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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6. 2020

저는 소멸의 신이 되겠습니다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던 날, 다른 동료들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영화는 잠시 고민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소멸의 신(Deus Ex Machina)이 되겠습니다.” 그의 이 말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본래 그가 원하는 바는 잃어버린 날개를 돌려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본디 날개라는 게 있었고 언젠가는 돌려받으리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허나 영화가 신이 되려면 자신의 지난날을 내려놓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윽고 내린 결단에서 기계장치의 신은 연극에서처럼 해결사도 아니었고, 노동현장에서처럼 생산을 관장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소멸의 신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영화가 소멸의 신이 된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영화를 기술사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유물론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예컨대 이런 생각이다. 영화를 지탱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기억으로 이루어진 상부구조와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하부구조이다. 기억은 기술을 움직여 영화라는 가상을 만들고, 이 과정에 기술은 기억에 종속되고야 만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가상은 그저 가치의 통용 단위일 뿐, 종속절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를 어떤 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가상을 담보로 한 도박일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가상이 아니라 실물을 일대일로 교환하는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서 일수도 있고, 돌이킨 이후를 생각해보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해 둘 수 있는 사실은 기술이 기억에 반기를 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술(Technique)은 기억을 기술(description)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건 하나의 거대한 기억 덩어리이고, 그를 위해 운반되는 물질 간의 상호작용이 바로 전기 자극이다. 한 마디로 기억이란 전기 자극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물론 이 말이 ‘우리는 가상이므로 정체성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민도 하고(데카르트), 비판도 하며(칸트), 고민하면서 비판도 한다(헤겔). 마찬가지로 영화는 고민하고(크라카우어), 비판도 하며(에이젠슈타인), 고민하면서 비판도 한다(바르트). 그 누구도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를 두고서 이것이 가상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이것은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에 그렇다.  


단언컨대 이 말은 ‘꿈속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는 말로 읽혀야 한다. 이곳이 꿈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이미 꿈을 구현해냈기에 그 이상을 염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화를 보면 영화가 보여주는 어떤 가상으로 끌려간다는 우리의 생각은 영화를 마치 마술 기계 (phantasmagoria)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마술이란 본디 잘 발달된 과학의 산물이며, ‘고도화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아서 클라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영화의 발전이라고 말해왔던 바는, 영화를 기술하는 법의 다채로움을 증명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다. 즉 그동안 영화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변한 것은 그저 그사이의 시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기술-유물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진정 어떤 발전을 이루어내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동안 가상을 지칭하는 이름은 많았고 수도 없는 발전 과정을 거쳤지만, 이것이 단지 화폐 가치의 절하와 변동 그리고 환전의 과정에 그쳐버리는 게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다만 이 말이 화폐 경제를 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읽히는 것도 곤란하다. 가상이란 우리 사이에 나누어지기 위해 이 방식을 취했을 뿐, 그것이 진정으로 어떤 가치와 합일된 체계임을 말해주지는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으리라. 우리는 가상을 현실의 어떤 것과 일대일로 대응시킨다고. 한 편의 영화에서 다양한 사고를 발굴해내는 행위는 영화로부터 가치를 가져오기 위해 지불하는 일종의 물물교환 행위라는 소리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체험이라기보다 탐사에 가까운 행위이다. 오래전 근대에 서양과 동양이 물물교환을 통한 무역을 했듯이,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건 무역에 사용되었던 장부를 정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기술하는 방법의 다채로움이란 주판, 함수, 타자기, 계산기와 같은 도구와 얽혀있다. 눈치 빠른 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사실은, 이런 도구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얽히는 방식이다. 첫 번째로 탐사(Explore)란 폭발(Explode)이다. 촬영(Shoot)되기 위해 화약을 통한 폭발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무릇 어딘가를 찾아가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카메라맨의 노고가 화면 안에서 보여져야만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촬영이 시작된다는 건 그 이전부터 이미 그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타자기를 통해 글자를 주조하는 과정이 자판 위에 올려둔 손가락의 운동 에너지로부터 시작하듯 말이다. 


다른 측면으로도 이야기해보자.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생각이 출발해왔음을 깨닫는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지금 생각한다. 마치 우주 한복판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밀려옴에 따른 가속력이 시간의 진행만큼 유지된다. 만약 눈에 부딪히는 무언가가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될 테고, 그런 이유로 최초의 폭발인 빅뱅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물론 과학(Technique)은 우주가 팽창하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이 가속도를 이겨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description)은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떤 말을 할까? 


오늘날 과학은 기억을 철학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다. 과학자가 들으면 놀라서 팔짝 뛸 소리지만, 과학적 개념이 철학을 위해 사용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것과는 좀 다르다. 뉴턴이 없었다면 데카르트는 없었다는 사실, 끌어당기는 힘을 통해 당겨지는 이의 모습을 확정 지었던 사건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항상 기술을 발전시킨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마법으로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신체에 대해 얼추 알고 있으면서도 늘 마법 같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신체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감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모성애, 부성애, 연민과 동정,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바르게 기술할 수 없다. 단지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이 기술과 마법에 대한 격언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신체를 잘 다룰 수 있게 될수록 그것은 마법에 가까워진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마법 같은 철학이 등장한다.  


이 생각은 철학이 마법 같다는 게 아니라, 마법이란 결국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영화의 환(등)상적인 면모를 가져오는데, 환등기(phantasmagoria)가 자아낸 영화라는 가상은 기술이 어떻게 마법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극명한 비유일뿐더러, 기술의 시대에 영화가 더는 환상처럼 느껴지지 않게 된 이유라는 의문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기술의 발전이 영화의 환상적인 면모를 강화한다면, 지금의 영화는 100여 년 전 보다 훨씬 큰 입지를 가져야만 했던 게 아니던가? 그러나 실상 지금의 우리는 영화의 절멸을 우려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것이 종말론자들이 으레 하는 걱정이라 하여도 영화가 너무 환상적이기에 영화가 멸종한다는 말은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환등기가 왜 돌아갔으며, 그것을 빠르게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물을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영화는 왜 24프레임을 유지했는가? 단지 영사기가 그러했을 뿐이다.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르면 필름은 타버렸다. 필름을 보더라도, 최초에는 필름 롤 하나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의 길이가 제한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기술사는 시간의 용량 확장에서 시간의 속도 조절로 나아갔다. 이윽고 영화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듦으로써 현실과 스크린을 매개하던 필름이라는 매질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영화를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아마도 영화에 담겨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가속력이다. 


처음에 환(등)상을 돌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가속력은 자신이 밀어야 할 대상을 매질에서 매체로 바꾸었다. 영화는 자신을 송출하는 규격, 혹은 외형을 향해 가속함으로써 무언가를 발견하고 또 예견한다. 소위 말하는 외화면이란 외계로의 여행이며 그곳으로의 탐사는 기술사의 운동에 시간의 가속력을 더한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발견하게 될 행성 거주지를 찾아 우주를 떠돌고 있으며, 적당한 장소를 찾아 정착해 행성을 감염시키는 방식으로 자기들의 지난 과거를 연료 삼는다. 


영화가 소멸의 신이 되려는 것은, 우주선의 추진체에서 용광로를 찾아내어 그곳에서 과거를 태운 가속력을 얻기 위해서다. 단언컨대 이 문장을 둘 중 어느 것으로 읽어도 좋다. 가속력은 과거를 안에 태운 채일 수도 있고, 과거를 태워서 가속력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 과거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최후방이 아니라 우리가 외계에 접촉하는 방식으로 보아야 할 테다. 우리가 눈을 감는 순간 이전의 시야는 과거로 남겨지고 눈을 뜨면 소멸되어 버린다. 영화를 보여주는 화면의 깜빡임(flickering)이 기술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는 늘 소멸을 향해가는 셈일 테고 이는 영화가 왜 소멸의 신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접촉면적이 미세화될수록 표면장력은 커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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