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May 15. 2020

포스트 감염 사회의 영화



영화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인류사 전체가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동아시아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은 명백한 디아스포라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터전을 옮겼다. 이때 그들이 마주한 것은 보이지 않는 위협, 전염병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내달린 이들의 모습은 피난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오해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위협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던 게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일구려 했던 게 아닐까? 예컨대, 전염병을 피해 떠난 게 아니라 전염병을 전파하기 위해 향한 것이라면? 이 문장에서 ‘병’이라는 코드를 제하더라도 ‘전염’이라는 화음은 인상 깊게 들린다. 이는 마치 인간을 ‘지구를 감염시킨 병균에 빗대는’ 가이아 이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우리는 디아스포라를 전염에 빗댈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기에 ‘감염’이라 부르는 게 옳을 테고 말이다.


허나 여기에 지구의 입장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사에서 영화의 등장이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도, 그것이 자연적으로 등장했다는 말은 틀렸다. 인간이 없었다면 영화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들이 노래하고, 번개가 사진을 새겨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건 오직 인간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어리석은 면까지 반복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를 일종의 성역으로 생각해왔으나, 정작 그 속을 뜯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창조주인 우리의 당황을 자아낸다. 오히려 너무 닮았기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이를테면 인류가 항상 무언가를 피해 떠나온 게 아니라, 무언가를 ‘감염’시키기 위해 떠나간 것이라는 이론을 생각해보자. 동로마와 서로마제국, 유대인 잔혹사, 모세와 주몽, 중국과 중화민국의 관계, 이들은 모두 전쟁과 패주라는 공통분모를 갖지만, 동시에 정착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감염’이 뒤따르기도 한다.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미국인과 인디언의 관계도, 중화민국과 원주민의 관계도,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 문화의 관계도 모두 감염의 양상을 띤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융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지만, 명백한 힘의 구도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상호 간의 합의인 ‘융합’이 될 수는 없다. 되려, 속수무책으로 섞일 수밖에 없는 ‘감염’이라는 표현이 더 옳다.


감염이란 오직 방어만이 허용된 전투이다. 창 없이 방패만 들고 있으라니 무척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이런 힘의 비대칭이야말로 감염이 왜 비폭력적으로 보이는지를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힘은 가시적인 공포를 만들어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은 항상 불투명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소위 말하는 문화의 힘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문화는 사회 안으로 은밀히 침투해서 어느새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한다. 자본주의와 결탁하면 물신의 노예가 되고, 종교와 결의하면 신념의 노예가 된다. 이때 그들 감염의 증세는 인간의 것으로 포장되어 본질을 쉬이 파악할 수가 없는 상태다.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바이러스와 같은 부류의 병세로 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방패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알려주어야만 병세에 대항할 수 있다.


여러 문화적 현상과 사회적 운동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은, 자신이 방어자라는 점을 명백히 아는 것에 있다. 문화는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지만 우리가 그에 대항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대항한다는 의지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현대 사회의 문화는 하나의 중추를 통해 수천 수십 개의 변형을 만들어내고, 급격하게 소멸됨과 동시에 어느 순간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밈(Meme)으로 불리는 문화적 유전자는 Rna라는 생물학적 소산과는 전혀 다르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들은 사스, 메르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고, 코로나19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등장한다. <야인시대>의 김두한은 2000년에 출두해 잊혀졌다가 2010년대에 다시금 기승을 부린다. 이외에도 발터 벤야민, 빈센트 반 고흐처럼 뒤늦게 전염된 증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재발굴해낸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 시대에 도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전염이라는 현상에 관한 한줄 요약이다. 우리 손엔 오직 방패만이 들려 있고, 그들과 싸워야 하지만 무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의 방패를 하나로 둘러싸며 중앙에 격리해 넣는 것이다.


방패를 격자로 둘러 중앙에 감염을 몰아넣는 모습은, 반대로 생각해볼 때 우리가 그들을 영영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직조한 어망에서도 방직면의 중앙은 비어있다. 우리는 그곳을 ‘실재’라고 부른다. 이 실재는 오직 탐사만이 허용될 뿐 지배되지 아니한다. 그래서 결여인 동시에 잉여로 남는다.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해 실재에서 자원을 빼 오기도, 쓰레기를 버려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의 디아스포라가 종착을 마주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염에 쫓기고 있다. 존 포드의 평행 운동과 W. 그리피스의 정형 운동, 청정지대를 찾아 떠난 로버트 플래허티와 조르주 멜리어스, 이들의 목적지가 어디였든 간에 그들 모두가 감염을 피해 다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웃긴 점은 그들이 감염을 피해 다님과 동시에 청정지대를 그들의 소산으로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존 포드와 W. 그리피스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피해 죽음이라는 실재를 끄집어낸다. 로버트 플래허티와 조르주 멜리어스는 리얼리즘과 마술적-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실재를 포착한다. 이때 네 사람 모두가 스크린이라는 실재로 귀결되고 있으며, 실재를 피해 실재로 떠나온 그들의 모습을 일컬어 우리는 ‘전염병’이라 부른다.


특별히 ‘병’이라는 접미사를 덧붙인 것은 우리가 그들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의 시도로부터 출발했고 동시에 그들은 신화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유전자 단위에 그들의 소산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감염이라 칭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에게 감염되어 유전자 단위로 변형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는 감염자 무리이기에 전염병에 빗대어질 수 있고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영화사를 디아스포라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덧붙여서 여타 다른 예술에도 해당될 이 부분이 오직 영화만을 디아스포라로 만드는 이유는, 영화에 운동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지형도를 그릴만한 추동력은 오직 영화만이 가지고 있다. 게임이나 VR과 같은 뉴미디어는 너무 광활한 자유를 가졌기에 오히려 지형도를 그리지 못한다. 물론 감염의 형태에 가장 최적인 것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뉴미디어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뉴미디어로부터 방어하기에만 급급한 상황에 처했다. 게임과 VR은 우리를 끝없이 체험의 길로 몰아넣으며, 소통 매체와 출력 매체는 무수한 전파력으로 그 어떤 방역도 소용이 없게 만든다. 때문에, 스크린이라는 실재에 갇힐 수밖에 없는 영화와는 달리 그들에겐 백신이 통하지 않는다. 직조한 어망이 평면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선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실재가 깊은 구덩이로 작동하지만, 원자 단위로 직조된 뉴미디어의 형상에서는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 실재이다. 말하자면 뉴미디어는 필연적으로 방역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고, 그건 어쩌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회일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영화를 찾아다니는 이들에게 스크린이란 마지막 남은 최후의 담배 한 보루와도 같다.


이런 과정에서, 실재를 도라에몽의 사차원 주머니처럼 응용하는 이들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전염병을 손질한다.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곧 집합이다. 수렴점은 확산이고 확산은 곧 개체이다.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서 작은 것은 얼마든지 큰 것을 감염시킬 수 있다. 원자 단위로 접근하는 운동을 방어할 방법은 호흡기로 호흡하는 생물인 이상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은 건 나, 너, 우리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고 우리는 너고 우리는 나다.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에 담긴 사물 하나만으로도 바깥 사회 전체를 추론해낼 수 있고, 영화 전체를 통해 바깥 사회의 현상 하나만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모두 일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예컨대 이는 감염의 역사이다. 동시에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영화는 현실로 도피하고 현실은 영화로 도피한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이 되고 현실은 영화가 된다. 그들은 도망쳐 오는 서로를 방어할 수 없으며, 이는 난민문제처럼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사례가 아니다. 상호확증파괴를 성립시킨 핵무기처럼 방어라는 개념은 더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오직 상대를 감염시키는 것만이 생태계의 원리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우리는 조용한 전쟁(Cold war)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조용한 전쟁을 겪는 한 사내가 스크린 밖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 그는 말에서 내린다. 문화-파도가 쉴 새 없이 퍼덕이는 이곳에서, 적극적이었던 운동 에너지는 존 포드의 그것에서 플래허티의 걸음걸이로 바뀐다. 이상은 <제 7의 봉인>의 도입부다. 신의 구원을 찾는 이 영화는 흑사병이라는 전운으로 가득하다. 사내는 죽음과 대결하며 성녀를 관찰하지만 유예된 시간 동안 정답을 찾지 못한다. 이때 유예된 사내의 시간은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동안이므로 영화는 일종의 안전지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스크린이라는 실재를 마주하는 이들은 잠시나마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사내는 흑사병이 맹렬함을 떨치는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다니곤 한다. 그는 이미 죽음이 확정된 상태이기에 죽음의 즉자존재가 되지 못한다. 반면,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성녀는 클로즈업 자체가 즉자적임에도 사람들에 의해 끌려가고야 만다. 말하자면 여기서 맹렬함을 떨치는 것은 흑사병이라기보다 그로부터 감염된 인간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사내는 플래허티의 걸음걸이를 재개하며 북극탐험을 재개한다. 그곳은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고 그는 믿는다.


동결급속냉동은 조용한 전쟁을 ‘차가운 전쟁’으로 바꾸어 놓는다. 반대로 보면, 사내가 향한 곳은 세상 무엇보다도 조용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 7의 봉인>은 감염을 피해 떠나는 디아스포라라고도 할 수 있다. 창을 들고 말에 탄 사내의 모습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과 그에 뒤따른 헬레니즘 혼성 문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 사내는 이곳에 감염을 가져왔고 다시금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그가 죽음과 대결하는 장소는 문화의 요람이며 그곳에서 죽음을 감염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는 방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체스판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체스 게임의 끝은 언제나 체크 메이트라는 최전선의 공격이다. 우리는 체크 메이트를 통해 상대진영을 서서히 자신의 것으로 감염시켜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사내가 방패라도 들고 다녔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대답은 ‘No’다. 원자 단위로 접근하는 병균을 우리는 이겨낼 수 없다. 같은 의미로, 원자 단위로 옮겨가는 믿음의 형태를 그는 관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던 믿음이란 것은, 이미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상호확증파괴를 성립시키는 불안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의 끝이라는 러닝타임의 종말이 예견된 상태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이 실재는 더러운 것을 해치우는 격리구역이 된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더러운 것을 해치울 백신처럼 여기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더러운 것을 몰아넣는 격리구역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사례의 차이점은 어디로 감염이 향하는지다. 전자는 현실로 감염이 향하고 후자는 실재로 감염이 향한다. 먼저 전자에 대해 말하자면. 영화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쪽은 영화가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이들은 영화 전체를 사회의 축소판으로 만들려 한다. 즉 여기서 영화의 집합은 사회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백신인지 아니면 생물병기 앰플인지는 사용하기에 달렸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 전쟁이 문화 정착의 사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듯이, 영화가 현실을 침략하는 것이 면역 정착의 사례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이유로 전쟁과 파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점기는 말 그대로 강점기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떤가. 영화를 적극적으로 감염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쪽은 영화가 항상 어떤 의미작용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돌아보자는 쪽의 의견은 위와 비슷하나, 이들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전염병을 손질하고는 사람들을 감염시켜 자기 의도대로 행하게 만든다. 이게 단순히 유희목적으로만 사용된다면 개인의 사고능력을 퇴화시키는 것에 그치겠지만, 더 나아가 사람들을 실재 안으로 격리시켜버리기도 한다.


영화를 둘러싼 두 개의 사례는 각각 이렇게 작용한다. 1) 영화사는 곧 인류사임을 염두에 두며 침략과 정복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이들에게 영화는 늘 어딘가로부터 흘러왔고 그 안에서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합리화된다. 그러나 이 실재로의 수렴점이 기억의 심층부가 아닌 개체 간의 확산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이들 개체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취향이 이끄는 공간 안에서 집단적으로 감염되고야 만다. 이때 우리는 예술이 문화라는 점을 실감함과 동시에, 이게 정말로 예술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2) 영화를 격리구역으로 만드는 이들에게 영화란 클리셰와 스펙타클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단순히 상품이라고만 분류할 수만도 없는 이유는, 현실 세계의 클리셰와 스펙타클을 통해 실재를 메워보려는 그들 나름의 시도가 있어서다. 이게 윤리적일지 계몽적일지, 혹은 단순한 돈벌이에 불과할지는 실재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바깥의 사람들에 달려있다. 치료를 위해서라면 격리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사실, 집단감염을 통해 집단 면역을 시도하려는 이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결과가 중요한지 과정이 중요한지와 같은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방패일 뿐이니 말이다.


Special thanks to :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