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ul 11. 2020

로스트 웨이 인 유튜브 알고리즘

영화, 예술인가? 예술품인가?


1. 취향의 사회에서는 알고리즘이 당신을 결정합니다 


블로거의 글 하나를 문득 읽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 내용의 전반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터넷 시대에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도달하는 문화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나비보벳따우’와 ‘던질까말까’와 같은 문화적 현상(Meme)들이 우리의 진정한 취향을 교란시키고 있으며 그런 교란 속에 개인의 취향은 벼랑 끝에 내몰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사용한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를 달리 말해보면 ‘에스컬레이터’쯤이라 할 수 있다. 공항이나 열차역 같은 곳에서, 교차하는 평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무리의 비대성에도 불구하고 ‘스쳐 지나감’만이 발견되니 말이다. (필자는 이를 두고 서동진의 논의를 빌려 와 “무의심에 기반해 타인을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 배타주의”라고 적고 있다.)


이어서 필자는 그러한 내몰림 속에서 개개인은 서로를 진정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100분 토론을 예시로 든다. 100분 토론은 상반된 의견을 지닌 이들이 패널로 나와 의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생방송에서 일어날 파국을 막기 위해 의견의 교합지점을 교묘하게 피해간 채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리 진열장 안에 진열된 상품에 자신을 투영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모든 것을 획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게만 될 뿐인’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는 점과도 같다. 진열장 안의 상품 중에 개인의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되는 것을 늘상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지만, 그것들을 모두 소지할 수 없다는 한계로 인해 우리 손아귀에서 서로가 맞붙는 것과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위에서 말한 에스컬레이터라는 표현이 의도적 외면처럼 보이는 것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알고리즘의 시대에 개인의 취향은 기계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주입된다는 점이 취향의 상품화와 연결되는 것은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개인이 모르고 있던 취향을 무의식에서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엮인 무의식의 그물망에서 주변부로 취향을 ‘감염’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네트워킹’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렇게 감염된 취향은 본래의 것이 아닌 것에도 능히 뻗을 수 있는 수족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무의식의 단서(Clue)를 끄집어내 주는 ‘가제트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통제불능의 원숭이손에 불과하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닿고자 하는 취향에게도 미치지 못한 채로 그 주변부의 것만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리즘의 무대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이유이다. 반대로 말하면 알고리즘의 파도에 올라탄 우리가 그들-취향을 외면하는 건 단순한 피곤함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2. 영화 해석이라는 게임과 그에 사용된 레벨 디자인이 압축하는 것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 쓰인 짧은 메모는 알고리즘의 무대에서 비롯된 취향의 문제를 영화적 논의로 옮겨 둔다. 트렌드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풍경을 지적하면서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베테랑>의 문구를 인용하는 필자는, 앞서 100분 토론을 통해 지적했듯이 ‘서로를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취향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 싫은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는 유리장 안의 상품을 모두 선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닌, 그것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무너져 내리는 주체를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어쩌면 알고리즘의 시대에 개인은 네트워킹의 형태로 주권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자리에 모였을 때 붕괴하지만 오히려 흩어졌을 때야 존재할 수 있는 파편적 자아이다. 같은 맥락으로 개인의 취향을 개인 자아의 형성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파편적 자아란 파편적으로 존재할 때만 호명될 수 있는 네트워크적 취향의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필자는 이를 영화적 취향의 무대로 옮기면서 논제를 되풀이하는데, “영화는 재밌으면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치열한 윤리적 긴장”의 무대를 피하는 이유는 “극도로 말초적인 수준의 쾌감”에만 머무르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는 영화를 문화 상품으로만 여기며 미학적 성찰을 해보지 않는 대중일반에 대한 비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네트워크적 취향의 형태로 변질될 때 그것은 문화향유에 대한 주권에 대한 문제가 된다. 단골처럼 되풀이되는 이동진을 비롯한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알고리즘 혹은 나레이터적 취향 제안을 통해 영화에 대한 해석의 주권을 빼앗긴 대중에게 영화는 감각기관의 말초부위에만 도달하는 수준의 쾌락을 준다. 반대로 보면 그들에게는 항상 영화의 주 무대가 아닌 바깥 지역의 외곽에만 머무르는 수준의 단서(Clue)들만이 도달한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단서조차 중앙에서 시작된 감염으로 인해 무차별적으로 도달하는 파편의 일부에 불과하다. 알고리즘 혹은 나레이터가 제공하는 단서는 어떤 의미에서 문화 해석의 권력처럼 보이나, 실상은 가려운 곳을 명쾌히 긁어주는 가제트팔-효자손이 아닌 원숭이 손에 불과하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대중은 유리장 안에 진열된 단서들을 따라가면서 자신이 ‘쇼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배후의 자본들이 제시하는 영화 해석이라는 ‘상품’에 나방처럼 이끌리는 것에 불과하다. 다르게 말해서 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에스컬레이터라는 장치가 실상은 정지된 개인을 특정한 목적지로 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해주며, 그조차도 최소한의 미동을 하지 않는다면 일방향으로 제시된 운동 에너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3. 영화의 전시는 보존처리인가 아니면 현혹의 장치인가 


알고리즘이 개인의 취향을 상품화한다는 비판은 이 대목에서 성립하는데, 상품화라는 표현이 보편화라는 말과 일맥상통함이 연역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라는 것은 물건을 판매하기 쉽게, 대중이 알아보기 쉽게 규격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의미에서 이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미학-취향의 형태를 먹기 좋은 ‘한입 치즈’로 제공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공항과 같은 곳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면 드넓은 크기로 인해 길을 잃기 쉬울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즉 알고리즘의 유익한 점이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독자를 인도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논하는 것들이 그런 장점의 본말전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박물관 같은 곳에서 방문자에게 따라붙는 도슨트를 두고서 취향의 획일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허나 도슨트가 활동하는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공간적으로 일종의 지리성을 띈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박물관은 방문자에게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토리텔링 요인을 적용하기 마련이다. 연대에 따라서 배치할 수도 있고, 국가별로 진열품을 달리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식의 흐름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박물관은 말 그대로 전시에 불과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재미가 없다면 방문객은 방문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장소가 어떤 존재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대두된다. 혹자는 보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박물관을 운용하는 비용과 같은 현실 문제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도 결국에는 상품의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고,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는 담론적으로 그만한 폐쇄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박물관에 빗대기에도, 쇼핑거리에 빗대기에도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영화는 박스오피스의 순번으로 소비자에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진열장 안에 갇혀 있지만, 모든 대중이 쇼핑을 할 때 미학적 구성과 판단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무정형의 영화 대중이 길거리에서 대중을 향해 찌라시를 뿌리는 이들에게 현혹된다고도 강하게 비판하지만, 영화에 대해 어떤 윤리적 판단을 투입하는 이들에게도 결국에는 주입받은 윤리 ‘교육’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한 가지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이는 영화에 어떤 윤리적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가 선행되어야 할 물음이겠지만, 개인의 영화적 취향을 확립하지 못한 이들이 제공받는 윤리적 기준이 자기만의 확고함에 의거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즉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윤리를 제안받는다. 


4. 영화 대중의 무덤인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의 무법 지대


우리가 영화에 적용하는 윤리적 기준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준이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든, 아니면 자신이 속했고 또 속하기를 원하는 집단이 부여하는 가치 기준이든 간에,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들여다볼 때 선행되어야만 할 작업은 ‘일반 대중’과 ‘영화 대중’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대중문화에 소속되었다는 점에서 영화 대중은 일반 대중의 일부이기도 하나, 그 반대로 일반 대중이 영화 대중으로 소속될 수는 없다. 영화라는 매체가 예술이자 상품이기도 하다는 점이 영화 대중을 상품의 향유자이자 예술의 향유자 역할을 겸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 대중은 영화 안에서 상품과 예술 그 어느 갈래로도 적극적인 향유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이것이 본문이 대중을 두 갈래로 나누는 기준이다.)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마땅히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이러한 모호함 속에 무정형의 일반 대중에게는 베일에 싸인 무법 지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반 대중이 영화 대중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되는 건 그런 무법 지대에 대한 두려움 탓이기도 하다. 


일반 대중을 무법 지대 안에서 인도하는 게 앞서 말한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은 안갯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상품 판매의 논리가 아닌 윤리적 문제와 연결될 때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으로 변모해버린다. 문제는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품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 속에 예술은 상품이 되고 상품은 예술이 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영화라는 미학이 상품으로 포장되는 것과 영화라는 상품이 미학으로 포장되는 양 갈래의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전자는 CGV의 아트하우스 배급 문제와 같은 예술적 취향의 독점화로 연결되고, 후자는 영화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미학적 의의를 부여하려는 몇몇 자본의 문화적, 윤리적 시도이다. 


전자라면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만 하다고 할 수 있다. 미학을 상품으로 포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렵고 딱딱한 미학적 요인을 먹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여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상품화라는 점으로 본원적인 공격을 가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미학적 관념을 전시한 영화라는 박물관’이 과연 어떤 형태로 사물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사물을 보존하는 게 제1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그는 관객 없이도 독자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잊혀지는 순간이 곧 죽는 것과도 같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사물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맥락에서 유리-전시장 안에 갇힌 영화는 기억과 추모의 문제를 그 자리에 소환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더라도 영화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며, 처음부터 대중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최후의 시인과도 같은 움직임을 요청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는 전시된 예술품으로써 ‘지금-이곳’에서 목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호박 안에 갇힌 한 마리의 모기처럼 훗날의 인류에게로 닿아 미학적 DNA를 남길 수 있으리라는 모종의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는 알다시피 전통적인 시네필들의 사고이다.) 


5. 영화관람은 윤리적 쇼핑이고 그런 쇼핑은 감정적 이입을 요구한다


어쩌면 전자를 두고서 ‘종족보존의 욕구로 칭할 수 있겠다’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열매를 달콤하게 만들어 동물들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씨를 전파하는 과실들이 그렇다.), 반대로 생각하면 후자의 사례에서는 박물관의 영화가 아닌 관람자 개인의 생각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단순히 작품을 보고 나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준의 도덕적 판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유리장 안에서 특정한 윤리적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관객에게 모종의 ‘쇼핑 아이템’이 되는 영화의 현주소를 고려해보도록 하자.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윤리적 소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건(위안부 문제를 추모하며 해당 로고가 새겨진 휴대폰 케이스를 소셜 펀딩한다던가 하는), 윤리를 상품화한다는 시도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이 꼭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들에 관련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대중이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알고리즘의 시대가 만들어낸 풍경은 대중을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라는 인물상만이 아닌, 판단은 외부에 위탁한 채로 말초신경에 온 감각을 집중하는 감성적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특정한 윤리적 관념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몇몇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소비’하는 관객들의 모습에서는 그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의견’을 낼 수는 있는 ‘윤리적 쇼핑’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이성과 감성의 분업화 혹은 전문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윤리적 관념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영화 상품이 있다면, 그것을 보며 오로지 감정적 이입과 공감만을 원하는 영화 관객이 있다. 여기서 “판단은 당신이 하되 감각은 자신이 느끼고 싶다”는 게 ‘외주’라는 단어로 표현될 만한 수준의 논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여기서 미리 말해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서 영화를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런 이유로 가짜 인도자들에게 이끌리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우려일 테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지금-이곳(유튜브 알고리즘의 시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후자의 사례로 등장한 감성적 인간상은 이성적 인간에게 쉽사리 휘둘리기도 하지만, 영화가 단순한 이성의 산물로만 취급되지 않게 된 현대 사회에서 꼭 필요한 모습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에 대해서는 씨네 21이 지난 3월 23일에 선정한 두 개의 글을 예시로 들고 싶다. ‘미투 시대 영화 계보학’이라는 선언 아래에 “로만 폴란스키 영화 소비가 비윤리적이라 말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에 두 명의 평론가 듀나와 박우성이 소환되었다. 두 개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로만 폴란스키라는 한 명의 아동성범죄자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두 글은 로만 폴란스키가 <장교와 스파이>로 세자르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것에 대한 담론을 발화하는데, 듀나의 입장이 ‘그럼에도’ 예술가와 예술가의 작품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박우성은 ‘그럼에도’라는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나는 우리가 그의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다. 


본문에서 두 개의 글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반론을 기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건 우리가 로만 폴란스키라는 사람에 대해 본격적인 윤리적 평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여태까지 우리는 영화사에서 암묵적으로 윤리적 측면을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해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어디까지 폭력적, 도덕적 일탈을 품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영화 역사만이 아닌 예술의 역사 전체에서 탐색되어 왔으나, 불완전하게나마 도출된 결론이 예술’품’ 바깥에서는 비교적 시도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 논란의 중핵이다. 


6. 미학적인 작품은 윤리적일 것, 그렇다면 영화제는 일종의 성역인가?


또한 이 대목에서 지적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영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해야만 할 영화제가 영화를 상품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본말전도처럼 보이는 이 문장이 ‘미학적으로’ 잘 만든 영화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잘 팔릴 만한 영화에 상을 준다는 ‘의심’을 직격하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름다움에 등급이 있다는 것도 다소 이상하게 들리지만, 얼추 비슷한 수준의 영화라면 상대적으로 ‘많은 개봉관을 확보할 수 있을 만한’ 작품에 상을 주는 게 이상한 관례로 정립되었다. 영화제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서 ‘대중성’이라는 말로 둘러대고는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건, 영화제가 단순히 미적 우열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라 ‘필름 마켓’ 또한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는 점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기는 했지만, <기생충>의 흑백 리마스터 판본의 포스터를 바라보면 그러한 점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기생충>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세계 여러 영화제 수상이라는 영애로 나타나 포스터의 전면과 영화 시작의 초장에 ‘A급 한우’와 같은 인장처럼 찍힌다. 이 인증마크는 시네필들에게 ‘아무런 생각 없이 선택해도 무난하게 볼 만한’ 선택지의 안전지대를 제공하며, 영화사 측에서도 수상 사실을 영화 홍보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같은 맥락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영화제 수상 사실을 알리는 문구가 영화 초장에 나타나면 ‘재미없는’ 영화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는 반대급부의 일반 관객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기생충>이 성과가 특기할 만한 건,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최상위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오스카와 칸의 동시 수상이라는 객관적 지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각국의 흥행 지표 또한 그를 보충한다.) 말하자면 <기생충>은 ‘영화제 수상작은 재미없다’는 말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예외적 사례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기생충>의 성과가 미학적 성과가 아닌 상업적 성과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학적 풍취가 짙은 작품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편견을 ‘미학적인 작품은 윤리적일 것’이라는 말로 바꾸어 쓴다면 그렇다. 바로 이 점이 영화제라는 단어로 응집되는 것이다. 즉 미학적 작품은 윤리적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미학적 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윤리적 성취로 연결되어 단절할 수 없는 예술적 고리를 만들어낸다. 


7. 영화제라는 쇼윈도, 박스오피스라는 쇼윈도, 윤리적 판단과 상품적 호소의 경합


다시 시선을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쇼윈도를 바라보는 대중들에게로 옮겨보자. 대중들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박스오피스라는 ‘박스-쇼윈도’에 갇혀 순차적으로 전시된 멀티플렉스의 알고리즘 시스템이다. 이 알고리즘 시스템은 마치 에스컬레이터처럼 작용해 우리에게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준다. 이것을 아직은 온라인에만 불과한 것이라고, 그렇기에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영화제와는 비교적 거리를 벌려놓은 상태라고 안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지표는 그런 알고리즘에 편입되어 특정 배우의 팬, 특정 감독의 팬과 같은 개별적 지표 밖의 관객을 통솔하거나 심지어는 그들까지도 한데 불러모으기까지 한다. 예컨대 이 단락에서 배우와 감독을 개인 프렌차이즈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할 수 있다면, 영화제의 미명은 배우와 감독에게 미학적 성취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의 유인책을 하나 더 덧붙여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영화는 예술(藝術)인가 아니면 예술품(藝術品)인가. 예술품이라는 단어는 예술을 물건으로 만들어 가시적인 상태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술품의 범주에는 ‘상품으로서의 예술’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것은 관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부터 인간과 같은 존재조차도 자본의 형태로 물화할 수 있기에 ‘그 모든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예술’이라는 단어에는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영화로 치면 이런 식이다. 영화는 분명하게도 수명에서 수백 명의 스태프가 한데 모여 만드는 집단적 예술 행위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를 본편 자체만이거나 혹은 감독의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촬영감독이나 스코어링 음악가쯤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이라는 단어는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미학이라는 이름의 파편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한다는 미명으로 출시되는 영화 알고리즘 서비스와 나레이션 콘텐츠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이 영화를 상품화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술인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영화의 본질이 예술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는 불멸의 예술로 남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예술품과 예술이라는 단어를 무자비하게 혼용하는 상황은 양쪽 진영(일반 대중과 영화 대중) 모두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8. 예술의 윤리와 상품의 나레이션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탈정치화의 과정에 관하여


예술품이라는 단어가 유통되는 맥락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전시되는 실질적 공간 안에서이고, 예술이라는 단어가 유통되는 맥락은 우리가 주로 디제시스(Diegesis)라고 부르는 프레임이라는 이름의 세계와 관념 안에서이다. 소위 말하는 ‘예술적’이라는 말은 시인이 견지하는 삶의 태도처럼 그의 시야(Insight) 안에 적용되기 마련이지만, 이 말은 어딘지 모르게 그런 시야 안에 작가의 작품을 들여놓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작가의 세계관을 담은 게 작품이고, 그렇기에 작가의 내부를 묘사하는 것으로서 작품을 거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책임을 주장할 때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을 동시에 하곤 한다. 


이 편리한 변명은 작가가 구축한 세계 안의 사물로서 예술을 바라보기에 성립한다. 작가주의라는 미명 아래에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일렬 혹은 테마별로 나열하는 이들의 모습은 박물관에 지리성을 부여하는 나레이터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제하고 본다면 테마파크와 같은 유희적 공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마파크에서 테마라는 게 장르로서의 영화를 뜻한다면 그렇다. (실제로 소형 디바이스를 필두로 한 작은 유희공간(Spielraum)이 형성되었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실없는 농담에 불과하다만, 영화사적 움직임이 상품에 대한 알고리즘적 소개로 변질되는 것에는 ‘나레이션으로서의 작가주의’라는 것이 방패로 자리함은 분명한 사실로서 우리에게 남겨진다. 


작가를 설명하기 위한 작가주의는 작가를 예술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하려던 초창기의 시도로부터 변질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대에 작가주의란 <기생충>의 수상 이후로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봉준호 감독의 작가 세계’와 같은 말처럼 감독의 전편을 관람하도록 유도하는 식의 홍보 문구로 바뀐 지 오래다. 그리고 이렇게 상품화된 영화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나레이션으로서의 작가주의를 주창하며, 그런 작가주의 안에서 김기덕과 로만 폴란스키와 같은 이들의 작품은 예술’품’을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 교두보로 활용된다. 또한 대중들은 그렇게 제시되는 나레이션-에스컬레이터 위에 탑승해 아무런 성찰 없이 ‘예술’이 아닌 ‘예술품’을 소비하며, 그런 상황에서 예술사는 자신의 내적 무대를 완성하지 못한 채 관광지에 찾아온 무분별한 외부인의 유입으로 무너지고야 만다. 


9. 글을 마치며


결론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나레이터가 짜놓은 관광상품-작가주의를 따라가는 수동적 관객이 아닌, 작품 본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기만의 미적 지도를 완성해가는 관객의 참여적 태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내쳐진 예술품들에 따라붙는 윤리적,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탐독해야만 한다. 어쩌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태도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존중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은 ‘나는 이런 취향이 있어’라면서 물적 사회로 버려지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것(Spielraum)만은 북두칠성 안의 북극성처럼 홀로 남아서 우리의 항해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대변되는 인터넷 문화의 홍수 안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은 그런 용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들이 운명을 대체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