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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3. 2020

우리들의 날개는 언제부턴가 부서졌다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은 무대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그에게 날개는 없으나, 기계 장치에 매달린 채로 내려와 모든 매듭을 풀어낸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낸 이 단어는 명문화되어 사전으로만 남아있다. 본래 그리스 연극의 클리셰를 비판하는 말이었고, 근래에는 이 클리셰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반대로 보면 우리는 기계장치의 신을 만나본 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전으로 익히 접했기에 정말로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스쳐 지나가듯 소개해준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듯이 말이다.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기계장치의 신을 작품의 진행을 급하게 마무리 짓는 악당쯤으로 생각한다. 이야기의 전개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확실히 악당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아는 이야기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기계 장치의 신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접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맥락을 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깨너머로 듣는 소식은 앞뒤 맥락 없는 하이라이트 부분뿐이다. 물론 보고 들을 거리가 넘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그 모든 것에 신경을 써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Highlight(강조)한다는 것은 요약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요약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부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전문이 아니라 요약문의 형태다. 우리는 요약문을 통해 전체 지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허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이야기에서 머리 아픈 싸움을 하고 싶은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약문을 단편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요약문이 아니라 전문으로 착각할 때가 그렇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요약문의 잘린 앞뒤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마치 메두사의 머리처럼 말이다.


뱀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면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다. 다만 잘린 단면을 보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이를 두고서 우리는 ‘편집점’이라는 표현을 쓴다. 전문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매끄러운 가공을 위해 모난 부분을 최대한 숨기려 한다. 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가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연결성(Continuity)의 조치이다. 이렇게 매끈하게 가공된 작품을 보며 우리는 맥락에 맞는 앞뒤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구절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원본과 전혀 다른 무언가에 도달하게 되고, 요약문이 곧 전문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다. 그래서 편집자의 미덕은 요약문이 최대한 전문에 가깝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파일 크기를 줄이면서 화질은 열화되지 않도록 말이다. 


유튜브에 흔히 올라오는 동영상 클립이 그렇다. 유튜브에는 다양한 동영상 클립이 올라오는데, 영상 전체보다 클립만 볼 때가 더 재미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이라이트’라는 말에 충실한 부류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 자체가 이미 편집된 채인데, 그걸 또 한 번 편집한다는 점이 그렇다. 어떤 면에서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화타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리 재미없는 원본이라도 편집자의 손을 거치면 수액이 흐르는 꿀물로 변모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동영상 클립을 농축액이라 부를 수 있다면, 농축액을 만드는 과정에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영양분. 맛이 없어도 영양분만 좋으면 그만이다. 인삼 액기스와 같은 게 이런 부류이다. 두 번째로 맛. 영양분은 모르겠고 맛이 있어야 손이 가기 마련이다. 매실청이나 유자청과 같은 게 이런 부류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두 가지 클립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정보전달적인 성격이 강해서 재미는 없어도 유익하다. 후자의 경우는 재미를 극대화하지만 보고 나서 남는 것은 없다.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없는 재미와 유익함을 보충하려 들지만 그럼에도 손실된 부분만은 돌릴 수 없다. 잘려나간 것은 다시 붙이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불가능함에 도전하는 이들이 예로부터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이카로스다. 이카로스는 하늘을 날기 위해 날개를 만들었지만 인간에겐 처음부터 날개가 있었다고 믿었다. 신의 심기를 거슬러 무너져 내린 바벨탑처럼 하늘에 거역한 죄로 빼앗긴 게 날개라고 말이다. 고로 이카로스의 도전은 완전한 창조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요약이었다. 그가 만든 날개에는 인간의 오만과 하늘로의 염원 모두가 담겨 있었다. 


이상한 일은 기계장치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연출에는 날개가 없었다는 점이다. 날개를 다는 연출이 거추장스러워서 일수도 있겠지만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기계장치의 신에게 날개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왜 맥락 없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날개는 과거에 대한 요약인데, 그에게는 요약이 없고 결론만이 있는 것이다. 연극이 아무리 심한 갈등을 겪더라도 기계장치의 신은 ‘결론적으로’라는 수사를 말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라는 말은 앞뒤 맥락을 스스로 숨기거나, 혹은 타의에 의해 감춰졌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소위 말하는 개연성의 문제가 기계장치의 신에게 보내는 원망 같은 것이라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보인다면 정말로 이상한 게 맞다고.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런 이상함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계장치의 신이 말하는 결론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우리는 그가 이야기를 절단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결론을 내는 이가 누구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소설이든 만화든 드라마든 영화든 간에 마지막 순간은 항상 다가오게 되어 있다. 이때 사람들은 작품 한 편이 끝났다며 아쉬워하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 것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영역이란 불가시(不可視)의 영역이다. 동시에 연결성의 조치란 불가시편집을 행하는 일이다. 불가시편집에서 최우선 목표는 편집점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편집점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편집자의 일이다. 그런데 편집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작품 하나가 끝이 날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편집점을 맞이하는데, 그건 바로 결말이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어두워진 스크린은 영화와 현실을 구분 짓는 편집점이다. 이야기에 몰입한 누군가는 작중의 인물이 새까만 스크린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겠지만, 그것은 편집에 오류를 겪는 증세(paranoia)일 뿐이다.


때때로 작가는 자신이 하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독자가 본다고 불평하곤 한다. 허나 그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앞뒤가 잘린 것들이 자신과 비슷한 이들에게 기생할 때이다. 편집점에는 그 어떤 이상한 일도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 있다. 예컨대 기계장치의 신은 연극에 몰입한 관객에게 편집증세의 고리를 끊어주는 역할이 아닌가. 작품에 과하게 몰입하는 이는 오르페우스와 같은 결말을 낸다. 갈기갈기 찢긴 육신을 자연스럽게 잇는다는 것은 육체의 아름다운 부위를 조합하는 화타의 행동이다. 그들은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신경질을 낼 뿐인 상황에 맞닥뜨리고야 만다.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가 증세가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밈(Meme)이나 클리셰라는 말로 부르고는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생각만큼 진부하지 않다. 밈과 클리셰는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네트워크를 타고 사람 사이에 퍼져 나가면서 앞뒤 맥락이 잘린 것들에 달라붙어 그들을 숙주 삼는다. 감염이라는 표현이 생체적이라면 알고리즘이라는 기계적 대안어가 있다. 의도치 않은 이야기의 재생산이 바이러스의 형용사 형태인 바이럴(Viral)이라는 용어를 택하듯이 감염과 알고리즘은 그리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감염은 상대의 일부가 되고 생물적으로 재생산되지만, 알고리즘은 상대에게 다가서려 하고 기계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내가 있다면(감염), 이후의 나를 생각해보는 내가 있다(알고리즘). 감염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어떤 형세를 예측할 수 없지만, 알고리즘은 우리가 형세를 시뮬레이션해보고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사실은 감염을 알고리즘으로 예측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전자에 달라붙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허나 이 두 가지는 어느 특정한 지점에서 절단되지 않을 만한 특성이 있다. 감염이 언제 끝날지는 최후의 하나가 죽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최후의 하나를 감염시키고 나서야 감염은 종료된다. 반면 알고리즘은 생체가 아니므로 살아있는 한에서는 여전히 몸을 움직인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말이 생체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테다. 살아있다는 말은 몸을 잘린 와중에도 꿈틀거리며 삶을 향한 의지를 내보이는 게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담보로 묶어 두었던 매듭을 풀고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이 바로 살아있음이다. 앞뒤 맥락 없이 단절된 우리는 과거에 손을 뻗치지만 우리가 접하는 게 꼭 잃어버린 무언가인 것만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뉴트로(New+Retro)라는 것이 낯선 과거를 뜻한다면, 그 이유는 과거가 낡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만나본 바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은 낯섦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를 따른다. 그리고 생존의 미덕이 바로 살아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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