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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0. 2020

‘살아간다’와 ‘사랑한다’, ‘그럼에도’와 ‘하여튼’


1.



김곡이 쓴 두 개의 책을 읽었다. 『투명기계』와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이다. 제목만 보면 뭔가 굉장한 이론서일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기계’라는 단어에서 들뢰즈를 유추해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쉬이 읽힐 것이다.



이 문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론서가 아니라면서 들뢰즈를 언급하는 대목이 그렇다. 이것이 이 책(들)의 이상함이다. 이들은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쓰여졌다. 무언가를 예견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주관적이고, 그만큼 어렵지만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정성일의 말처럼 투쟁심이 넘치고, 유운성의 말처럼 과하게 솔직한 이 책은 누군가에게 불쏘시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쏘시개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불지르는 일이 그것이다. 김곡이 쓴 책을 읽고 누군가는 영감을 얻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 책은 그의 말처럼 ‘판단을 위한 판단’의 술해구조를 갖고 있으며, “영화를 만들 듯이 쓰인” 이 책은 영화를 위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예컨대 이 책은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런 중첩을 제공하는 지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한줄로 요악하자면 ‘시네필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움이나 도전의 성격이 아닌, 대화와 유희의 성격에서 그렇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영감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그만큼 아무 내용도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기는 꺼려지면서도,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책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이 책에 어떠한 스터디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이다.



후권에서 김곡이 말하듯, 철학이 판단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철학은 판단을 위한 판단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어떤 판단을 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돕는 게 바로 철학이다. 익숙한 속담을 빌려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김곡의 이 책을 무책임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김곡은 상점 주인처럼 말한다. 도구를 추천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겠지만 동행인이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2.



김곡의 책에 대한 리뷰를 찾다가, 어느 글의 마지막에 자리한 문구를 보게 되었다. “이 글은 영화 평론가가 작성했습니다.”라고 쓴 문장은 확실히 이상했다. 영화 평론가가 작성했다고 해서 어떤 권위가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원론적인 면에서 ‘평론가’라는 이름이 거창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명확히 해두려는 문장에서 어떤 비루함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김곡의 책에 나왔던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곡은 작가주의가 영화를 감독 하나만의 예술로 오인하게 했다고 탄식한다. 동시에 그는 작가주의가 작가라는 ‘분위기’에 관한 용어임을 역설한다. 어쩌면 아우라라는 표현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특정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해당 영화가 성립할 수 있었노라 말하는 대목을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이 만남에 관한 역설이 프랑수아 트뢰포의 이야기에 적용될 수 있지는 않을까. 트뢰포가 평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평론가라는 직함은 그저 운 좋은 시네필에 그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부류가 있다. 삶의 힘든 순간에 운명처럼 다가온 영화. 구원이라는 짧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이 감정에는 이후의 삶을 ‘영화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마법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무협지에서 자주 보곤 하는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보자. “당신이 나를 구했으니, 이후의 내 삶은 모두 당신 것이요.” 영화에 대한 구원이 헌신으로 바뀌는 것엔 이런 공식이 자리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글의 마지막에 평론가임을 밝히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자문해보게 된다. 평론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중요한 건 평론가라는 영화인에 관한 정의이다. 평론가는 영화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고, 영화에 목숨을 위탁한 사람이다. 그는 데비존스처럼 심장을 밖에 꺼내 두었다. 그의 심장은 영화에 있고, 다양한 분위기로부터 피를 수혈받는다. 그러니 평론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불분명한 게 될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형상이 그일까, 아니면 바깥에 있는 심장이 그일까. 닭과 달걀의 문제는, 작가와 작가주의의 문제로 재구성된다.



3.



못다한 이야기를 하자. 평론가란 무엇일까.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평론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처럼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평론가는 시네필의 대표가 아니다. 따라서 평론가가 다른 시네필보다 더한 권력이 있을 수는 없다.



위의 사례에서 평론가라는 말은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이 글은 평론가가 작성했으니 믿어도 된다는 말, 이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위계화 한다. 그러나 영화가 한우고기이던가. 미학적 마블링이 자욱한 고기가 옳은 고기이던가. 그렇다면 그런 영화를 도륙내는 이는 백정인가? 백정이라는 모멸적 표현을 피해가려면.



이 행위가 옳은지 아닌지를 신학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추기경과 교황은 그 스스로가 일반 신도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누누히 말해왔다. 그래서 그는 신학적 권력을 휘두른다고 볼 수 없다. 구원의 총량은 달라도 맥락은 비슷할 테다. 즉 그것은 업무이다. 성직자는 신이 하는 일을 대리한다. 그들은 신의 일을 떠맡은 것이고, 일하기 싫은 이들은 일반 신도로 남으면 된다. 일반 신도로 남는다고 해서 욕을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신에 대한 봉사는 무책임의 반댓말이 아니다. 헌신은 음의 값에 끌려가는 반발력이고 헌신하지 않는 이들은 자아를 공고히 하고 있을 뿐이다. 다르게 말해 영화에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은 ‘점차 자신을 영화와 구분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적인 것’이다.



김곡은 작가라는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마찬가지로 평론가 또한 분위기이다. 평론가라는 영화적 현상에 대한 분위기가 바로 평론가이다. 모든 영화가 어떤 영화의 변형인 것처럼, 모든 ‘영화적인 것’은 어떤 ‘영화적인 것’의 변형이다. 자신의 기구한 삶이 세상 안에서는 흔해빠진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고유의 것이다. 이것이 평론가가 평론가인 이유이다. 자아를 중심으로 들러붙은 응결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바로 평론가의 이름이다.



4.



김곡은 자신이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플라톤주의자다. 정확하게는 ‘플라토닉’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김곡은 영화를 신체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는 마조히스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온갖 고통을 감내한다는 점에서다. 이 발언에 특수성은 없으나, 그가 강조하는 분위기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마조히스트, 분위기, 두 단어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은 섹스이다. 매몰차게 때리는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성립한다. 미술이나 연극은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와 함께 하지만, 영화는 너와 나만의 은밀한 화합이다. 그래서 오직 영화만이 콜라와 팝콘이라는 스낵을 허용한다. 이 스낵은 문자 그대로 ‘간편한 (like a Snack)’ 것이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은밀한 사랑의 한 형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귀를 간질이는 사랑, 마치 장난과도 같은.



하지만 영화와 우리는 필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영화에 몰입하는 순간 영화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실재는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이다. 따라서 영화는 게임이나 가상 시뮬레이션이 될 수 없다고 김곡은 말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가 없는 우리의 심정은 필히 플라토닉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이런 상황은 서로에게 크나큰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영화가 마조히스트인 것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는 이에게 육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플라토닉하다는 건, 플라톤스럽다는 것. 동굴에 앉아 벽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사랑스러운 게 바로 영화다. 하지만 김곡이 누누히 반대하는 영화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



영화는 그 자체로 미래이기에 “영화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고 김곡은 말한다. 여기서 따라오는 건 뉴미디어이다. 스크린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혹은 영화는 극장에서만 영화일 수 있다는 말. 또한 영화가 게임과 시뮬레이션처럼 변해간다고 한탄하는 대목이 영화의 뉴미디어성을 암시한다. 게임은 사용자를 세계로 집어삼키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면서 영화는 영원히 멀어지는 것, 따라서 ‘미래’라고 주장한다. 즉 그의 맥락에서 미래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고, 이러한 점이 영화를 마조히스트로 만든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뉴미디어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릴 것이라는 그의 우려는 틀렸다. 영화는 게임이 되어 가고 있지만 반대로 게임이 영화일 수도 있다. 예컨대 세상 어디에나 영화가 있다고 보면 어떨까. 아직 도래하지 않으면서도 이곳에서 닿을 수 없는 게 영화라면, 그리고 프레임 안에서 자신을 뽐내는 게 영화라면 우리 눈에 비친 세상은 영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눈은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재현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영화 관객처럼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꿈을 꾸면서도, 몰입하면 깨어진다는 점이 현실의 잔혹함과 닮아 있다. 영화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지만, 동시에 현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판타지는 현실과 다른 풍경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현실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를 상상할 수 없기에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점이다. 왜 우리는 외계인을 상상할 때 ‘인간형’을 먼저 떠올리는가? 메뚜기 외계인이나 달팽이 외계인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영화가 뉴미디어의 일부로 편입되지 아니할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영화적인 것’이다. 믿음의 총량을 잴 수 없듯이 영화의 총량을 잴 수 없다. 단지 믿음의 응결물만이 스크린 위에 보여질 뿐이다. 공기 중의 수분이 이른 아침에 이슬이 되듯이, 세상 안의 믿음은 스크린 위에서 버무려진다. 우리는 (마치 게임처럼) 현실의 안쪽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세상을 볼 때 세상도 당신을 본다. 결국 세상의 바깥은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이 지구는 평평하다.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지구에는 지평선-혹은 한계라는 게 없다.



6.



WHO는 게임이 질병이라고 선언하면서도 게임을 통해 질병을 이겨내라는 모순적인 말을 했다. 동시에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했다. 이에 사람들은 게임중독은 예술중독이 아니겠느냐고 농담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영화중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 삶 자체가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진영의 말처럼 섹스가 게임이라면, 영화와의 섹스는 일종의 게임일 것이다. 따라서 영화를 본다는 건 예술을 한다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 본다와 한다의 지평선을 그려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곧 ‘한다’는 것이므로,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삶을 ‘한다’는 것은 삶을 ‘본다’는 것과도 같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본다’의 동물인 이유이다.



영화 평론가의 의무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남들도 볼 수 있도록 드러내어 주는 것이라면. 영화 평론가의 의무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본다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슷한 삶을 살아도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는 건 아니다.



정신분석학이 심리적 문제라면 기호학은 언어적 문제이고 철학은 신학적 문제이다. 영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도구는 각기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보이게 해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하나가 된다. 어떤 마음가짐을 할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어떠한 믿음을 할 것인가. 이는 모두 비슷한 삶을 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이 분위기로 연결되지는 않는 만큼, 노력하는 이가 꼭 좋은 결과물을 내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럼에도’, 혹은 ‘하여튼’이다.



7.



‘그럼에도’와 ‘하여튼’은 오즈의 영화를 설명하는 단어다. 나는 오즈를 좋아하지만, 꼭 그래서 이 용어를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를 위한 영화라는 말은 영화를 보는 우리를 뜻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이며, 이러한 점은 영화를 어떤 판단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컨대, 영화를 보며 삶의 방향을 잡을 수는 있어도 영화처럼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가 좋더라도 결국에는 살아가야만 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이것을 잊으면 껍데기만 남은 바보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분위기 없는 섹스이자, 분위기 없는 영화와도 같다. 무의미하게 내버려진 것들, 바람 빠진 풍선이나 찢어진 콘돔 등.



구멍 난 스크린은 맹점을 찢어 카메라 옵스큐라를 해체한다. 한 마디로, 김샌다.



영화라는 ‘대상’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대해 서술하는 김곡의 글은 나와 닮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보는 내내 미약한 혐오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자신과 닮은 것을 보며 느끼는 혐오감은 형제자매를 보며 느끼는 혐오감과도 같을 것이다. 사이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이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머리가 긴 나/머리가 짧은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에 그렇다.



김곡이 솔직하게 고백하는 대목과 그에 대한 평가를 나도 공유한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라면 나는 평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적인 것’만큼은 충실히 생각해낼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는 긍정형의 미래로 서술한 이유는 ‘도래하지 않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게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영화에 대해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해낸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삶을 ‘해낸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나는 삶을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충실히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럼에도와 하여튼이라는 말이 ‘살아간다’와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나로 묶는다. 마지막으로 오즈의 영화 중 에피소드 하나를 언급해두고 싶다.



<동경의 황혼>에서, 식당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된다. 계단을 올라가는 이의 모습을 첫 번째로, 그 다음 쇼트에는 마주하게 될 풍경이 펼쳐진다. 이는 시선-운동의 진행방향을 앞쪽으로 제시하는 필름 활동이다.



런데 어느 순간 이 규칙을 깨버리고 마주하는 풍경을 첫 번째로 보여준다. 이때 관객은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정방향으로 나아가던 운동 에너지가 반대로 역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다. 이 사실은 쇼트의 구성을 통해 미리 예견된다. 아마 쇼트의 구성만으로 사람을 울리는 이는 오즈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반대는 에이젠슈타인의 충돌 몽타주이다. 전자는 구멍이 나기에 당황스럽고, 후자는 구멍이 나기에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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