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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5. 2020

마술쇼의 러닝타임

사람들은 영혼이란 그것이 집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쉽게 산란(散亂)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귀를 기울이는 것은 주의력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력이 최고로 발휘된 단계이며 주의력이 자신의 품에서 습관을 출산하는 순간이 아닐까? 이 붕붕거리거나 윙윙거리는 소리는 영혼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넘어서는 문턱과 같은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습관과 주의력』-


1.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에 비견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를 가만히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늘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개중에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영화라는 마술쇼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라는 마법은 궁극적으로는 영화관 안의 무대로서 그가 환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렇기에 그는 마법이 아닌 ‘마술’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쇼’가 된다. 그런데 몇몇 관객은 마술쇼를 보며 마술사의 기술을 낱낱이 파헤치려고 든다. 이때 우리는 그의 앞에 서서 ‘마술쇼는 오직 즐기는 용도로 고안된 속임수’라고 나지막이 조언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술쇼는 즐기는 용도가 아니라면 더는 마술로서 향유될 수 없는 부류의 상품이다. 다르게 말해 마술은 우리가 즐기는 순간부터 이미 환각인 것을 전제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사실 마술에서 진실을 요구하는 움직임(Movement)은 우리가 시계초침을 보며 시간을 자각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행동이다. 우리가 시계초침이 가리키는 시간이 정말로 참된 것임을 인정하는 이유는, 흘러가는 시간을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루를 붙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듯 말이다. 


2. 


마술과 시간의 공통점은 그것이 하나로 봉합되어 처음부터 일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것들에는 본체가 따로 없다는 점을 잊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흔히 우리가 마술이라고 지칭하는 것에는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편집 지점이 없다. 마술은 오직 전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마술이라고 여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마술의 중간지점이 끝나더라도 비밀은 여전히 유지될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편집 지점이라는 게 없다. 그러나 마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에는 기원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마술은 마술사의 입장부터 환영을 동반하지만 시간은 언제부터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예컨대 시간은 늘 자신의 기원을 조수로서 동반한다. 이 기원은 우리가 추정할 수 없기에 반대로 우리를 추진시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떠나온 곳을 모르면서도 찾아갈 곳을 모르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저 걷기만 할 뿐 어떤 무대의 끝자락을 보고 있지는 않다. 


영화라는 마술에 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아마도 그렇게 갈리는 듯하다. 영화가 마술과 같은 무언가라고 말한다면 인체분리마술과 같은 놀라움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을 테다. 인체분리마술은 분명 신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의 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체가 분리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가능성을 수긍하게 된다. 같은 의미에서 영화가 내재된 것들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긍정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가 품은 시간이 죽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3. 


영화가 품은 시간은 마술이 품은 시간처럼 철두철미하게 지켜져야 할 불문율이다. 다른 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영화의 시간에 토를 달지 않고 푹 빠져보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이 선언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어긴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따라서 만약 혼자만의 유희라면 객석에서 일어나든 큰 소리로 떠들든 별 상관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소유의 방식을 공유재산에서 사유재산으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술의 시간은 마술쇼의 러닝타임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전체에 대한 적용은 아니다. 마술은 자신이 쇼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물이다. 이는 항상 법칙의 예외가 되어왔던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마술적인 것들은 언제나 자신이 예외일 수밖에 없음에 대한 체념과 우울감을 안고 있다. 세상에 섞여 들어가려는 노력이든 아니면 예외적 사례를 만들어보려는 경우이든 간에, 그들은 항상 자신의 마술적 신체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술적 신체와 시간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리는 유년기를 떠올리게 된다. 신체에 찾아온 성적인(Sexual) 변화는 모종의 성스러움(Rising)을 자아낸다. 2차 성징을 겪는 아이들은 자신이 겪는 변화를 신체가 아닌 세계로부터 발원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아이들은 자신이 세계로부터 지정되었고 그렇기에 결코 도망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세계의 중심에 놓인 사우론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절실해진다. 


4. 


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는 초상이 언제나 눈을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초상은 그로서는 카메라를 바르게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카메라가 피사체와 눈을 마주한다는 것은, 카메라에 의해 도출된 결과물을 본 사람 또한 같은 지위에 올라섬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메라는 어떤 시야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심연을 보여주는 마른 우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된다. 만약 깊은 우물 속을 찍은 영상이 있다면 그것을 보는 누구라도 우물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러므로 2차 성징기에 변화하는 것은 오직 신체만이 아니라 세계도 그러하다. 아이들의 2차 성징에 대한 공포는 자기 신체에 대한 내재적인 목격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와 그로부터의 응시로부터 기원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 올려져 있음을 알고는 기겁한다. 자신의 신체는 인체분리마술의 재료가 되어 마술적으로 변화하지만, 정작 이것이 물리 법칙의 완전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때는 후일이다. 


다만 세계로부터 발원하는 신체는 추적이나 감시가 아닌 카메라에 대한 응시의 범주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술적 신체를 주시하는 이는 세계가 아니라 마술쇼를 바라보는 관객이다. 마술쇼를 바라보는 관객은 마술이 벌어지는 세계에 동의함으로써 어느 방향에서든 합리화되는 무대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객석과 무대는 엄밀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되는데, 동시에 그런 엄밀함을 무시하고 상호 간에 교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엄밀함이야말로 우리가 보내는 의구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5. 


사춘기 아이의 조심스러움은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걸어 잠근 문은 자신의 마술적 신체가 세계적 현상이라는 오인에서 시작된다. 잠긴 문이 세계로부터의 응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으리라고 고대하는 것이다. 반대로 보면 세계의 가장 말단으로부터 비롯된 변화가 중심부의 자신에게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그런 착각이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만들어 낸다. 


예컨대 아이들은 자신을 마치 모종의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처럼 여기고서 방문을 거쳐 격리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술적 신체가 꼭 마술쇼의 무대에만 올려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동시에, 객석과 무대가 마땅히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마술이 만들어내는 응시의 효과라는 점을 간과했다. 마술의 환상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늘 응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세계가 담긴 작은 무대, 벽에 걸린 초상이 주는 아우라와 유사한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시간은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이 스크린을 겪는 과정에서 마술적 신체를 내재화함으로써 주변에 달라붙게 된다. 영화 관객은 객석에 앉은 자기 신체의 기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자신을 세계 안에서 부유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관객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신체 변화에 놀라면서 잠시나마 유년기 시절의 2차 성징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경험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며 영화로부터 자신을 숨기려 들지만, 우리는 그 또한 마술쇼가 아닌 마술상(phantasmagoria)이라는 걸 아주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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