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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7. 2020

도서관에 대한 단상 : 멸종된 것을 위한 판타지아

1. 다른 이의 흔적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이의 흔적을 느낄 때가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서관은 책을 빌려주는 곳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빌려 온 책의 흔적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의 현 소유주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라는 거대한 보고는 자신을 거쳐 간 이들의 모습을 지운다. 다르게 말해, 도서관은 기록을 통해 시간을 극복하는 장소이자 거쳐 가는 것들의 시간을 흡수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간 흡수 장치로서의 도서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서관을 단순히 도서 대출의 기능으로만 사용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1970년대 이후로 계속되어 왔으나, 사람들을 도서관에 머무르게 하는 것들이 우리가 말하는 ‘시간 흡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라. 오늘날의 도서관은 ‘미디어테크’라는 이름으로, 영화와 같은 영상 자료를 열람하고, 책상 위에 앉아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도서관의 개념이 오래된 활자 문화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짧은 변화에서 활자 문화의 쇠락을 선언하는 건 확실히 무리이다. ‘벗어나게 되었음’이라는 단어가 삶의 어떤 단계를 구체적으로 점지할 수는 없다. 활자 문화가 막 유년기를 지나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나, 그들이 청년인지 중장년인지는 겉모습만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한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한계를 시대의 한계로 확장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일 텐데, 우리는 영상 시대를 살고 있고 글을 읽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거나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 보면, 우리 시대의 문자는 이미지와 결합해 있음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문자 자체로 이미지가 된 것들의 몇몇 사례: 포스터, 카드뉴스, 캘리그라피 등. 이들은 모두 문자이지만 그림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문자라는 점 또한 분명해서, 이것들은 어떠한 체계를 갖춘 채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이미지에 언어와 같은 체계를 대입해서 이미지를 활자화했던 몇몇 시도를 지적하겠지만, 그림의 언어가 활자의 언어와 같을 수 없다는 점은 증명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되풀이해봐야 정해진 공식의 계산을 수행하게만 될 뿐이다. 


2. 시간들 혹은 잔류사념


오늘날 대부분의 도서관은 서지정보를 디지털 시스템으로 관리한다. 이를 응용하여 방문자가 원하는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검색 기능을 제공하기도 한다. 도서관을 방문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열람하고자 하는 책을 미리 확인해보지 않는 이는 드물고, 이는 어쩌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여 우리의 선택지를 제한해버리는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 합리적으로 변했고, 그런 합리성이 비록 근대인의 이성에 비견될 수는 없겠으나,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서지 정보 검색 기능을 제공하는 홈페이지가 있다. 원하는 도서의 서지 정보를 손에 쥘 수 있도록 인쇄기가 PC 옆에 설치되어 있다. 이때 프린터기는 활자를 그림처럼 찍어내는 타자기와, 풍경을 그림으로 변환하는 사진기의 결합물이다. 말하자면 프린터기는 문자도 사진도 모두 재현해낼 수 있다. 그리고 문자를 찍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 사이에는 가역성과 비가역성과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에서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문자는 다 쓰이기 전까지 무슨 의미인지를 특정할 수 없는데, 사진은 실시간으로 풍경을 재현하므로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를 믿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프린터기로 인쇄한 문자가 더는 문자일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오탈자를 즉각적으로 수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자라기보다 사진에 가까운 이 종이를 두고서 우리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책에 낙서가 되어 있다면,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은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이다. 동시에 우리는 책을 거쳐 간 이들의 이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에 책의 뒷면에 대출기록카드를 기록하던 우리는 그들을 철자가 아닌 그림, 완성된 이름의 형태와 시간으로 파악했었고,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나 디지털 시스템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는 있다. 


3. 이미지-사진첩=소주제?


인간이 디지털 세상에 남긴 흔적들은, 딱히 손을 대지 않아도 영원하지만 그만큼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복제시대가 남긴 잔상이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우리가 디지털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다수가 아날로그 상의 현실에도 온전히 넘어온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위의 사례에서 문자를 인쇄하는 프린터기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는 워드 프로그램으로 생각을 찍어낸 후에 그걸 프린터기로 인쇄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정신을 지면으로 인쇄한다고 여겼던 타자기에 대한 최초의 분석과 연계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워드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활자는, 그것이 문자인지 이미지인지를 딱 잘라 구분하기가 힘들다. 물론 문자는 한자의 경우처럼 이미지의 조합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이미지란 금속 활자처럼 점묘화의 구성성분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쓰는 글은 한 폭의 그림이고, 그런 그림을 조각 모음 하여 만드는 게 한 권의 책이다. 이런 책들이 한데 모인 도서관은 아날로그 형태로 존재하는 디지털 파일의 보관소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활자화된 사고가 아니라 이미지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을 품에 안는다. 


오늘날의 서지 시스템은 내용이 아니라 이름을 우선시한다.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큰 번호로 분류해두지만, 결론적으로는 저자와 책의 이름에 따라 세부로 분류한다. 이는 이용자가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상의 서지 시스템에서 저자와 책의 이름을 통한 검색이 주로 이루어진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완벽한 선언은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거시안은 힘은 잃었다. 철학, 영화, 사진과 같은 대분류가 아니라 이동진, 정성일, 유운성, 남다은, 씨네 21과 필로와 같은 활자가 소주제로 사용된다. 덧붙여서 이들은 활자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우리에겐 정성일이라는 이미지로 대표되는 주제첩 등이 더 자주 사용된다. 


4. 빈곤한 것들의 호소 


그렇다고 해서 이름이 권위를 얻는 것도 아니다. 이름은 이미지의 활자화된 버전으로, 이미지에 붙이는 바코드와 같은 무언가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물건의 물류와 결제 등을 위해 바코드 시스템에 접촉하듯이, 이미지에 접속하려면 이름에 닿아야만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왕가의 이름에 사용된 한자를 영원히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즉 왕이라는 신분-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에 사용된 한문은 그 이미지 자체에 영원히 귀속되어 버린다. 이는 우리가 활자로 알던 한문을 이미지로 환원함과 동시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상품에 먼저 적용된 바코드가 도서를 분류하는 서지 시스템에 적용될 무렵,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시스템도 자본의 성질을 빌려온다. 정확하게는 자본의 이미지에 관한 방법론, 상품으로부터 활자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가져온다. 상품에 걸린 바코드를 찍는 즉시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어느 물류를 거쳐 왔으며, 소비자가는 얼마인지와 같은 정보를 데이터 형태로 받아든다. 여기서 데이터의 형태는 모니터 위에 찍힌 활자이며, 그것들은 별개가 아닌 모음으로서 이미지가 된다. 이는 마치 우리 자신을 판매하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는 구직자의 모습이며, 구직자가 이미지를 판매하는 상인인 것도 그 때문이다. 


구직자가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도서관이 일종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늘날 도서관은 관내를 어슬렁거리는 산책자에게 선택당하기보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검색해 그 존재를 특징짓는 이들에게 노려지는 일이 더 잦다. 길거리캐스팅보다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채용 시스템의 출현은 어쩌면 물질에 대한 불신이기도 한 것 같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기보다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보고 난 후에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근래의 상품 판매 문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책이라는 상품이 아니라, 책이라는 구직자를 상품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5. 필름 거리의 산책자 


책들은 자신이 어느 자리에 읽혀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른바 서지 시스템의 출현이 문건의 인용을 편리하게 해주었다는 점은, 반대로 볼 때 우리가 상시 대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름을 적어 넣으면 언제든지 불려 올 수 있는 서지 시스템은 마치 낙인처럼 자리해 그들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버린다. 다른 경우이지만, 이렇게 방대한 서지 데이터 안에서 문건들은 서문, 추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판매해야 한다. 그들은 세일즈맨이며, 동시에 이미지 장사꾼이다. 그러나 이것이 활자화된 지식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 두어야 한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오늘날 지식은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영화를 소개하는 유튜브 클립이 영화의 퇴화가 아니라 영화의 서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소개하는 썸네일은 일종의 바코드 역할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바코드가 상품의 전산화라는 점에서, 유튜브 썸네일이 도서 표지와 같은 포장재의 역할을 할 것만도 같지만, 우리는 도서관과는 달리 그것들이 알고리즘의 형태로 우리 앞에 도달한다는 점을 발견하곤 한다. 도서관의 서지 시스템이 아날로그 공간에서의 산책자를 멸종시켰다면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용자에게 서지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산책시킨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공간은 이용자의 동선을 적절히 분배하는 방식으로 설계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이용자가 공간을 지배하고 활보한다는 생각이 사실은 그와 반대라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비슷한 주제로 엮인 도서관의 한 골목은 서지 분류 체계에 따라 100에서 900까지의 자리 중 하나를 점유하지만, 그곳을 걷는 우리는 자리를 뜬 지 오래이다. 오늘날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대출하는 문화 향유의 거리가 아니라 마치 박물관처럼 오래된 사상을 구경하는 곳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단지 접촉을 위해서만 도서관에 방문하고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은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독서는 이미지에 대한 독서이자 남겨진 것들에 대한 접촉인 것이다. 


6. 조각과 파편이 남긴 성흔들


다른 사람이 책을 찾기 위해 인쇄해둔 서지 정보 조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것들은 주로 책 사이에 숨죽이고 엄폐해 있었는데, 어느 날에는 그것들이 마치 다음 독자에 대한 선구자의 전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주로 선행 독자의 흔적을 느끼는 일은, 대출 시스템이 디지털화되기 이전에 책 뒷면에 있던 대출기록카드 혹은 무분별하게 그어놓은 필기의 흔적 등이었지만, 도서관 마을의 100번 거리에 살고 있는 이 책을 먼저 찾아온 이가 남긴 주소 조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 오늘날에는 새로 생겨났다.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가 활자보다는 편지의 겉면에 있는 이미지에 가깝듯이, 우리가 발견한 서지 정보 조각은 책을 찾아가는 주소이기에 앞서 이 책을 검색해본 어떤 이의 생각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발견은 이 책을 굳이 찾아왔어야만 하는 이의 필연성에 대한 전언이기도 하며, 반대로 보면 책을 향한 추구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 우리가 찾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이 책을 찾아온 가장 마지막 사람이다. 마치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임을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인터넷 쇼핑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가장 마지막 승자가 항상 결제를 마친 뿌듯한 표정의 우리이듯 말이다. 


유튜브를 켜는 순간 혹은 티브이를 트는 순간 쏜살같이 달려오는 영화들에 입마개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위험한 견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거리에서 목줄에 메인 채로 끌려다니는 게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입마개의 필요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함을 맞닥뜨리고야 만다. 알고리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최후의 독자로 남지만, 멀리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우리는 그저 숱한 이미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잠자리의 눈처럼 모자이크 처리된 이미지의 집합은, 분열된 세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의 총체가 우리의 세상임을 말해준다. 예컨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나에게 왔다는 사실은 책을 집어들었을 때 알아차리기 쉽지 않듯이, 여러 이미지를 거쳐 바라보게 되는 세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능숙해질 필요가 있다. (by 『One Way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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