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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0. 2020

감염의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

 

1. 


감염의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코로나19의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 방문한다는 것? 혹은, 코로나 19의 감염 위험이 있기에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는 것? 방법이 어떻든 간에 영화를 본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좀 전에 던진 물음에서 ‘영화를 본다’는 문장을 빼도 된다는 뜻이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우리는 영화를 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두말할 것도 없는 21세기 초반이다. 약간의 설명을 곁들인다면 ‘디지털’이라는 주제를 논해볼 수 있다. 이 주제는 영화사가 기술의 발전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기술사의 영역으로 관찰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시대에 영화와 맞물린 디지털이라는 화두는 시네마스코프, 서라운드 오디오, VHS와 같은 매질의 문제로 보아도 좋다. 이는 영화를 ‘어떻게’ 찍는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영화는 어떻게 ‘관찰’되는지의 물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히토 슈타이얼은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라는 글에서 인류의 문명이 수평선을 넘어 수직선으로 진행되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은 인공위성의 길거리 관찰 (Road-View) 서비스이다. 인공위성은 지구 상 어디든지 간에 위에서 아래로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이는 수직 원근법으로 지칭되던 인간의 시선을 넘어선 무언가이며, 이 사소한 변화에서 우리는 ‘인간 주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이 버드-아이-뷰(Bird’s Eye View)라는 초월적인 무언가라 하더라도, 그게 우리를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우리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이유를 두고서, 자연을 창조한 신적 주체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위에서 아래로의 전환은 우리는 그저 ‘만들어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해줄 뿐이다. 


인간 주체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려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의 모습은, 현대의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았을 때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영화는 세계로부터 주권을 찬탈했고 그 결과 하나의 예술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다. 마치 인간이 ‘주체’라는 선언을 할 무렵의 이야기처럼 영화는 독립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책임감도 그만큼 늘어난 게 사실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질 때까지 걸렸던 50년과, 물음이 던져지고 난 이후의 50년 동안 영화는 정말로 많이 발전했다. 이는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예견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슬아슬한 규모의 폭탄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2. 


영화와 섹스와 콘서트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의외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아야 하고,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포근한 침실에서 해야 하며, 콘서트는 음원이 주지 못하는 현장감에 그 가치가 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련한 보수주의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영화를 영화관에서만 보아야 하지?” 혹은 “왜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해야 하지?”라는 물음이다. 이때 영화와 섹스가 정신분석학의 면으로 연결된다면, 콘서트는 디지털의 면으로 위의 것들과 연결된다. 


다시금 히토 슈타이얼의 논의로 넘어와서 인공위성을 말해보도록 하자.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라는 글에서 인터넷을 떠돌며 축소되고 분쇄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모습을 두고 ‘Poor Imag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디지털 이미지는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되는 과정에서 화질의 열화를 겪는데, 이때 빠져나가는 부분적인 손실은 그것을 결여되고, 빈곤하고, 처량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원본과 진본 구분의 또 다른 방식이다. 


벤야민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원본의 아우라를 말했을 때, 그는 복제된 것이라 하여 원본보다 못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미지를 동정했다. 그러나 만약 복제되는 과정에서 원본을 구성하는 어떤 분자 단위의 손실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이미지의 최후를 걱정해야만 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 인터넷을 떠도는 불법 복제 파일, MP3와 MP4 포맷이 네트워크 안에서 여러 이유로 다운 스케일링 되는 과정은 그것이 정녕 원본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결론이 나오는 두 번째, 조금 열화 되었다고 해서 원본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에 원본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전 시대와 같은 미술관 벽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다. 


인공위성을 통해 길거리를 관찰하는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본 이국의 풍경은 사진적 이미지가 아니라 단순한 디지털 이미지 파일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이에 앙드레 바쟁은 「완전 영화의 신화」라는 글에서 우리에게 라플라스의 악마로 잘 알려진 개념 하나를 언급한다. 만약 현실을 완전히 담을 수 있는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 될 영화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현실을 완전히 재현하게 되었다는 말은, ‘영화가 현실을 예측 및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3.


리얼리즘 감독들이 아주 완벽한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현실을 조작하는 힘이 필요했다. 완벽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완전한 조작을 가해야 한다는 모순이 생겨나버린다. 시간이 흘러 ‘진짜’에 대한 갈망은 디지털 시대에 CG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완전 영화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거쳐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이라는 게임이 된다. 관객은 영화 안으로 들어가 영화를 체험할 수 있고, 이 생생함은 감독과 연출팀이 의도한 것 그대로의 질감을 지닌다. 그러니 말하자면, 우리는 완전 영화가 디지털 시대에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이미지는 화질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에 따르면 완전함은 보증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로 영화가 게임의 자유분방을 닮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꼭 <GTA>나 <젤다>와 같은 오픈 월드 게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세계로서 더 잘 작용하는 것은 영화가 아닌 게임이다. 영화를 또 다른 세계로 보았던 영화 이론가들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 찬탈된 인간 주권에 따라가지 못했고 여기서 영화는 리얼리즘이라는 지표를 잃고야 만다. 예컨대 세계를 열화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분열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라는 외부라는 점을 끝내 인정하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인공위성의 시선이 결코 우리의 주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은 모니터에 대한 수평 응시가 아닌 수직 응시에 대응한다. CG 기술이 현재까지는 모두 판판한 평면 위에서 구현된다는 점 또한 수직 응시의 신화를 가속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던 낭만이 훔쳐 보거나 엿보이는 것에서 흥분을 얻던 영화의 정신분석학으로 진행되었다면, 수직 상의 도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를 세계 안에 떠도는 분자적인 생물로 만든다. 그러니 어쩌면 디지털 영화란 분자 생물학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도 있다.

 

분자 세계를 바라보는 도구는 현미경이다. 현미경은 팔레트 위를 수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버드-아이-뷰로의 시선으로, 우리를 미시 세계로 접근하는 신으로 만들어준다. 만약 미생물이 우리만큼의 지능이 있다면 그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우리를 신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자 세계에서 분자 단위로 존재하는 것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픽셀로 존재하는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들은 일종의 점조직이며,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복사될 수 있고, 부분적으로 열화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본체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빈곤(Poor)’하다. 


4. 


이 지점에서 영화의 픽셀화에 대해 말해본다면,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의 시작 화면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네모난 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멀리서 보면 유튜브와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로고로 집약된다. 이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최신의 데이터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그것은 자체적으로 분열하거나 혹은 쇠락하기도 한다. 원근법의 근대에서 지평선이 일종의 소실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버드-아이-뷰의 현대에서 판형이란 완전함에 대한 신화로 나타난다. 이때의 신화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완고함, 우리가 물질에 투영하는 완전한 가치에 대한 탐미와 결합해 나타나며, 이것들은 영상 매체가 자본과 결탁하는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라는 상품에 대해 논하기에는 충분한 재료이다. 


쓰리섬이나 스와핑과 같은 규격 외의 성행위를 즐기는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더하는 근거는, 이것이 이해될 수 있는 한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점이었다. 그 말처럼 이것은 서로 간에 동의가 있다면 딱히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렇지만 건전하지는 않은) 행동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섹스가 사랑의 바깥을 벗어났을 때 가치의 탈을 뒤집어쓰고 우리 곁을 통과해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섹스는 자본이 아니지만, 가치로 통용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란 본디 어떤 가치의 투영이지만, 규격을 벗어나 우리 곁을 통과하는 시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어떤 규격 안에 갇혀있는지, 혹은 어느 형태소를 갖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영화를 지평선의 일부라기보다 현미경 혹은 인공위성으로 바라보는 모노-아이의 규격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영화를 보는 재미란, 실험실의 접시에 영화를 배양하고, 그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영화는 너무도 쉽게 증식하는 일종의 분자생물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증식하고, 그렇기에 영화를 추천해줄 만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진다. 쉽게 말해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실험실이라는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해오기까지 할 무시무시한 놈들이 되었다.


인터넷 환경에서, 영화와 바이러스의 공통점은 표면을 빠르게 점령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세포에 자신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자가복제를 수행하듯이, 영화도 현실 안에서만 자신을 복제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의 표면에 번식하는 영화가 현실의 문제와 결합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디지털 영화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상영된다는 것은 영화가 현실과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화가 생물로서 다가오는 순간은 우리가 영화를 보며 현실을 생각할 때, 혹은 현실에서 영화의 면모를 찾아낼 때이다. 공통분모가 없다면 영화는 현실에 와 닿지 못하고 마스크의 표면상에서 정리된다. 


5.


감염의 시대에 영화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두 개의 입장이 있을 듯하다. 하나는 감염에 대한 생물학적인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네트워크 안에서의 생물학적 보고이다. 이때 영화의 생물학적인 관점에는 유리 로트만의 논의를 참조할 만하다. 일찍이 유리 로트만은 기호계(Semiosphere)라는 개념을 주장했는데, 그에 따르면 기호는 특정한 생태계를 꾸리며, 폐쇄된 공간에서의 자기 복제와 변증법적인 발전을 수행한다. 베르그송의 물질론에 베르나츠키의 생물계(biosphere) 개념을 합친 이 단어를 주창하면서 로트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기호학적 경험은 기호학적 행위에 선행하는 바, 기호계의 외부에서는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언어도 있을 수 없다.”[『Univere of mind』]


기호계 개념을 영화의 생물학적 보고에 적용할 때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단락은, 디지털 이미지가 마치 기호처럼 끝없이 복제되고 번성한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시선과는 달리, 그곳에는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과업은 언젠가는 수행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인공위성으로 바라보는 전 지구적인 이미지의 확산에서 우리는 수평선의 제거가 아니라 지구라는 세계에 갇힌 우리를 본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화는 지구 안에서의 경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구를 벗어날 수 없는 전지구적 이미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네트워크에 펼쳐진 지대가 지평선의 드넓음에 상응한다면, 우리는 이 근대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네트워크 전체를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근친교배에 따른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 로트만은 이 문제에 대해 ‘나-나(I-I)’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현재의 자신이 남긴 메모를 미래의 어느 순간에 받아드는 행위는, 자신이 수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새로운 행위가 된다고 말한다. 메모라는 행위를 통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이후의 기억과 결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트만의 이러한 논의는, 네트워크 위를 둥둥 떠다니는 영화라는 판형이 우리의 생각만큼 광범위하지 않고, 근친교배를 통한 불량이 생길 위험도 없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개선을 거듭함으로써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의 완벽이 아니라 변증법적 순환논리에 따르는 완전이 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영화에서의 감염이란, 지속적인 열화를 통해 빈곤한 육체를 만들고, 서로의 틈새에 침입함으로써 자신과 상대의 유전적 형질을 교환하는 행위이다. 이 작동을 위해 그들은 공개된 공간이 아닌 밀집된 공간에 몰려들 필요가 있다. 예컨대 코로나 19의 현실에서 우리는 상대와의 1미터 거리를 두지만, 디지털 시대의 네트워크 안에서 영화는 서로를 향해 전력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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