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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0. 2020

근대적 시간과 영화 기계의 탄생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을 읽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좀 길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 이진경이 지적하듯이 근대의 시간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시간이었다. 이때, 자연의 시간을 따르는 농민들은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하루를 살아간다. 따라서 자연적 시간은 신학적 시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지배’라는 표현이 좀 광범위하고 모호하기는 해도, 언더의 개념으로 본다면 대략 그렇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후에는 농사를 지을 때와 다르게 밤낮 구분 없이 일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의 시간이 붕괴하였음을 보여준다. 자연의 시간은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가는 섭리적이고 순환적인 행위였다. 반면, 산업 혁명 이후의 현대적 시간은 노동과 결합된다. 예컨대 현대적 시간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맥락으로 변용을 거치는데, 문자 그대로 ‘시간은 금’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시간은 ‘손해’를 보는 게 되었고, 이는 근대에 일할 수 없었던 ‘밤’이라는 시간과 맞물린다. 밤=손해라는 공식이 아니라, 낮=재화라는 점에서 재화란 곧 ‘살아가는 것’의 증표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근대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그중에서도 현대의 바로 직전인 1900년대 초까지 화폐만큼이나 물물교환이 거래에 애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서양의 산업혁명을 언급했음에도 한국을 예시로 든 것은, 1900년대 초라는 시간이 지금의 우리에게 (산업혁명의 1800년대보다는) 더 가깝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현대적 시간을 영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한, 영화의 발명이 다름 아닌 1895년의 일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러한 평행 나열을 통해 우리는 영화적 시간과 현대적 시간을 비교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밤’을 상징하는 것은 도성의 종소리였다. 도성에서는 종을 울리는 것으로 통행금지 개시와 해제를 알렸다. 이러한 점이 서양에서의 교회 종소리와 비교되도록 한다. 서양에서는 신학적 시간이 자연의 시간에 우선했다면, 동양에서는 도성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에 우선했다. 이때 조선시대의 규율이 유교에 기초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왕=궁궐=도성이라는 것으로 유교적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유교적 시간이 자연의 시간에 우선한다. 


신학과 유교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칭한다. 전자가 ‘The One’의 맥락이라면 후자는 천제(天帝)를 뜻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낮은 신의 감시하에 놓이는 반면 밤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어두운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근대에 어두운 공간은 어두운 시간이다. 어두운 공간에 어두운 시간이 닥쳐오고, 어두운 시간은 일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살아있지 않다. 예컨대 근대에 일한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도 같았다. 집과 일터가 구분되지 않았으며, 예외가 될 수 있는 건 귀족이나 양반과 같은 특권계층뿐이었다. 


낮-일-삶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를 끊은 건 산업혁명이었다. 에디슨은 불 없는 불을 세상에 보급했다. 차례가 좀 늦었지만 조선에도 가로등이 들어왔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동양의 외딴 나라에 덧입히는 건 엄청난 무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적해야 하는 건 낮과 밤의 역전이다. 근대의 기준으로는 밤에도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눈길을 피하는 것이므로 규칙 위반이 된다. 밤에 하는 일은 은밀하고, 퇴폐적이고, 부끄러운 치부와도 같았다. 술, 섹스, 범죄와 같은 여러 위반은 밤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는 ‘일하는 것’이 디폴트 값인 근대에서 ‘삶의 바깥’에 자리한 것이었다. 


불이 생겨났고,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삶의 바깥’은 사라지고야 만다. ‘일하는 것=삶’의 공식에서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로 근대적 기준에서의 유희는 멸종된다. 반대로, 그것이 사라진 곳에는 현대적 기준의 유희가 도입된다. 이 유희는 ‘일하는 것’의 안쪽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근대와 다르다. ‘일하는 것’이 곧 ‘돈을 벌어들이는 것’인 현대에서 유희란 돈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이는 시간이 곧 금으로 매겨지는 현대에서 ‘일하지 않는 시간은 돈을 벌지 못하기에 손해’라는 점을 의미한다. 즉, 현대의 유희란 행동을 실행하는데 드는 비용과 더불어 그에 들어가는 시간의 값어치도 포함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가 현대의 예술품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영화는 근대의 시간이 아니라 현대의 시간을 따른다. 이는 1895년이라는 역사의 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최초의 영화는 달리는 열차로 알려져 있다. 열차가 산업혁명의 대표적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또한 그것이 ‘근대화’의 상징물과도 같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를 바라보는 기준은 두 개로 나뉘게 된다. 예컨대 영화는 근대인가 현대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영화라는 말이 고전기 영화를 함축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근대적 시간을 따른다고만은 할 수 없을 테다. 그렇기에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영화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말은 1895년이 아직 근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통용된다. 우리가 흔히 현대의 시작이라 부르는 시기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점을 참고한다면 그러하다. 그런데 영화는 첫 등장부터 이미 현대적이었다. 바로 전 단계의 예술과 너무 많은 나이 차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영화를 두고 ‘근대 예술’로 칭하는 이가 없다는 점을 보면 확실히 근대 예술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영화는 근대의 산물인 현대의 예술이다. 즉 영화는 태초부터 양가적이었고, 이러한 점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두 갈래로 가능케 한다. 


초창기 영화가 중산층의 유희품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해 이 시기의 영화는 우리가 아는 그것은 아니었다. 아직 영화가 되기 이전 단계인 ‘환등기’나 ‘만화경’를 비롯한 여러 ‘스코프’들은 어찌 되었든 간에 무언가를 ‘들여다보기 위한(Scope)’ 장치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실물을 본다는 것이고 이들은 ‘가상’을 본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은 근대 과학이 근대 신학에 반발해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던 것과는 대비된다. 쉽게 말해 영화가 과학이 아니라 신학에 가까운 이유가 그것이다. 


가희, 영화는 예술-신학이라 할 수 있다. 신학-예술이 아닌 이유는 신학-예술의 시대는 바로크 시대에 이미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을 통해 그려낸 신학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게 예술을 통한 신학의 복권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그려본 신학의 흔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예컨대 영화라는 현실 안에서 신학이라는 가상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게 영화사의 진화이다. 따라서 영화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전히 가상을 추구한다. 단지 그 가상의 추구대상이 보다 이상론적으로 변모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로 재편된 현대문명의 개벽에서 영화는 잔혹함을 내재화한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처럼 잔혹을 눈물로 바꾸어 집어삼킨다. 영화는 상처 입은 조개처럼 이물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미적 산물로 바꾼다. 이 비유의 본질은 환골탈태가 아닌 격리에 있다. 조개는 이물질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했을 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헛된 가상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다. 진주는 여전히 진주이다. 이 점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영화는 아름다워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잔혹함을 아름다움의 안으로 편입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그 무엇보다 잔인하며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예컨대, 영화는 슬픈 짐승이다. 


인간은 모두 슬픈 짐승이다. 본능대로 행동하려 하지만 온갖 사회적 제약이 따라붙기에 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슬퍼도 울 수 없고,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이다. 농경 사회에 분리되지 않았던 일터와 직장은 적게 살아서 적게 얻는 것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일과 삶은 같은 맥락이 아니다. 그럼에도 삶은 언제나 풍요를 지시하므로 그만큼의 재화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한다. 예컨대 노동은 삶이라는 잉여분을 채우기 위한 값어치이다. 현대 사회의 풍요에서 삶은 언제나 여분으로 남겨지고, 그것은 여분의 삶과 잉여존재를 만들어낸다. 


과거에 여분의 삶이 일하는 시간의 밖에 있던 것,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라 일할 수가 없는 밤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대에 여분의 삶이란 우리가 소속된 삶 전체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일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악몽과도 같아서 깨어날 수 없는 꿈이다. 즉 현대의 우리는 영원한 밤을 살고 있다. 이때 그 어둠을 내재화하여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하는 이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현실의 잔혹함을 자신의 안으로 편입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밤은 현실의 밤을 ‘품은’ 게 된다. 따라서 영화가 현실의 도피처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허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진주이다. 우리는 영화의 이물질이자, 영화를 통해 아름다운 것으로 태어난다. 영화는 우리를 치료하며, 우리를 보석 같은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영화가 근대의 산물이자 현대의 예술이라는 말은, 근대를 잊지 못하는 현대의 미련이기도 하다. 목가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신학적 시간을 우리가 그리워한다는 생각이 든다. 근대에 우리는 신학적 시간을 바탕으로 한 자연의 시간을 살았었고, 이제는 신학이 사라지고 온전히 자연의 시간만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때 현대로 옮겨온 자연의 시간은 삶의 바깥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바깥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는 본래적 맥락에서 일탈이며, 본질적으로는 실재를 향한 그리움인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올 수도 없는 이상한 시간을 말이다.


근대 세상은 신학적 시간이 삶의 바깥에 있으므로 우리는 의지할 곳이 있었다. 성직자를 제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이것이 성직자를 나머지보다 상위 계급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삶의 바깥에도 공간이 있다는 점은 우리가 그 안쪽에서 안락함을 추구할 수 있는 토대였었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어 현대로 진입하게 되자 우리는 미수복지대를 수복하게 되었다.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던 베란다를 확장해 거실의 일부로 만들고 나자, 세상은 넓어졌지만 냉기와 온기에 취약해지는 것처럼. 현대가 가져다준 지평의 확장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뒤따르게 했다. 


우리는 초조하다. 삶에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영화는 다가온다. 영화가 세계의 구멍이 아니라 세상의 근원인 이유이다. 근대의 산물인 영화는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며 현대의 우리에게 도착한다. 구불구불한 터널을 지나온 열차는 이제 초고속 이동수단으로 변모, 영화관이라는 터널 말고 네트워크라는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바깥으로 우리를 운송해준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더는 영화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게 되었다 하더라도, 영화가 근대라는 현대의 바깥을 구불구불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예컨대 영화는 서울 외곽을 도는 외선순환 열차인 셈이다. 


아마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은 이 대목에서 형성된다. 이진경은 들뢰즈의 말을 빌려 시간-기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시간은… 우리의 말과 행동….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다.”라고 이진경은 말한다. 본래 문장에 없던 ‘…’을 구태여 덧붙인 이유는 절단과 접합을 반복하는 기계의 양식에 차이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꼭 데리다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차이는 곧 (도구적) 가치가 된다. 남들과 차별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현대인이다. 그리고 이는 산업혁명을 위시한 기계기술이 여러 동일한 것을 손쉽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절단과 접합 사이에서 어떤 가치를 엿보고 확인하려 드는 게 바로 현대인이다. 


영화는 24프레임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1초에는 24번의 빈틈이 있다. 인간의 눈에도 맹점이라는 빈틈이 있다. 그러나 영화와 우리 모두 그 빈틈을 확인하지 못한다. 영화-기계와 인간-기계는 자체적으로 그 오류를 수정하기에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우리 세계에 틈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보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해서니 말이다. 즉 우리는 빈틈을 통해 강해지는 게 아니다. 단지 그것을 피할 수만 있다. 따라서 영화가 거친 삶을 이겨낼 힘을 준다거나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허나 그럼에도 아름다운 게 바로 영화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게 바로 삶인 것이다. 


영화와 삶이 갖는 공통점은 시간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기록으로 본다면 시간을 이겨내겠지만, 그는 자체적으로 시간의 슬하에 놓인다. 나이를 먹고 싶어서 먹는 사람이 없듯이, 영화이고 싶기에 영화인 영화는 없다. 이는 우리가 자연의 시간에서 필연성을 목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필멸자다. 동시에 연민의 대상이다. 그는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있으며,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근대적 시공간에 아직 머물러있다는 점에서 신학의 보호를 받는다.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가 발견했던 건 바로 그 영혼이었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혼과 쿨레쇼프의 영혼은 영화의 빈틈에 작용하는 신학적 에너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따금 영화를 보며 영화의 서사와 형식에 관계없이 어떤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그 빈틈을 발견했기에,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받아들임이 아닐까 한다. 이를테면 나루세 미키오의 <번개>처럼 영화를 가르는 순간에 느껴지는 빈틈은, 일종의 고지이거나 계시라 할 수 있다. 혹은 우리가 존 포드의 역동성과 그리피스의 평행성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런 부류일 것이다. 이는 쇼트와 시퀀스라는 절단과 접합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라진 구원을 영화 안에서 찾으려는 영화의 어떤 시도이다. 영화라는 자연은 밤으로 절단되고, 낮으로 접합되는 것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 이때 그 하루는 24시간, 1시간에 1프레임씩 진행되며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는 교회의 종소리를 따른다. 그래서 영화는 삶의 빈틈이며 세속이 아닌 목가적 삶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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