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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3. 2020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의 성립

 

1. 


탄생은 경이롭지만 소멸하는 것은 애처롭다. 사바나의 초원에서 태어난 아기 기린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어미 기린도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경이로움과 애처로움의 동거.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건 삶과 죽음의 교차일 텐데, 동정심을 잠시 접어두고서 두 기린의 자리를 바꾸어 보도록 하자. 탄생은 애처롭지만 소멸하는 것은 경이롭다, 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일까. 


우선 탄생의 애처로움. 거친 사바나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아기 기린의 탄생은 경이롭다. 아마도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자연의 신비로움, 혹은 그곳의 ‘발견’에 대한 관찰자의 감정일 것이다. (순수에 대한 접촉.) 그리고 소멸의 경이로움.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죽고, 혹은 죽음으로써 제 사명을 마무리하는 몇몇 경우를 논해볼 수 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죽은 용사나, 소멸과 동시에 탄생하는 것인 폭죽 등이 이런 부류이다. (접촉의 제거를 통한 순수.)


여기서 우리는 탄생과 소멸에 대해 알고 있던 기본값을 제거하고, 탄생과 소멸이라는 단어를 자체로만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경이로움과 애처로움은 일종의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탄생과 소멸이라는 현상 자체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 우리는 그저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탄생과 소멸이라고 부를 뿐이다. 예를 들어 찾지 못한 시체는 어디까지나 실종의 범주에 든다. 그 범주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존재의 소멸을 눈으로 목격하지 못해서다. 어찌 보면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손을 떼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의 성립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는 말은 ‘손에 만져지는 것만을 믿는다’는 말의 하위호환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물질세계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성질과 관계가 있다. 액체가 아니라 액체성, 혹은 르누아르가 아니라 르누아르’적’인 것. 이른바 스타일이라거나 하는 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이 성질에 대하여 우리는 유전적 계보를 그려보곤 한다. 낯선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익숙한 사람의 향기란 우리가 기억하는 이의 모습에 ‘얼마나’ 접촉하게 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손을 통해 만나는 세계를 눈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은 물질과 재화가 시간을 떠돌고 있으며, 그것들에 일일이 감정소모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의 역설적인 면을 실토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물건을 구매할 때 돈을 지불하는 것은 화폐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 존재가 정말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손을 떠나 더는 없는 게 되어버렸으므로 그것은 소멸했다. (시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같은 이름으로 된 다른 존재가 통장에 채워지고, 그게 이전과 같은 ‘돈’인지 아닌지는 별 상관이 없게 된다. 우리에게는 그저 통장에 숫자로 찍힌 것들, 화폐의 존재를 ‘발견’하는 기쁨만이 있으니 말이다. (즉, 화폐의 일련번호란 화폐의 ‘스타일’이 될 수 없게 되었다.)


2.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 신지가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순간 화면 전체에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것을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의 범주에 넣는다면,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 버금가는 존재의 소멸을 탐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른바, 여기 이곳에서 영화는 사라지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뤼미에르의 시절까지 없애 버리려는 이 발칙함을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조르고, 목이 부러지는 순간 세상은 본격적으로 멸망가도에 들어선다. 모든 것이 용액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과정은 소멸의 절차인데, 이 소멸이 기쁘게 다가온다면 그 이유는, 접촉의 제거를 통한 순수를 꾀하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지 않아도 되는, 모든 생명이 용액으로 환원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소멸의 경이로움을 본다. 그리고 이 소멸의 경이로움은, <트리 오브 라이프>의 도입부에서 죽은 아들의 모습이 종교적 순수함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구성은 시간을 돌려 우주의 탄생지점으로 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존재의 미약함이 세계의 거대함을 품는 과정에는 그릇에 담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에 접촉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는, 거시적인 면으로 본다면 영화가 왜 시계열적인 매체인지를 망각했고, 종교적으로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표했기에 문제가 된다. 이것은 신이 존재함을 목격하는 인물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접촉’하는 구조이기에 종교인에게도 신성모독이 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진행 순서가 일종의 우주선처럼 보인다면, 그것을 두고 폭죽을 쏘아 올리는 모습에 빗댈 수도 있을 것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와의 비교도 흥미롭다.) 영화는 순차적으로 우주의 기원까지 흘러가는 듯 보이는데, 그 최종지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세계의 기원이라 불릴 만한 우주의 탄생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폭죽이라는 비유처럼, 그 탐사는 영화의 종결 지점에 얼추 맞추어서 불현듯 꺼지고야 만다. 폭죽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산개시키고 나서 우리가 받아드는 건 접촉의 제거를 통한 순수, 그에 대한 강렬한 파편뿐이다. 


이제 이곳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도 없다. 정말로 무(無)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신의 존재를 두고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믿음은 전혀 없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야 만다. 그런데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영화를 환상(Illusion)에 빗대고는 하나, 다르게 말해 이는 일종의 ‘협약’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것. 우리는 영화가 영화이기를 믿고 싶은 것뿐이다. 우리는 영화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영화에 빠져들기를 스스로 요청한다. 마치 잠들 때처럼 우리의 본능이 영화에 빠져드는 것을 요청하고 있고, 이 요청은 얼마든지 거부될 수 있으나 거부될 때는 숙주를 미치게 한다. 


바라보는 것은 본능이지만 만지는 것은 본능의 소관이 아니다. 그 증거로 오이디푸스는 본능(성욕)을 넘어선 대가로 본능(시각)을 제거했다. 마찬가지로 <트리 오브 라이프>의 실수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 그런 본능=금기를 넘어버렸다는 점이다. 테렌스 멜릭은 영화의 얼굴에 손을 대려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시각효과 (Visual effects)와는 다른 영역이다. 영화가 영화이기를 저버렸을 때,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사망선고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장님이 아니라,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가는 탐험꾼이 될 때 영화는 사망한다. 


신은 얼굴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변성(Metamorphic)하는 존재이다. 켜켜이 쌓이는 시간의 단층은 거대한 압력을 만들어내고, 아래에 있는 것들은 힘과 열기로 인해 변성된다. 다르게 말해 만약 신의 얼굴이 있다면 그는 주름에 가까울 것이다. 마치 아코디언처럼 누를수록 생겨나는 주름에 대하여 우리는, 그와 반대로 가장 무난하고 평평한 상태가 바로 최초의 지점이라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해 우리가 단지 굴곡진 것만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굴곡되지 않은 평면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평선처럼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는 신적 존재에 어울리는 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물질이다. 만져지지 않는다면, 접촉할 수 없다면 존재는 성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트리 오브 라이프>는 빗금처진 영화이다. 


3. 


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발칙함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안노 히데아키의 말처럼 그들이 파괴하려는 게 오타쿠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타쿠들의 세상이 붕괴되어야 한다고 안노는 말했는데, 이는 사실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타쿠가 오타쿠에게 하는 말이라는 뜻이고, 그렇지만 자기 부정에서 우러나는 역겨움보다는 자아로의 접촉에 가까워 보여서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감이 있다. 이른바 얼굴의 주름에 대한 접촉, 주름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사라질수록 얼굴은 순수에 가까워지며, 이 과정에서 주름이라는 자신은 잉여가 된다. 그리고 안노의 파괴 선언은 주름에 파고의 성격을 부여하여 얼굴을 뭉개 버리려는 소멸의 논리를 따라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크 오몽이 『영화 속의 얼굴』에서도 지적했던 클로즈업이라는 기술법(Technique)이 이미지의 주름에 대한 기술법(Description)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는 깊게 들여다볼수록 현미경처럼 세밀한 주름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본 것과 같은 횡축이 아니라 종축으로 접근해볼 것이다. 


횡축으로의 영화는 시작 지점부터 종결 지점까지 시간적으로 점프를 하는 형태의 우주선인데, 이때의 추진력은 내재된 주름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우주선이 소멸의 지점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영화가 항상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해 간명하게 알 수 있고, 다르게 볼 때 이는 영화의 마지막은 늘 애처로울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면, 후자의 결말이 왜 희망적으로 끝났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얼굴에 다가서는 이 영화는, 필시 소멸의 애처로움으로 끝났을 테니 말이다. 즉, 소멸의 경이로움에 대한 큐브릭만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종축으로의 영화는 가로로 새긴 주름들, 마치 커튼처럼 직조된 영화의 표면은 언제든지 열고 닫을 수 있는 형태이다. 횡축으로의 영화가 시간에 접근한다면 종축으로의 영화는 시대에 접근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위에서 말한 변성의 논리를 따라간다. 지질학에서 시대 구분은 변성작용을 겪은 지층을 통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영화에 적용하자면 종축으로의 영화란 연극 무대처럼 1막과 2막, 3막과 4막이라는 지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 탄생하는 것은 소멸하는 것과 맞닿아있고, 어느 것이 우선시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장막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랜시오 무대처럼 영화가 이제 새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증표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해당 장면은 오히려 종말을 말함으로써 건전함을 꾀하는 것이 된다. 목을 졸라 실질적인 죽음을 선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더 찾아야 할 이유를 없애 버린다. 끝이 명확한 죽음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들은 존재의 소멸에 대한 체념,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손에 닿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오타쿠들의 소비 행태, 그저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든 소비하려는 오타쿠들의 스타일에 관한 직언인 셈이다. 


통장에 찍힌 화폐를 소유한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단위에 대한 소비이다. 화폐는 물질이 아니라 수열이며, 이는 물질로 존재하는 화폐보다 단위로 존재하는 화폐가 월등히 많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 위의 사례에 적용해본다면, 물질로 존재하는 것보다 너무 많은 단위가 이 세상에 있으며, 어떤 면에서 이는 진실된 것으로 볼 수 없다. 화폐에 빗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구성하는 것들이 어떤 단위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유의해두길 바란다. 우리는 오타쿠가 설계하는 의미 단위가 아니라 장막 안에서 하나의 얼굴을 두고 여러 페르소나를 향유하는 모습에 소멸을 선고할 뿐이다. 예컨대, 그 얼굴들은 지옥의 연기처럼 빠져나와야 할 것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절규하는, 결코 경이로울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https://youtu.be/TuCx1Horis4

https://youtu.be/0EZ2rP-Ga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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