빛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 한데 어울리면 그것은 거대한 어둠, 꺼진 스마트폰 화면이 된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된다는 점에서 스마트폰 화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이 켜져 있을 때 현실을 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스마트폰은 어두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가로등과도 같다. 그러나 이 안식은 거짓되었다. 우리가 빛에 현혹되는 이유는 어둠이 두려워서일 뿐이다. 스마트폰이 가로등이라는 점에서 착안하면, 이 가로등을 통제하는 이가 바로 어둠을 통제하는 이다. 그는 어둠으로 드러날 맹수를 통제할 권한이 있고, 스마트폰을 통제하는 이가 인터넷 공간의 맹수를 조련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스마트폰 사용을 중지하라는 것은 가로등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가깝다. 다만 우리를 현혹하는 그것에 끌리는 걸 의식적으로 차단할 필요는 있다.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광소자이지만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어둠과 우리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건 스마트폰 화면을 잠시 꺼두었을 때 암부가 반사하는 표면의 거울상 덕택이다. 이따금 우리는 꺼진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끔찍이도 놀라고는 한다. 그렇게라도 우리 현실이 깊은 어둠 위에 여전히 드러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낮과 밤은 공존 불가한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하나’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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