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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2. 2020

키노 아이에서 그라이 아이로




지가 베르토프는 1922년의 호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키노-아이다. 나는 건설자다. 나는 내가 오늘 창조한 당신을, 역시 방금 전 내가 만들어내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방에 집어넣었다. 이 방 안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촬영한 열두 개의 벽이 있다. 나는 벽 쇼트들과 세부 쇼트들을 함께 모아서 마음에 드는 순서로 구성했고, 간격으로, 정확하게는 그 방인, 필름구로 쇼트를 구성해냈다."


키노-아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 테다. 그런데 위의 문장에서 다소 수상하게 들리는 것은 ‘건설자’라는 단어이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키노-아이가 과연 건설자가 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말에는 주체성을 가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자동기계라고 여기던 카메라에 주체성이 부여될 때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동기계를 조작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분명 카메라는 정직하게 세상을 목격하지만, 카메라를 조작하는 이까지 정직하리란 법은 없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현존을 직시하는 반면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측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자동기계라는 점에서 이 시간의 경로는 손쉽게 예측된다. 궤도가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대략의 방향만큼은 확실시된다는 점에서 인간은 사냥꾼이 된다. 가만히 엎드려 기다리고만 있으면 언젠가 사냥감이 드나들 것이라는 생각이 포획을 위한 기다림을 가능케 한다. (각주 1)


에티엔 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가 시간의 궤적을 포획하는 총기류였다는 것은 오늘날 유명한 사실이다. 동시에, L. 플래허티의 북극 여행이 북극 원주민의 사냥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도 떠올려 볼 법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D.W 그리피스가 촬영했던 것이 서부 개척민의 인디언 사냥 장면이라는 점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베르토프의 카메라다.베르토프의 대표작이기도 한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몇몇 장면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한 사나이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간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다양한 장소로 향하는데, 여기에는 세계의 일부를 카메라로 담으려는 베르토프의 이념이 담겨있다. 그런데 영화의 중간에는 마치 안드로이드 기계처럼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카메라의 모습도 있다. 기술적으로만 본다면 단순한 스톱모션에 불과하지만, 이 카메라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가 ‘드론’이라 부르는 독립 카메라 체계와 닮았다. 이라크나 아프간처럼 위험한 장소에서는 인간을 대신해 24시간 감시를 서는 카메라가 있다고 한다. 이 카메라들은 자동적으로 사물을 추적하고 기록하지만, 사용자가 보기를 원하는 적군의 정보만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사냥꾼은 밀림의 탐험꾼이라기보다 현장의 발목지뢰에 가깝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와 마찬가지의 현상이 CCTV라는 감시 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거리에 나가 세계를 담아내고자 했던 베르토프의 시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아라. 도심에 설치된 CCTV들은 모든 세계를 충실히 기록하고자 노력한다. CCTV 설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지력이나 기록력이 아닌 사각지대를 제거하는 일이다. CCTV가 달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각지대가 좁아지므로, 사람들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모형이라도 달아두곤 한다. 즉, 이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재현이 곧 사각지대의 제거와 맞물린다는 점을 알게 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세계를 더 잘 재현하게 될수록 도망칠 곳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 도심 속을 탐험하는 우리에게 발견의 기쁨이나 수색의 희열 같은 게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딘가에 매달린 카메라를 목격하는 순간은 발목지뢰를 밟는 순간이나 다름없다. 카메라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찍어왔음이 증명되는 것이므로, 어쩌다가 지뢰를 밟은 사람처럼 이 재현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이 자동기계가 제거하는 것은 시간의 사각지대이다. CCTV 하나만으로는 해당 구도에서의 시간만을 기록할 수 있지만, CCTV의 중첩을 통해 세계 전체를 구현한다면 이곳에서 ‘빈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CCTV를 통해 용의자의 동선을 완전히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는 시간이 비가역적으로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CCTV를 통해 도심의 시간을 순차대로 나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도심의 시간 전체가 카메라에 기록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 개별적 기록을 통한 전체 시공간의 구현에서는, 특정한 부분만을 편집하는 게 불가능하다. 개별적으로 진행되기에 그것들을 하나로 만들려면 편집의 과정을 거쳐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인제 우리는 편집조차 필요 없는 결과물을 받아들게 된다. 어느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전체의 시공간을 담아냄으로써, 이 결과물에서는 각각의 카메라가 개별 편집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두고서, 거리를 다니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관점이 되어 세계를 이루고 있다 보아도 좋다.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조합해 범인을 유추하는 일은 번거로운 과거의 일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키노-아이보다 상위의 개념인 그라이아이(Γραῖαι)를 마주하게 된다.


미술작가 정여름이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을 통해 지적한 바 있듯이, 지평선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수직선에서 보이는 일은 우리 시대에 흔한 일이 되었다. 담벼락에 막힌 것들로 인해 수평선의 너머를 관측하기가 어렵지만, 지도 서비스에 접속해 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그 너머가 얼마든지 보인다. 같은 의미로 히토 슈타이얼은 「자유낙하 :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에서 다음처럼 지적한다. 선형 원근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지배적이고도 위계적인 관점인 ‘수직 원근법(vertical perspective)’이 들어선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은 고정된 장소에서 대물렌즈(Objectif)을 통해서만 가능했지만, 수직선을 만들어내는 건 전지구상 어디에서나 인공위성을 통해 가능하다. 동시에 이 인공위성을 통한 이미지는 여러 장소를 촬영한 데이터의 조합을 통해 전지구의 외견을 하나로 통합하며, 이와 같은 데이터의 조합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시간을 하나로 통합하게 된다: 지구의 기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후 데이터 베이스 시스템에서 우리는 실시간으로 전지구의 대류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측할 수 있고, 이과 같은 일들은 산발적으로 벌어지며 서로 다른 시간을 갖던 과거의 이야기를 무색한 것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인공위성은 우주의 지평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대물렌즈이다.


다시 베르토프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베르토프가 다양한 장소에서 카메라를 들이댔던 이유는, 단순히 여러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현장 촬영분을 하나로 편집해 완벽한 건설물을 만들어내려 했다. 여기서 완벽한 건설물이라는 말이 현실의 구현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건설물을 이루는 별개의 벽돌이 어느 시공간에서 추출되었든 간에, 이것들을 하나로 조합해 매끄러운 표면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영화 작가의 진정한 능력인 것이다. 마치 중세의 성상화가 여러 번의 붓칠을 통해 구현되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키노-아이라는 것의 본뜻은 편집 능력을 통해 다양한 현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다는 뜻이었을 테다. 키노-아이의 재현적 능력은 세계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하나로 뭉쳐지게 하는 외부 세계의 조력자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이것이 바로 편집이며, 오늘날에는 가위를 들고 필름을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단위별로 뭉쳐져 하나의 거대한 지구를 만들어내는 구글어스(Google Earth) 서비스가 키노-아이에 더 가까워 보인다.


혹자는 눈의 생리적인 기능을 예시로 들며 착시에 관한 안구의 수정 운동을 지적하겠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남겨두도록 하자. 그보다는 종교적 성상화를 그리던 화가의 모습이 그에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화가들은 신을 정직하게 포착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누구도 이 정직에 확신을 줄 수 없었다. 그들의 목격담은 세계 내부에서 기원한 것이었기에 주관의 슬하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나 신은 절대적인 하나(The One)이기에 경우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신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말하며 이 문제를 피해 갔다. 어린 왕자에게 그려준 작은 상자가 양에 대한 믿음을 형성했듯이 말이다. 이때, 어린 왕자의 작은 상자는 들여다보면 무언가가 보인다는 점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떠오르게 한다. 차이가 있다면 어린 왕자는 보았지만 생택쥐베리는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헌데, 이게 단순한 믿음의 차이일까? 어린 왕자는 이 세계의 바깥에서 왔기에 생택쥐베리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 자연을 포착하려면 자연에서 벗어난 것이 필요하다. 즉, 인간은 자연의 슬하에 있으므로 신을 포착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때 은판을 위시한 본격적인 ‘카메라’가 등장했고, 그것은 자연의 바깥에서 온 존재이기에 자연을 바르게 응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 ‘기술’의 발명이다. 이 은판은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에 사용되는 기술로서, 기술(description)을 위해 발명된 기술(technique)이었다. 인간이 무언가를 직접 할 수 없기에 만들어진 도구적인 성격의 것으로,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본래의 한계에서 우회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다음과 같은 점도 참조해볼 만하다. 최초에 카메라 옵스큐라는 자연을 그리기 위한 보조도구로 사용되었었다. 화가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과시킴으로써, 방 안에서 창밖의 자연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그들에게는 그림의 지평을 손쉽게 넘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그런데 카메라 옵스큐라는 세계를 직접 재현해내기는 했지만, 그렇게 재현된 상을 캔버스 안으로 편집해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의 화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영화감독의 작업을 재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에서 현대로 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직접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신을 죽이는(Shoot) 도구를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가 영화의 발명 5년 후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공교롭다.) 바꾸어 말해, 도구를 발명해 나감으로써 인간은 차분히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갔다. 이런 맥락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두 가지 분할인 사진과 영화는 자연에서 시공간을 강탈해오는 신기(神技)였다. 카메라의 발명은 자연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것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키노-아이라는 이름의 눈으로 신을 포착하였을 때, 신의 뒤편에 자리한 후광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작동을 방해했다. 신은 눈으로는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였고, 신에 대한 객관적인 재현이란 신을 가둘 공간을 건설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카메라 옵스큐라의 초창기에 빛은 필름을 손쉽게 태우곤 했다. 빛은 자신을 포착하려는 이들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보다 ‘안전한’ 필름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렌즈에 들어오는 광량이 많으면 필름을 태워 먹는 일은 여전했다.


비단 광량에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구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터지던 날, 현장을 찍은 카메라 필름의 상당수가 유실되었다. 지독한 방사능이 소리 없이 필름을 태웠고, 이는 마치 자연이 가두어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건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 바는 다음과 같았다. 필름들은 촬영된 필름을 인화소에 보내어 인화해야만 비로소 사진이 되는 존재로서, 우리의 손에서 인화 물질을 통해 ‘편집(Edit)’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문명 시대에 들어서게 된 인류가 날고기를 익혀 먹게 되었듯이, 영화 시대에 들어선 인류는 편집을 가하지 않으면 필름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바라본다는 것은 날 것 그대로를 취한다는 것과도 같다. 카메라 옵스큐라나 캔버스와 같은 부수적인 편집 매체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의 진실을 목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 편집 매체는 다양한 것들을 한자리에 가까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멀리 있음에도 한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도심 속의 CCTV가 왜 그로테스크한 존재인지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보이는 것보다 대상이 가까이 있음”이라는 표식을 관찰자에게 경고한다. 카메라를 통해 연결된 원격 감시자는, 대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눈앞의 카메라를 통해 아주 근접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대체로, CCTV에 포착된 현실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포착하는 것보다 훨씬 ‘역겹다’.


카메라가 세상에 다가서려 할수록 스크린의 표면은 날 것 그대로가 되어 관객을 역겹게 한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멀리서 안전하게 가두기 위한 대물렌즈를 발명해냈다. 사냥의 법칙에서는 멀리서 대상을 정교하게 타격하는 능력이 유효하며, 유효 사거리를 늘리는 대물렌즈는 훗날에 인공위성이라는 수직 원근법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그런 면으로 보면, 영화사에서 딥 포커스가 발명된 맥락이 정해진 크기 안에 많은 공간을 가두기 위해서였다는 우리의 상식은 반대편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 듯 보인다. 카메라는 자연에 다가서기 위함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기술적으로 발전해왔다. 중세의 화가들이 신을 그려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신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던 것처럼, 현대의 감독들은 현실을 찍기 위해 역설적으로 현실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즉, 우리는 카메라-옵스큐라를 통해 세계를 익숙하게 해야만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카메라는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그 역겨움과 야만성을 잠재우는 마성의 무구(武具)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인공위성을 통해 만들어낸 세계의 축적 안에서 ICBM과 같은 궤도 미사일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모니터 화면을 통해 현장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현장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기쁨이 아니라 폭발과 잔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리감이다. 여기서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인 역겨움이나 죄책감과 같은 것도 수직 원근법의 아래로 사라지게 된다.


중세에 세계 안에서 포착되는 신은, 그 안에 들어올 때는 진실한 빛이지만 우리가 바라볼 때는 우리의 뇌를 통해 재현되었다. (들뢰즈의 “뇌는 스크린이다”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어디까지나 화가의 최종적인 데생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신에 대한 믿음에는 종교적 마감이 필요했다. 문제는 (카메라 옵스큐라와 동일하게) 광량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신의 후광이 너무나 센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결국 신은 존재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고로,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에 가깝다. 신에 대한 믿음이 신학과 철학의 영역이었다면, 그것들을 매체 위에 올려두는 일은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면서 점진적으로 자신의 신체 구축 범위를 늘려나간다. 마찬가지로 현대에 포착되는 여러 생생한 이미지들은, 신뢰를 얻기 위해서 그 자체로 어떤 믿음을 요구하기보다는 기술적 재현의 문제를 요구한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에 변함이 없는 것처럼, 어떤 ‘생각/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는 일말의 의심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의심은, 가깝지만 멀리 있는 누군가가 이곳의 현장으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떼어놓고 있다는 점으로 향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이곳의 현장을 비체(abject)로 만들었고, 어떤 사냥감이 이곳을 방문해 자신의 썩은 환부를 삼켜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자신을 객체 사냥의 미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거울이 대표하는 기능인 나르시시즘과 반대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구호를 외쳐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의 발명 이후의 우리에게, 정직하게 바라본다는 것(Object)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말이다.


[1] 이에 대해 지가 베르토프의 다음 발언을 참조할 만하다. "만일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당신은 미리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대본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대략적이고 도식적이어서 화면 위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아무 예상도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포착되는 동시에 기록되었음이 분명한 흔치 않은 순간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다면 배우를 찍는 편이 더 낫다. 최소한 좋은 연기는 나올 테니까.", 키노아이 :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 김영란 옮김, 이매진,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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