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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4. 2020

기호학과 기호식품


1.


나는 기쁨을 말하는 영화보다 슬픔을 보여주는 영화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건 윤리가 아니라 관측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침대에 누워있으면 몸이 편안하고 좋지만, 침대에서 일어나 보면 행복은 온데간데없고 움푹 꺼진 매트리스만 보인다. 이게 슬픔이자 인생의 바닥자리이다.


그래서 오르가즘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섹스라는 게 젖은 침대보 말고는 남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기쁨이 쾌락이라는 말과는 또 다르지만, 순간의 번쩍임으로 인해 어차피 눈을 감게 되는 이상 그런 (화려한) 불꽃놀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영화가 항상 잔상으로만 남게 되는 일이 어디까지나 시각에 의한다는 점, 다르게 말하면 그래서 섹스가 감정적인 행위인 것이다.


2.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보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그중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라는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영상이었다. 제목은 <다다미 넉 장 반>이라는 문구에 ‘기호학’이라는 단어를 접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호학이라는 게 일종의 방법론처럼 사용되고 있는 셈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접하곤 하는 ‘기호학으로 비평하기’ 등을 생각해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겠다만. 어딘지 모를 그 단어가 나는 싫었다.


분명 영화 공부를 시작하던 초창기에 기호학에 매료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님의 표정이 떨떠름했던 이유를 알 것만도 같다. 기호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게 해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로 어떤 탐구를 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는 기호학을 처음 접한 이들이 쉽게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한데, 자신이 도라에몽처럼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기호학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론이 되는 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론이란 자신이 어떤 안경을 쓸 것인지의 차이이다. 볼록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이 볼록해 보이고, 오목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이 오목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안경에는 렌즈가 두 개 있지만, 되려 너무 가까이 있기에 두 개처럼 보이지 않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론이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가끔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도 한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이 어디 갔는지를 찾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면 꽤 우스꽝스럽다.


3.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다만 자신이 불현듯 집어 드는 풍경들이 사실은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볼 필요는 있다. 여기서 잘못되었다는 말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이상하다’라는 뜻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두 단어는 뉘앙스 차이가 확실하다. ‘틀렸다’는 말은 선을 확 그어서 이쪽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겁박하는 반면, ‘이상하다’라는 말은 지반이 서서히 꺼져가는 어떤 희미함 같은 게 느껴진다.


쉽게 말해 이상함은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다리가 붕괴하는 게 갑작스레 붕괴하는 듯 보여도 잘 관찰한다면 평소에 이상 징후가 있었음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상 징후를 눈치채지 못했을 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바로 “우리는 틀려먹었다.”라는 극렬한 신음이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일이 단지 부주의로 인해 일어났을 뿐이라는 점. 이에 극렬한 회의감이 드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틀려먹었다는 말로 선을 긋는 행위가 다음 길에 대한 제안이 될 수는 없다. 선이라는 건 경계이고 경계는 건너편을 경계하게 한다. 경계라는 건 건너편을 상정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곳의 의미를 비워버린다. 여기서 의미와 무의미라는 구분이 파생되는데, 눈에 보이는 게 의미라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무의미하다는 말은 궤변이다. 본다는 건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부를지도 불명확한데 그 안에 담긴 것까지 알 수는 없다.


4.


기호학의 문제는 오직 의미만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애초에 기호학이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므로 이게 어떤 비판점이 될 수는 없겠지만, 기호(記號)학이 자신의 기호(嗜好)를 결정하게 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도구에 지배당하는 일도 불행하지만, 의미와 무의미 중에서 절반의 세상만을 획득하는 일도 불행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는 남녀가 한몸에 있었다인간의 오만함으로 신체가 잘려나간 결과물이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이다. (플라톤, 『향연』)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계속해서 한 몸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인데, 둘 중 무엇을 의미로 놓을 것인지와 같은 생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문제는 한몸이란 어떤 상태일지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일의 여러 판본을 추구하고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남녀가 하나가 되는 방법은 섹스이고 섹스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체위라고 부른다. 느끼는 감정은 오르가즘 하나인데 그 하나에 도달하는 여러 다른 판본이 존재한다. 반대로 말해 단순히 오르가즘만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체위를 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르가즘만이 필요하다면 자위와 섹스의 무게는 동등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섹스를 단지 의미로만 소비하는 것뿐이다.


의미 없는 섹스가 없다는 게 아니라, 섹스는 일종의 기호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섹스를 해야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이기도 하겠고, 섹스가 다양한 체위로 즐길 수 있는 기호 행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수잔 손택의 성애학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영화가 현실의 반영 혹은 거울이라면, 우리는 영화의 잃어버린 짝이고 그들과 결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면 절묘한 순간과 부드러운 지점이 보내오는 오르가즘일 테다.


5.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그걸 삶으로 적용하는 게, 어찌 보면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얻는 건전한 행위로도 보이지만. 영화가 의미라면 현실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은 좋지만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연애를 할 때도 상대방만을 바라보지 말고 상대를 사랑하는 저 자신에게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상대의 뒤를 쫓다가 정작 무너져가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니 말이다.


기호학이라는 게 영화를 따라가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은 단언컨대 사실이지만, 그전에 먼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져야 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면 생각지도 못한 결론을 내리고 놀랄 때가 많다. 이를테면 생각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나 사 먹으려 했더니, 정작 뭘 먹고 싶은지 몰라 냉장고 앞에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곤 한데. 이게 우리가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기호식품이란 기호로만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고 개인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는 기호를 가정한다. 그러니 애써 고른 음료수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해도, 자기 취향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 시도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없는 일을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실패를 취향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버리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신형철이 말한 바 있듯이 몰락한 것들에는 처연함보다 떳떳함이라는 감정이 우선시 되기 마련이다.


6.


무의미는 조금 더 당당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를 인격체에 빗대어 말한다면 그렇다. 무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건 의미를 따지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냥 생각해보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악플이 아니라 무플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죽음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떨림도 상당하지만, 그것이 공백에 부딪혀 오는 소리의 굴곡이라는 점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반사되어 오는 소리의 정향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메아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메아리는 화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성립하는 슬픈 처연함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만 그것을 돌려줄 수 있는 이상한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면, 자연스레 의미 있는 것들을 보려 할 테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낸 의미의 짝은 ‘메아리’가 되어 사라진다. 영화가 바로 그렇게 잔상이 되는 것이고,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자신에 의미를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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