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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5. 2020

현실의 판단을 위한 판단의 현실

김곡은 『투명기계』에서 ‘실험영화’라는 단어는 실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자행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자신의 짧은 소견으로 인해 영화를 독해할 수 없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것을 ‘실험’이라는 카테고리로 치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판단의 판단”이라는 말로 자신의 소견을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실험’이라는 단어는 영화라는 규격을 판단하기 위한 ‘판단’에 불과할 뿐이며, 이는 명실상부한 실용적 용도임에도 그것을 영화의 ‘존재론’적 성격으로 감춰버린다. 이 과정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지평 너머로 사라져버리게 된다. 물론 우리가 영화 전부를 알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역설하는 대목에는 우리가 ‘영화의 미결정성’을 ‘영화해석’의 도구로 종속시켜버린다는 맥락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김곡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영화라는 종의 분화를 변형이 아닌 기원에서 찾고 있다.”고 말이다.


영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영화라는 ‘종’에 대한 생물학적 평가는 이미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화학감광판에서 시작해 말과 식물을 카메라로 찍으려던 시도가 운동 이미지에 대한 발견과 결합했고, 인류의 전쟁사가 길을 내어준 ‘총격(Shot)’의 소리가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들에서도 목격되는)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다는 아주 간명한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영화사에 대한 기술이 될 뿐 어떠한 성격을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영화에 대해 모른다. 옛 그리스인 현자처럼 만약 영화에 대한 진리를 깨우친 이가 있다면 그는 미쳐버리고 말 테다. 우리는 결코 영화라는 우주를 한눈에 담을 수 없고, 그런 이유로 별자리라는 국소적 이미지에 자기 주도적인 발견의 행위를 부여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를 주도적으로 발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화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며, 빛을 보내오는 지점과 빛이 닿는 지점 간의 시차를 우리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불행한 결론만이 나올 뿐이다. 


나는 김곡이 영화라는 줄기세포에 대해 너무 많은 해답을 물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를 논하는 이들이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책임을 영화의 방대함으로 전가해버린다고 말하지만, 이 발언조차 영화를 증언대 위에 세우려는 덧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영화라는 신이 있고 윤리 보편적 판단에 따라 만들어진 법으로 죄인을 처벌하려고 우리는 시도한다. 이 대목에서 변호인은 재판장에게 검사의 구형은 윤리 보편적 진리를 성문화한 법전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올바른 판단을 위해선 파편처럼 분화된 진리가 떠나온 태초의 장소인 신의 성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은 말하지 않았다. 모습을 보인적도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절대적 규율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신에 대한 해석은 보편타당한 진리와 감정의 공유를 위한 실리적 용도로 사용된다. 그것은 법전이며, 성경이고, 스크린이다. 


이 성문화는 진리의 표명과 구분되어야 한다. 성문화는 결코 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인정한 사실을 기록한 것뿐이다. 이 점이 김곡이 말하는 ‘판단의 판단’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화가 아닌 존재로 돌아가 물음을 다시 던져보아야 한다. 존재라는 단어의 양태가 주어인지 서술어인지 형용사인지 조어인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진리는 결코 한 가지 언어로만 말을 하지 않는다. 김곡의 맥락에서 수신자와 송신자의 모델이 크리스티앙 메츠식의 영화 신체에 대한 말에 적용된다면, 우리는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다. 메츠는 우리가 스크린을 거울처럼 보지만 그 안에 자기 신체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영화의 정신분석학적인 측면과 영화의 신학적 면모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다. 스크린 안에서 우리는 신적인 전능성을 지니지만 기초적인(Fundamental) 신체가 없기에 그건 이름뿐인 신이 된다. 그 뒤에 숨겨진 것은 보고 듣고 말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사실 만든 사람을 전제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랜시오 극장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영화의 상영 롤은 스크린 아닌 망막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우칠 수 있을 테다. 수신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는 진리가 아닌 양태라는 것이다. 실랜시오 극장에서 리타와 베티는 오르가즘으로 한창 달아오른 후에 불현듯 극장에 방문하지만, 가수가 부르던 노래가 립싱크라는 것을 알고 경각에 빠진다. 이 극장에서 주체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은 영화라는 기관에 성대가 없다는 점을 말해주면서도, 관객에게는 영화를 독해하는 게 기관이 아닌 주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러한 부분은 작중에서 오르가즘이라는 아주 간명한 신체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되고 증명되는데, 레즈비언 간의 섹스가 ‘삽입’ 없이 이루어지는 정신감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나아가면 근본적으로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말그대로의 성적인 무언가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건 이것이 삽입 없이 이루어지는 레즈비언식의 섹스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실랜시오 극장의 립싱크는 리타와 베티의 성관계가 달팽이관에 와 닿는 소리조차 ‘거짓’이었다는 점을 말해줌으로써 오르가즘에 따른 신음조차 불가침의 무인지대로 만들어버린다. 


꼭 영화와의 관계가 성스러운 (Sexual) 무언가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화에 끌리는 ‘일곱 번째 감각’은 성감일 필요가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지각의 다음에는 성감이 자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면욕이나 식욕이 자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생존의 필수요인이라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게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아닐 테니 말이다. 다르게 말해 영화는 밤처럼 어두운 공간이지만 졸아서는 안 되며, 자신을 죽이고 스크린을 보지만 그럼에도 객석에 ‘살아있음(Lolling)’을 지속해야 하기에 그 두 가지 욕구는 성립할 수 없다. 또한 위의 여섯 가지 감각은 우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 미메시스를 구성하는 요인이기에 영화를 실재처럼 여기는 것에 소모되므로 간극에 대한 지각적 요인이 되지는 못 한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항아리에 남아있는 건 ‘성감’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다. 


성문화(Sexual Culture)의 성문화(Codification)는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결코 장난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그 모든 사랑이 영화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한 논제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그런 맥락에서 <안달루시아의 개>와 같은 초현실주의 영화가 우리에게 열어준 하나의 가능성은, 안구를 절제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시각으로 표명되는 영화 성애의 ‘날카로움’을 지적해주었다는 것이다. 비평(Critic)의 문제가 대상에 대한 치명적인 (Critical) 매력(Atrraction)을 놀이기구(Atrraction)처럼 가로지르는 유희행위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현실 관습을 벗어나 사실 외곽에 자리한 초현실주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현실의 바깥 지대에서만 가능한 일이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현실의 현실이라는 중첩이 초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피상성으로 귀결되듯이, 판단의 판단이라는 중첩 또한 영화의 성문화라는 또 하나의 피상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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