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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1. 2020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1. 


이전 시대부터 흔해 빠진 클리셰로 전해 내려온 아버지 살해라는 공식에 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이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했고, 이러한 모티브는 프로이트에 의해 발굴되어 선대와 후대를 잇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사안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우리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2) 우리는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다. 따라서 위의 두 가지를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면 다음을 고려해볼 수 있다. 3)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아버지 살해라는 행위는 오히려 아버지를 살해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버지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며, 오직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이 동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머니를 아버지 위에 올려둔 도식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머니 위에 올려진 아버지라는 이름의 충수는 독립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감염되어서 우리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그제야 우리는 충수를 제거하게 되는데, 제거하더라도 맹장이 기능하는 것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예컨대 우리는 여태까지 아버지 살해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은연중에 배제해왔던 것이다.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아버지 살해에 이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의 행위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 근친상간의 행위에 정말로 사랑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가 사랑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이디푸스를 바라봄에 있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여성에 대한 사랑을 구분해야 할 필요는 절실해진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여성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하게 될 경우, 이것은 남성의 여성 소유욕에 관한 이야기에 그쳐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자신과 성교를 나눈 여성이 사실은 어머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울부짖는 절규를 통해서 오이디푸스를 본원적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느낀 성욕이 위장을 거쳐 입으로 흘러나오는 과정에는 소화계통을 역류하는 반(反)배설의 함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사정을 성욕의 배설 행위로 가정한다는 점과, 그 배설 행위가 남성의 정복자적 욕구와 은밀히 결합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소화계통을 역류해가는 반(反)배설의 함의란 흐름을 반대로 돌려놓아 수원지로 역류시켜버리는 아주 강력한 흡입이라 할 수 있을 테다. 바로 이곳이 오이디푸스가 본래 자리해야 할 곳이다. 오이디푸스는 받아들이는 자, 먹는 자이다. (어미새는 토해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를 받아들이고, 또 먹는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을 성적인 의도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먹는다는 것은 합일의 과정을 의미한다. 천도복숭아를 집어삼킴으로써 하늘과 일체화되려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고대 아즈텍에서 식인이란 죽은 이를 받아들이려는 영혼 보충의 일환이었으며, 이는 먹는다는 게 받아들인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교에 있어 ‘먹는다’는 말은 오히려 남성이 아닌 여성 쪽에 그 권한이 있음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여성의 질은 남성의 남근을 ‘먹는다’. 이 집어삼킴은 여성이 남성을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남성이 여성에 다가서는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 즉 파리지옥에 홀리는 벌레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 시사점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강압적 폭력과는 구분되어야 함을 당연히 알아 두어야 한다. 그 점을 명백히 한 후에 이 도식에 접근한다면 ‘아버지 살해’라는 강압적 폭력이 현상 자체일 뿐,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의 근본은 아님을 알 수 있을 테다. 


강압적 폭력은 이 도식이 자아낸 부수물이다. 따라서 이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못한다. 나눌 수 없는 잔여물을 탐구하는 건 실재에 집착하는 정신분석학이나 할 일이다. 반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가 사실은 어머니의 ‘질서(Physis)’를 따른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와 반대의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맥락이 다르니 논외로 넘겨두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깊고 넘어가야 하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강압적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살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있다 하여도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를 탐구하고 오류를 지적해야 마땅하다. 여성을 ‘먹는다’고 지칭하는 표현의 맥락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정복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가상의 인육을 취하는 ‘먹는다’의 맥락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정복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때 정복욕은 소화가 아닌 반(反)배설의 맥락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아버지 살해는 아들의 절규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면서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충(忠)을 따지게 되는 세종대왕의 곤룡포이다. 


2.


나는 아버지를 살해하려 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나 권력과 면밀히 연계되어 있는 아버지 살해라는 공식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를테면 비평에 관한 공식이 그렇다. 비평계에서 선대의 의견은 하나의 기류가 되어 거부할 수 없는 질서(Physis)가 된다. 이 질서는 기조나 흐름이라는 말보다는 ‘근원’ 혹은 ‘근본’이라는 문맥에 더 어울릴 듯한데, 요약하자면 우리가 바라볼 세상이 저곳이 아니라 이곳임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상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저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은 어떤 형태로든 그곳이 불필요하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경험이 아닌 구전으로만 전해 들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말은 와 닿지 않는다. 물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인간이 강산보다 더 빠르게 변하게 되는 시대에 강산의 경험이 인간의 경험과 일치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시대가 인간에게서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는 발칙한 반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이다. 


디즈니의 <모아나>에서 고대의 전사 마우이는 인간을 해친 악인으로 설정되지만, 사실은 아니다. 위의 도식으로 보면 모아나는 마우이라는 아버지, 시대를 살해해야만 하는 처지로 그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모아나는 시대를 살해하기보다 시대가 변했음을 납득시키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다. 모아나는 마우이에게 인간에게 지혜를 얻어야만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한 시대가 변한다. 그리고 이 설득 작업은 부족을 이끌어야 할 의무가 왜 모아나에게 부여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모아나가 여성이고 여성도 리더쉽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말은 이 영화에 대한 흔한 설명일 테지만, 이는 곧 아버지 살해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음을 공표하는 발언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역할과 지위와 의무를 물려받는다는 말은 그 시간과 공간이 늘 외부로부터 주어짐을 상정한다. 외부에 있기에 안으로 데려오려면 어떠한 강압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싫다면 순순히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기다림은 진보를 위한 쉼터라기보다 무의지적으로 낭비되는 공간에 가까운 것 같다. 우리는 은연중에 시대에 어떤 권력과 위계, 진보의 함의를 불어넣지만 알다시피 시대란 “원죄의 대상도, 원망의 대상도 아니”다. 이는 시대를, 원죄로든 원망으로든, 살해한다는 말이 완전히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모아나에게 시대는 자신이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계몽이나 교화의 성격이 아닌 감염의 형태를 취한다. 그 이유로는 1) 시대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모아나가 정면승부를 할 수 없다. 2) 시대는 모아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경험상으로도 그가 우위에 있다. 따라서 모아나가 시대를 대하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은 3) 시대를 자신에게 푹 빠져들도록 매혹시켜 앞으로의 방향에서 동반자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에 굴복한다거나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모아나는 마우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서 주체적 여성상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체적 ‘자녀상’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다. 아버지 살해와 아들의 관계에서 배제된 것은 그 이름처럼 ‘딸’이 아니라 부모자녀 간의 술어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인과를 설정하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를 이 순간에 되짚어보아야 한다. 반출생주의라는 개념이 그렇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남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다르게 말해,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악연이나 필연이 아닌 우연이 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비평의 제문제는 아버지로 소구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높이려 든다. 하지만 아버지를 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위상이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심장에 칼을 꽂았다 빼도 칼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살해한다고 해서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에게로 옮겨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자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대상적 존재이다. 다르게 표현해 이는 ‘대상’이라는 이름의 개념이고 이게 영화라는 대상을 정의하는 우리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비평의 대상이 영화라면 그것은 영화를 어떤 것으로 지칭할 것인지에 대한 토의, 즉 개념화를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가 아닌 여인으로 영화를 바라보아왔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질투를 동반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본능적이 된다. 그리고 본능은 질투를 동반한다. 이 질투의 극은 어머니를 살해함으로써 여인에게서 어머니의 성질을 분리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허나, 오히려 제거되어야 할 것은 그 양면성 중 여인의 자리이다. 분명이지 여인은 없다. 단지 어머니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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