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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7. 2020

코로나 이후의 시네마, 혹은 포스트 코로나 시네마



코로나 사태를 두고 무언가를 논하기엔 이른 시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뉴-노말(New-Normal)’이라는 단어를 유행처럼 사용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논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표준’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가 과도기에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다. 먼저, ‘새롭다’는 표현은 그것들이 정착했을 때부터 이미 새롭지 않다. 그러니까 ‘새로움’은 어딘가에 제대로 안착할 수 없는 성격의 단어다. 때문에 이는 마치 과거와 현재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과거를 말할 때, 과거를 말하는 장소는 결코 현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를 단어로 지칭하는 순간에도 현재는 과거의 일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논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한다는 것과도 같다. 결코 넘어갈 수 없는데, 이는 인간의 기억 능력이 오직 지나간 것에만 한정되어서라는 이유가 있다. 비유하자면 트레드밀 위를 달리는 모습쯤이 아닐까 한다. 트레드밀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바로 이 자리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없이 달리는 현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따라간다는 의미에서라면 추억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추억(追憶)이라는 단어에서 추는 추격하다의 추(追)를 사용한다. 기억이 산발적이고 파편화 된 것을 선별하는 작업이라면, 추억은 마땅한 순서를 따라간다. 여기서 미래를 역산해볼 수 있다. 추억과 기억이라는 두 단어가 과거로의 지향이라면, 그것을 뒤집어 보았을 때. 우리가 미래를 논하는 방식이 산발적인지 순리적인지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알파고 사건 이후로 ‘특이점’이라는 말은 기술이라기보다 제의적인 성격이 더 강해졌다. 사람들은 ‘특이점이… 온다.’라는 말을 장난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이 장난 속에는 우리가 기술에 패배했다는 허무주의적인 평가가 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우리는 미래를 순리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고, 트레드밀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만이 현재를 달리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결정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도, 우리가 느끼는 허무함을 설명하려면 그것 말곤 없다. 우리는 기술이라는 단어가 갖는 두 개의 맥락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는 솜씨라는 뜻으로의 기술(Technique)이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기술(記述)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세계의 파편을 조립하는 것이라면, 무언가를 보고 느낀 점을 써내려가는 것에는 마땅한 순서가 있다. 이 순서가 바로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논리이자 순리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술하는 것에는 의식에 대한 지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이점을 장난처럼 사용하게 된 게 그에 대한 지향점을 잃어버려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특이점이 와버렸고, 우리는 특이점 이후를 살아가는 중이고, 미래에 대한 지향점이 없는 현 상황에서 무언가를 따라갈 용기가 사라졌다. 의식이 어떤 흐름을 따라간다기보다는 모래 알갱이처럼 흩뿌려지고, 밝은 희망이 그에 산개되어 들어온다. 아마 이 점이 이전 시대와의 차이일 것이다. 이전 시대가 점을 모아 희망을 만들어내는 응집의 논리를 따랐다면, 이후 시대는 점들이 희망을 흩뿌리는 산개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원뿔에서 보다 판판한 하부구조가 오히려 상부가 된 시대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넷플릭스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넷플릭스는 단순한 서비스 이상의 위치를 지닌 듯 보인다. 전혀 다르지만 비슷하게 발음되는 플렉스라는 말을 가져와 보려 한다. 근래에 ‘Flex’라는 말이 일종의 허세와 자랑을 겸비한 무언가를 뜻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나는 돈이 많다.”쯤으로 사용된다. 요약하면 ‘플렉스’란 ‘무한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소비사회에 대한 물질지향이 있고, 이곳의 지향점은 미래를 상정하지 않기에 허무주의적이다. 욜로라는 말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욜로와 카르페디엠이 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처럼, 플렉스도 단순한 허세와는 맥락이 좀 다르다. 


넷플릭스에서 플릭스는 영화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미래를 상정하지 않기에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고, 기술적 특이점 이후에 대두된 개념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넷플릭스는 구독자에게 보아야 할 영화를 추천해주지만 그것들을 미래지향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화 추천 알고리즘은 개인의 영화 취향을 바탕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일 뿐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산발적으로 느끼던 끌림의 감정을 알고리즘의 논리로 변형했다는 점뿐이다. 따라서 넷플릭스는 일종의 언어이고 의식에 대한 기술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술을 자신의 본질로 착각한다는 점에 있다. 넷플릭스라는 언어에 인도된 이들은 기술이 서술한 단락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때 기술 자체는 신기하지도 두렵지도 않게 여겨진다. 특이점 이후를 살아가기에 우리는 그걸 이미 내재한 채로 살아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내가 또 다른 나를 거울삼아 무언가를 배우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넷플릭스가 기술한 미래는 나의 지향점이 아닌 과거에 대한 정렬에 불과하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습득할 기회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나라는 사람은 나를 통해서만 설명되므로 근친교배와 같은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이를 취향이라 부른다. 그리고 타인의 취향을 내재화하는 것보다 자신의 취향을 내재화하는 게 더 위험하게 된 시대가 왔다. 플릭스(Flix)라는 플렉스(Flex)는 미래에 자신을 개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벽에 박힌 이들이 지내는 제사상이다. 인간의 판단 능력이 아니라 포스트 휴머니즘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근친교배가 윤리적으로는 나쁠지 몰라도 개인을 고도화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자포자기를 어느 정도 담아서 말하는 것인데, 미래 진행의 근거기준인 특이점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을 묶어둘 근거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라졌다. 전체 사회로는 여전히 있지만 개인을 들여다보면 개인은 모두 방황 중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서 추출한 피를 다시 수혈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자가 수혈은 인체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미신이 있다.


이런 상황에 쐐기를 박는 것과 같은 상황이 코로나 19 사태이다. 코로나 사태를 여러 각도로 접근해볼 수 있겠지만, 영화와 가장 밀접한 건 포스트 코로나, 혹은 포스트 시네마니즘이 아닐까 한다. 우선 코로나 사태는 앞서 느껴왔던 미래를 실체화했다는 점에서 특이점의 안티테제다. 우리가 지금 변증법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마르크스의 영향을 피해 갈 수 없듯이, 혹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느낄 수도 없듯이, 기술을 논함에 있어 특이점을 따로 불러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아기들이 첫걸음을 시작한 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해버리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암스트롱이 달에 내디딘 첫 발걸음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인제 와서 그걸 느낄 재간은 없다. 아기의 첫걸음도 그렇고, 알파고가 보여준 특이점도 그렇다. 


이때 혹자는 왜 굳이 알파고가 특이점의 기준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합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미디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딜 가도 미디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스펙터클이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중요한 건 스펙터클을 우리가 구분해내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스펙터클이 흔한 풍경이 되어버려서 딱히 생각해볼 겨를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스펙터클이라는 구성성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취향이라고 부른다. 모든 장르 영화가 단지 연출만 다른 한 개의 판본인 것처럼, 우리 또한 취향과 취향의 제곱일 뿐이다. 그래서 취향은 우리를 설명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세를 불려 나간다. 근친교배에 따른 변형이 일어난다 해도 특이점을 넘어버린 우리가 그것을 규정할 능력은 없다. 


코로나 사태가 남긴 한 마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비가역성에 대한 선언이다. 이 문장의 뉘앙스는 모두가 잘 알겠지만 그럼에도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면, 아마도 “왜 하필 지금에만” 그런 기준을 적용하느냐는 것일 테다. 그 질문은 역사상 이런 사례는 흔했음에도 지금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미디어가 없었거나, 지금만큼 일상에 개입해있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9.11 테러가 벌어진 이후의 미국은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전세계로 생중계됨으로써, 단지 미국만의 스펙터클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목격했고, 모두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 또한 마찬가지로, 이를 두고서 사건이나 질병보다는 현상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인간이 바이러스를 정복했다고 여겨졌던 천연두 바이러스 이후, 에이즈라는 내재 질병에 대한 각종 미디어의 반응이 있었다면, 그 후에는 코로나 19라는 범사회적인 현상이 있다. 먼저, 천연두 바이러스의 박멸은 인류적 성과로 홍보되고 통찰되었다. 여기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아프리카라는 지역과 에이즈 보균자를 낙후된 무언가로 만들었다. 전자가 연대라면 후자는 분리에 몰두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유래한 바이러스라는 배경적 설명은 1970년대 일본에 공포를 느꼈던 미국인들의 감정처럼, 강대국이자 개발도상국이자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떠 온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 19의 세계적 발현은 옛 미국의 매카시즘을 광범위하게 확장해 놓은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이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코로나라는 현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더한 공포로 품고 있다. 매카시즘이 강대한 나라로 돌아가기 위한 국수주의적 움직이었다면, 코로나 19는 우리가 기술했던 것들을 진정으로 마주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공상의 실현이다. 이는 마치 자동으로 기술되는 역사의 한 챕터를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점에 대한 세뇌와도 같다. 그게 무기력함이나 공포가 아닌 행복의 외견으로 다가온다는 게 무엇보다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19사태는 “모여있지 말라”는 말로 분리를 요청하면서도, “함께 이겨내요.”라는 말로 연대를 요청한다. 물리적 거리는 멀리하되 심리적 거리는 가까이하라는 것인데, 천연두도 에이즈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라는 점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박멸되지도 않을 것이고, 내재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느 뉴스에서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감기처럼 계절성 질병 중 하나로 자리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위에서도 9.11을 예시로 들어 말했지만 데리다가 누누이 말했던 게 그런 점이기도 했다. 데리다는 텍스트에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데, 현재라는 텍스트를 논하려면 미래에 대한 가정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우리가 미래를 역산으로만 볼 수 있는 게 그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취향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는 게 가능한지 여부를 제쳐놓더라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을 모두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영화를 생각하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많아진 상황에서 무언가 미래를 상정하고 역산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 담론은 우리가 포괄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적어도 기술사를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점점 더 희미해지는 의식의 끝줄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향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해진다. 그런 이유로 제공되는 취향에 대한 몇 가지 제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거머쥐는 미래가 아니라 자본주의 테이블 위에서 진행되는 게임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있어야 마르크스가 찾아올 수 있다. 악당이 없다면 영웅이 없고 모험이 없듯이 누군가는 악을 자처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판판한 하부구조가 상부가 된 현 상황에서, 변증법이라는 게 실현 가능한 일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현대에 영화 관객은 영화보다 더 큰 지위를 갖는다. 이는 스크린에 종속된 관객이라던가, 수신자와 송신자의 관계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관객과 영화가 모두 하나의 테이블 위에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게 우리 시대가 갖는 하나의 전제다. 사회는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변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투명해지고 있다. 이 유기적인 투명함은 우리가 멀리 있지만 왜 멀리 있어야 하는지를 가시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가까이 있지만 왜 가까이하려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개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할 뿐이다. 개인 차원에서 방역을 실천하는 게 가장 큰 힘을 갖게 되고, 개인 차원에서 생각을 다루는 게 가장 큰 무기가 된다. 마치, 네트워크상에서 의식을 갖는 인형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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