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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8. 2020

점입가경? 점-입-감염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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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영화의 제작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로, 넷플릭스는 여타 투자자들과는 달리 돈을 아끼지 않으며 마감기한을 두고 실랑이하지도 않고, 작품을 배급할 방식을 두고서 압박을 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확실히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제작자로서는 무척 편리한 환경이다.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고, 그렇게 만든 결과물이 헛되이 소모되지도 않는다. 이는 예술가가 ‘예술’을 하기 위한 일종의 후원적인 성격을 약간이나마 띄고 있기에 단순히 상업적인 논리로만 이해되기는 힘든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예술가에 면죄부를 주고 넷플릭스가 전면으로 방어태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급하는 사람이자, 투자하는 사람인 넷플릭스가 예술가를 선택하는 방식은 일종의 선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메디치 가문처럼)



넷플릭스가 작품 판권을 확보하는 절차가 이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그러니 위의 문장을 일반화해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넷플릭스를 신흥 귀족쯤으로 여기는 일은 영화를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주거의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서울 집값이 비싸 수도권으로 자리를 옮기는 현상에서 서울 시민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반명제로 형성되듯이, 극장 마니아라는 칭호가 ‘특별시-민’이라는 명제로 사용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인프라가 집약된 수도 서울의 모습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관은 이미 수도로서의 효력을 잃었다. 지금 영화관이 던져야 할 질문은 ‘현존’에 관한 영토의 설정이다. 하나의 세상에 두 개의 인격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영화 중에 진짜는 영화관에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우리에겐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이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박물관에서만 진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방문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보존상의 이유로 레플리카를 전시해두고 진품은 수장고에 넣어두는 경우가 꽤 있다. 이때 대다수의 관객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박물관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소로서의 박물관은 골동품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기능을 갖지만, 공간으로의 박물관은 기존에 알고 있거나 모르던 사실을 현실로 구현하는 기능을 갖는다. 예컨대 음원 파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음에도 콘서트 장에 가서 음악을 듣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같은 이유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영화관이라는 게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대한 영토를 설정한다면, 그와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노래하는 곳이 곧 콘서트장이 된다면? 평범하게 옆에서 걸어가던 시민이 배낭 속에서 기타를 꺼내어 노래를 부른다면 주변에 사람이 몰려들 것이다. 어디에나 등장하는 뮤지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영토에 대한 자위적 성격을 본다. 거리로 나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것으로 영화가 되었던 시대는, 카메라이면서 뷰 파인더이기도 한 동시에 세상과 관계하는 방법론인 스마트폰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시대에서, 우리는 너를 보는 동시에 나를 보고, 너를 보는 나 자신을 보기도 한다. ‘개인 방송’이라 불리는 이 형태는, 방송하는 이의 얼굴이 방송 창으로 송출되고, 그 방송 창을 다시금 방송하는 이가 바라본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관은 너를 보는 동시에 나를 보는 장소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안에 비추어지는 자신을 상상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자신을 다시금 본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이 아니다. 오히려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다. 디지털 시대의 불확정성과 유동성은 우리의 얼굴을 붕 떠버린 화장처럼 만든다. 우리는 서둘러 화장을 고치고자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화장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면이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우친다. 그가 술집의 천정에 매달린 티브이 쇼를 보았을 때, 이 얼굴은 올려다보기 위해 제시된 깔창과도 같았으나, 수면에서 끄집어냄으로써 자기 존재의 불안정함을 고정해두는 장치가 된다. 예컨대 우리는 얼굴을 상상하는 것으로 주변부의 영토를 설정한다. 그렇게 본다면 얼굴, 이 가면을 뒤집어쓴다는 건 세계와의 유착된 몸뚱어리를 주변부로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가면에 대한 갖은 생각은 우리가 매체와의 친화력이 높아졌다는 점에 대한 방증이다. 친화력이라는 표현은 영상 안의 세계와 세계 안의 영상 사이에서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점에서 귀인 한다. 앞서 박물관을 보며 이야기했듯이,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는 그렇게 큰 실효성이 없다. 우리가 관심 있어 하는 건 [포켓몬 GO]가 제안하는 현장 방문에 대한 배지 획득이고, 이 배지를 얼마나 치렁치렁 달고 있는지에 따라 개인의 위신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가면이라는 것은 얼굴에 뒤집어쓰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때와 장소에 따른 자신을 제안하는 어떤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를 보고 난 당신은 그 영화의 가면을 획득하게 된다. 이 가면을 뒤집어씀으로써 당신은 영화에 대한 자기 생각을 주장할 수 있다.



어쩌면 영화의 유기체적 성질이 가면을 위한 보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생각이다. 에이젠슈타인이 주장했던 영화의 유기체적인 변모는 그의 생명적인 변증법을 구성하기 위해 고안되었었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이론에서, 쇼트는 교배를 통해 자손을 생산하는 진화론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는 매체와의 친화력이라는 극명한 차이가 자리한다. 에이젠슈타인의 고안은 실험실의 배양 접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매체 홍수의 시대에 이 미생물들은 어디에서나 둥둥 떠다니면서 우리 안으로 감염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과거의 영화가 현실의 가면(영화)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 관객은 영화가 아닌 자신에게서 가면(영화)을 발굴해 낸다. 물론 이것은 영화 해석의 주도권이 관객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보다 능동적인 영화가 되기를 바라며 그들은 서로와 경쟁한다.



누군가는 넷플릭스와 같은 영화의 뭉텅이가 영화 간의 본격적인 경쟁 무대가 될 것이라 말한다. 반면 이 영화 뭉텅이 안에서 관객은 개인의 취향을 보다 확고히 하게 되므로, 오히려 경쟁은 박스 오피스보다 더 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확고해지는 취향이란 자아정체성의 극렬한 요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부유하는 이미지 안에서 우리는 알맹이를 엮을 중핵을 찾아 헤매며, 가상 현실이라는 말의 유동성은 영화보다 관객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다. 어떤 때에 가상 현실의 무궁무진한 오픈 월드는 마치, 자기 스스로 영토를 넓혀가는 영화의 모습처럼 느껴져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때 영화는 어떤 외견으로 우리에게 비춰질까. 아마도 식빵 위의 곰팡이처럼 보일 것이다. 가상 현실(Another world)의 무궁무진함은, 영화가 스크린이라는 정해진 창문 안에서 무한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방법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 말랑말랑한 현실 위에 펼쳐진 생체가 바로 우리의 경쟁 지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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