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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1. 2020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225&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_main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1. 


2차 세계대전이 여러 예술인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코로나 사태가 예술계에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렇다. 이때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이 재난들이 나쁘면 나빴지 어찌 좋게 생각될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성에 관한 여러 철학자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도르노라던가 하이데거와 같은 부류가 그러하다. 물론 반대의 사례도 있다. 벤야민처럼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재난의 양가적 성격에 대해 서술하는 건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그래서 그립다거나 혹은 견뎌냈다는 말 한마디가 재난을 합리화하는데 사용될 수는 없다.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쉽게 해소될 만한 것이 아니고, 그에 원인을 제공한 것들은 그보다 어려워지는 것으로 책임져야 한다. 재난의 무게가 감정보다 무거워질 때 우리는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가 감정을 묻어둔 채로 재난에 대한 복구작업을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폐허를 딛고 일어나려면 잔해를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잔해를 바로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로만 종속된다. 화산재에 깔린 폼페이 유적이 좋은 예시다. 따라서 영원과 불멸은 과거에 얽힌 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하지만 이 특권은 청산되어야 할 것이 바르게 되지 않은 것이기에 막대한 손실을 낳는다. 요즘 말로 하면 적폐라고나 할까. 여기서 이 허무함에 대한 벡터값을 바꾸어 보고 싶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의 도입부에서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몰락은 패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몰락이 선택하지 않은 패배는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불려 온 것일까?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패배를 불러온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몰락은 어떻게 해도 패배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패배라는 말은 우리가 극복하거나 마주하게 되는 무언가가 아닐 수도 있다. 이 경우, 패배는 관측됨으로써 실효 가치를 얻는 현상에 가깝다. 


관측됨으로써 실효 가치를 얻는 것은 양자 역학의 분과가 아니다. 폼페이 유적처럼 자신을 추구하게 하고 몰두하게 하는 잊혀진 것이다. 황금의 땅에 대한 구전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우리는 그걸 찾아다니게 되었다. 이 구전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걸 받아들인 순간이다. 배후에 잠들어 있던 소문이 우리 곁을 찾아올 때 이들은 현상이 된다. 재난을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바로 패배이다. 말하자면 재난은 항상 우리의 배후에 있고, 그곳에서 잔해를 남기며, 그런 이유로 우리는 재난에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다. 잔해를 두고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은 재난의 꼬리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몰락은 패배를 대동함에도 패배와 같은 맥락을 갖지 않는다. 몰락은 텅 비어있고 공허하지만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에 늘 준비되어 있다. 마치 불나방처럼, 우리는 달려들게 된다. 


2. 


거리는 텅 비어있다. 극장도 마찬가지다. 재난이 불어닥친 자리에 몰락이 들어서 있다. 이 현상을 모래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사구처럼 끝없이 미끄러져 가는 구덩이에 비유할 수 있다. 무너져 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그것 자체로 형체를 유지하는 것, 말하자면 이는 ‘구덩이’라는 완결어가 아니다. 이 현상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항상 준비된 채로 있지만 구덩이의 가장 깊은 곳인 패배로 우리를 소개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가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아니고, 오히려 패배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몰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패배할 수도 없다니 어찌 보면 영원한 고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패배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하나의 안전지대가 된다. 


물론 이 표현이 나름의 긍정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처칠의 유명한 연설이 패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는 했어도, 안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몰락은 진보와 사고를 가능케 하는 이성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이 묻어둔 감정을 구출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여기에 못다 한 신형철의 말을 가져와야 문장은 완성된다.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라는 말의 바로 뒤에 따라붙는 것은,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예컨대 세계가 파괴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패배가 우리를 승리하게 한다. 몰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들은 구덩이 밖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이게 이성의 논리를 따랐다면 역사적 진보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적어도 감정에 관해서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런 세계에 감정을 돌려주어야만 한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텅 빈 거리와 텅 빈 극장의 맥락이 다소 다르게 느껴져서다. <사냥의 시간>이 극장 대신 넷플릭스행을 택한 것을 두고서 극장의 완전한 패배를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가 등장한 후로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위협으로 생각했고, 타협과 비타협을 두고 열렬히 싸웠었으니 말이다. 즉, 코로나 사태를 통해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완전히 정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이 우려는 확실한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넷플릭스에 영화의 주도권을 내주거나, 혹은 대등한 지위를 내주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유의해야 할 것은 넷플릭스라는 단어가 고유명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넷플릭스는 특정 서비스가 아니라 영화계가 직면한 거대한 물결을 의미한다. 이 기술적 물결은 TV나 비디오와 같은 플랫폼적인 성격이 넷플릭스에 부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TV와 비디오가 그러했듯이, 우리가 하는 우려는 편리한 공존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영화관을 우려하는 건 영화라는 공간에 대한 우려와도 같다. 그리고 영화라는 공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화관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예견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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