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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8. 2020

우연들이 운명을 대체한다

1.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영화이론 : 물리적 현실의 구원』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연들이 운명을 대체한다”.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설명하며 사용된 이 표현은, 영화에서 개연성이란 서사 전체가 아닌 사건의 운명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관객은 영화 전체를 장악할 능력이 없으며, 그러므로 영화에서 개연성이란 별개의 사건으로부터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크라카우어에게 관객의 역할은 자신의 감각을 영화 안으로 투입하는 것이었기에 그렇다. 그에 따르자면 영화의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상을 옮겨온 게 아니라, 관객이 체감하는 현실의 인상들이다. 그러니 관객이 영화에 감각 보내기를 중단하는 순간 영화는 피가 통하지 않는 수지처럼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다. 즉 영화는 감각의 말단이자 인식의 최전선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은 눈을 감고 현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맹인의 손끝에 달렸다. 그는 얼굴의 표면에서 인간의 운명을 읽어내는 골상학자이다. 관상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기본적으로 영화란 눈을 감은 상태라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영화를 보며 시각에 의존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는 말만큼이나 불분명하다. 우리가 영화를 본 그대로 묘사할 때, 그것은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몽타주만큼이나 실물과는 괴리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두되는 건 손을 뻗어 풍경을 매만지는 수집가의 면모이고, 영화를 ‘찍는(Shoot)’ 것만큼이나 현실의 표면에 실리콘을 부어 얼마나 정교한 본(本)을 뜰 수 있는지(Stamp)가 관건이다. 예컨대 영화란 현실의 데스마스크와도 같다. 현실이 양각이라면 영화는 음각일 것이며, 우리의 감각은 데스마스크 안으로 들어가 얼굴의 굴곡을 얼마나 재현해낼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영화란 의식적인 자아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하고 화면 위로 보여지는 물리적인 것들을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느낀다. 이 부분이 바로 여타 다른 매체와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문학이나 연극처럼 서사 위주로 진행되면서 관객의 의식적인 자아를 몰입하게 하는 매체와 달리, 영화는 의식 이전의 무언가를 통해 관객을 꼬드긴다. 예컨대 문학과 연극이 독자를 감염시킨다면, 영화는 관객이 자신을 감염시키도록 유도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전한 유전자가 아니고, 관객에게 흡수됨으로써 현실에서의 삶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스크린 밖에서 생존할 수 없으므로, 관객의 내면에 각인되지 않는다면 그곳을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서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감각으로 분해해 영화 안으로 밀집한다고 말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분해의 대상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에 세워진 스크린은 거울 단계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사소하게 분해되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는 거름망이다. 따라서 영화를 보며 얼마나 잘 이입할 수 있는지는 감각의 분해 정도에 따라 다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세계에 일체화되었던 감각을 가혹하게 몰아붙여야 한다. 근대 이후로 세계의 주체가 된 우리는 영화라는 세상을 만나 주체의 이후를 탐미하게 되었고,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그 미래에 분해 상태로 탑승해야 할 판국이다. 너무 커다란 것들을 감내하기에는 우리의 감각이 너무 예민해진 탓이다. 


2. 


커다란 것들을 감내하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말한다. 그는 존재가 원자 단위로 붕괴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평화는 공통된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도출되게 되었다고 말한다. 보편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다른 점이 많은 ‘우리’에게 혼란과 붕괴를 가속할 뿐이며, 오직 ‘다름’을 강조하는 것만이 불만족스럽지만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이다. “거대 서사의 종말”이라는 문구로 표현된 이 상태는 오늘날 마블의 영화와 같은 커다란 일들이 왜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는지를 말해준다. 거대 서사의 붕괴 이후로 사람들은 영웅이 되는 것보다 영웅을 찾는 일에서 감각을 찾는다.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의 영웅을 묘사하기보다는, 다양한 이들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 어떤 영웅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평화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거대 서사의 붕괴는 영화 안에서 물질적인 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우리는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편집의 측면을 지적하는데 ‘서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불가시 편집이라는 엄폐의 요소가 거대 서사를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거대 서사의 붕괴란 ‘불가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을 찾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자연스러운 편집을 지양하게 되었다는 말과 무관하다. 가시적인 것에 의미를 둔다는 말은 오늘날 영화 관람의 환경 변화와 연계해 생각해볼 문제다. 첫 번째로, 오늘날 영화를 두고서 ‘실감난다’는 표현은 ‘진짜 같다’는 게 아니라 일종의 스펙타클의 영역으로 사용된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영상을 접할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영화는 이전과 같은 특별함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영화는 고유명사화되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목격하는 것들은 모두 영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 당연한 이 사실이 영화를 옭아매고 있다. 오늘날 범람하는 영상 사이에서 영화는 영화라는 종이 아닌 영상이라는 종의 아종으로만 불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는 고유명사화됨으로써 다른 매체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게 되었다. 소위 ‘영화화’라는 말은 잘 만든 드라마나 만화의 독자들이 단골처럼 꺼내 드는 소재이고,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말은 영화의 그러한 스펙타클(Spectacle)적인 면모에서 이미지를 빌려 온다. 이러한 광경(Spectacle)의 범람은 말 그대로 부유하는 감각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과잉 상태로 젖어들게 한다. 여기서 감각의 과잉 상태는 감각의 유류분이 아니라 잉여분을 창출하고, 우리는 그렇게 남아도는 것을 영화로 보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에 감각 보내기를 중단하는 순간 영화는 말라 비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영화화의 실체이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화라는 말은 현실을 감각으로 분해하기 원하는 이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영화화라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므로 오늘날의 현실에 면밀히 적용하기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이 예민해졌고 그러므로 영화는 더욱 예민해져야 한다는 말만큼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는 ‘불만족스럽지만 평화로운’ 다름의 감각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데, 이 과정에서 ‘모두가 동의할 만한’ 영웅의 모습까지 붕괴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려고 등장한 것들이 오히려 일말의 화합지점으로 남아있던 것까지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계속해서 붕괴해가는 중이라면 그 이유는 현실을 감각으로 분해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이는 현실의 붕괴가 아니라 영화화에서 그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붕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나, 영화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테니 말이다. 


3. 


여기서 영화라는 말이 단지 영화라는 매체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다. ‘영화화’라고 표현했지만 영상 매체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남은 임무는 이 부분을 규명하는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감각중추로서의 역할을 띈 영화의 의무를 강조하기로 한다. 먼저 감각의 극대화에 따른 말초신경으로서의 영화 혹은 영상 매체에 관하여 말해보자. 이 부정적인 생각은 역사를 고삐 풀린 열차에 빗대었던 벤야민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오직 몰락(분해)만이 있을 뿐 회복(조합)할 수 없다는 말은 영화가 역사적으로 왜 선전 수단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첫 번째로 영화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감광판이기 이전에 현실로부터 도피할 만한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는 필름이라는 형태를 지닌 물질이었고 그것은 현실과 영화 사이를 잇는 공간적인 면모였다. 


필름이 돌아가는 것에 어떤 특정한 속도 배율이 존재하듯이 현실과 영화 사이에는 물리적 단위로 통용될 만한 축적이 존재했다. 그러니 영화에 귀의한다는 것은, 현실감각을 작게 축소해 안에서는 거대한 것으로 부풀릴 수 있다는 환전과도 같았다. 명민한 이들은 그것이 거짓 돈이라는 걸 알고 유혹을 뿌리쳤지만 몸이 빈곤하고 마음이 결핍된 이들이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영화는 마약과도 같아서, 현실의 작은 감각도 스크린 위에서는 아주 커다랗게 펼쳐졌다. 이렇게 펼쳐진 감각은 연극에 있고 영화에 없던 장막을 만들어내어 투우 경기의 소처럼 우리를 몰입하게 했다. 그러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랜시오 극장처럼 장막이 올라가고 나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보면 영화는 가려졌을 때 정말로 있지만 들어 올리고 나면 정말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마술의 일종이다. 이러한 점이 최대한의 표면적으로 효율을 얻는 말초 감각의 쾌락적 성질, 일회적인 면모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크라카우어는 정신분석을 위시한 이러한 리얼리즘적 판단에 반대하면서, 관객이 현실을 감각으로 분해하는 이유와 영화가 그에 감염되고자 하는 이유를 관객의 능동적인 성향에서 찾는다.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에서는 기술을 통해 가능하게 된 ‘시각적 무의식(the optical unconscious)’이 전면으로 드러나듯이, 관객은 영화 매체를 자신의 현실 감각으로 감염시킴으로써 자신이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시각 영역’의 바깥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 안의 물질적인 면모에 자신을 투입하게 됨으로써 수행된 감각의 확장은, 현실을 연료로 소모하기에 그것이 붕괴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감각을 분해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예컨대 이전 시대의 영화가 거대 서사의 보존을 위해 영화화를 택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감각을 통해 거대 서사를 부풀리려고 시도한다. 


만약 영웅이 거대 서사를 의미한다면 거대 서사가 몰락해 가는 현시대에 영웅이란 없을 테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는 감각을 통해 작은 씨앗에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다. 영화는 자신을 감염시킨 후에 현실의 감각을 투입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말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현대 사회의 메시지와 중첩되기도 한다. 작은 영웅이 있다는 게 아니라 누구나 마련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해 보이기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할 수 없다는 건, 그저 입기만 하면 될 뿐인 슈트를 입지 못해 영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슈트는 맞춤형으로 제작되기에, 그것을 입지 못해 영웅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위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감각은 데스마스크 안으로 들어가 얼굴의 굴곡을 얼마나 재현해낼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핵심은 감각만큼이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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