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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8. 2020

패배의 두 가지 선택지


1.



1637년, 오랜 투쟁을 하던 인조는 강화도 함락을 계기로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같은 해 2월 24일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른다. 경술국치 이전까지 조선 최대의 굴욕이었던 이 사건은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남한산성>(2017)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의 서두를 영화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이유는 영화에 대해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다. 패배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승리가 아닌 패배의 조건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현실을 생각해보고, 그에 대해 논하기 위함이다.



정치적인 맥락을 피해 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필요악과 필요선에 관한 증례의 논쟁이다. 2011년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해군기지와 관련한 시위가 한창이었을 때, 나는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들이 출처 불명의 좌파 운동가여서가 아니라, 번복될 수 없는 사안에 도전하는 모습이 비합리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변 국가의 정치적이고도 군사적인 확장 행보는 군사 기지의 필요성을 부각했으며, 그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선택이었다. 단순히 돈과 명예,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오는 굴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달라붙을 수 있는 훌륭한 반례가 있다면, 아마도 2016년의 촛불 시위가 아닐까 한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 시대에 더 가까운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2016년에 나는 뉴스를 보며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러나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막연한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불신한다는 게 아니라 불수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뜻이다. 어제의 사실이 오늘의 아침에 바뀌어 있는 이 현실에서, 매체는 현실 조작의 힘이 있다고 느꼈다. 눈으로 보는 현실이 매체가 보여주는 현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끼자, 그것은 마치 엥겔스의 유구한 주장을 뒤집는 것처럼 다가왔다.



위의 두 가지 사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일은 2016년에 주로 논의되었던 사드(THADD) 배치 논란이다. 이 이야기에서 위와 아래 중 어느 쪽에 서있든 간에 이것이 힘의 역학 관계를 따라간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던 것은 양쪽 모두 나라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만을 열렬히 토론할 뿐이었다. 마치 <남한산성>의 두 신하들처럼 말이다. 이 논쟁에서 중국의 외교부 부국장은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라고 말한 바 있으며, 한국의 처지는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대국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는 모양새였다.



승리와 패배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하게 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굴욕적이며, 동시에 본능적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반응은 대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뉘곤 한다. 화를 내거나, 우울해하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런 대가를 치를 수 없기에 그들의 행동에는 어떠한 판단도 개입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판단을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면밀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 대가가 개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는 철저히 유물론적이며, 모두의 염원이 세상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식의 ‘볼레로*’는 실행되지 못한다. (*주 : 호소다 마모루의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몰락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은 일종의 사기에 가깝지만, 그 포장이라는 게 미학적인 작업이 될 수는 있다. 동시에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인 무언가를 철저히 감싸고돌 수도 있는데, 현실 정치가 현실의 물질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면 정치적인 작업이란 현실이 아닌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것들, 이른바 ‘예비된 현실’이 현실의 공상으로서 떠올라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다. 몰락을 맞닥뜨린 순간에 작은 현실은 예비된 현실에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날의 매체가 클라우드와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기반으로 운용된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듯 보인다. 이를테면 테트리스 게임에서는 화면의 상단부에 있는 블록이 계속해서 내려오기에 언젠가는 게임의 끝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음에 나올 블록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그것들이 매번 주어진 현실과 조응할 수만은 없기에 이 게임은 끝날 수밖에 없다.



2.



2020년대에 막 들어선 우리에게 ‘사이다 전개’라는 현상이 부상해왔다. 이야기 전개가 시원시원한 것은 좋은데 의문스러운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그들은 이야기의 밖에서 정당성을 찾는데, 이는 작품이 틀 안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정경유착에 회의를 느낀 경찰이 퇴사 후에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경찰일 때는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했지만, 경찰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인을 응징하고 다닌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해볼 수 있는 건, 가장 처음으로 사적 제제의 정당성과 악인 판결에 관한 식별의 표식이겠지만 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을 넘었는지 아닌지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바깥에서 판단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상(image)을 들여다보는 청자는 일차적으로 작품 내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작품 내의 이야기에 동화되므로 자신의 현실도 안으로 모셔오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이 작품의 바깥 고리에 있어야만 비로소 작품이 고립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이 현실을 모셔올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은 작품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지지대로서, 그를 방관하고 포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이것이야말로 작품이 현실에 동화되거나 혹은 이긴다고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작품은 현실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그가 현실을 닮아있더라도 현실의 인물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은 현실을 발판 삼아 뛰어오르기에 그 무엇보다 멀리 가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이 정의 구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대체로 악에 대한 응징을 첫 번째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 작동원리를 들여다보면 넘을 수 없는 선에 대한 강한 반발이 뒷받침되어 있다. 법이라는 구체적인 형태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무형의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법의 실체를 의심하게 되는데, 가장 딱딱해 보이는 선이 얼마든지 무형의 매체로 가공될 수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현실은 항상 상상을 벗어나며,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유물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표현할 때는 관념이 물질을 결정한 게 아니라 물질에서 관념이 피어올랐을 뿐이다.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다는 말과 사이다를 마신 듯 시원하다고 말하는, 두 가지 상반된 표현이 있다. 매번 당하고만 살던 인물이 어쩌다 한 번 크게 갚아주는 것은 유구한 장르의 클리셰지만, 무턱대고 사이다를 부르짖는 일은 어딘지 모를 의문이 든다.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선 그리기에는 거침이 없지만 정작 그 속은 딴 판이다. 이 동양화의 구도에서 처벌자(Punisher)는 한 붓 그리기가 아니라 공간의 정경 안에 자리한다. 무(無)라는 이름으로 공백에 중점을 두었던 동양화에서는 서양화처럼 뚜렷한 선이 아니라 없음(0)의 가치가 중시되곤 하는데, 이는 전체이자 부분이며 부분이자 전체인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쉽게 말해 동양화에서 작은 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그리고 사이다 전개는 그런 점에서 서양화의 세밀함보다 동양화의 우주적인 성격을 더 닮아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도가사상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이름으로서 자연 그대로의 것이 가치를 지닌다. 혹은 참교육이라는 말도 쓸 수 있겠다. 이 장르에서 못난 개인은 부패한 사회 전체를 보여주는 일종의 집약적 주체로 보여지고, 사회 전체를 처단하는 것보다 일개 개인 하나를 처단하는 게 더 수월하기에 그들은 연장을 든다. 비슷한 시기에 악당은 영웅에게 당하며 이런 유언을 남기곤 한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혹은 “네가 이런다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분명 그 말처럼 세상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기분만큼은 조금 나아진다.



꽉 막힌 상황이 뻥 뚫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나, 그것이 여전히 살아남았으며 이전보다 훨씬 가속화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꽤나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악인은 몰락하고 선인이 보상받는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유구한 서사의 전통이지만, 그저 시원할 뿐인 냉각수에 몸을 맡기는 일은 어딘지 모를 의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몸이 덥혀진 것일까? 다른 곳에서 더워진 몸을 이곳에 와서 식히는 일은 일종의 상도덕 위반은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는 있겠지만 이야기 자체에는 현실을 조작하는 힘이 없다. 오히려 이야기는 현실에 의해 현실을 강요받는 식의 메타 서사에 가깝다.



3.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가지 현실이 있다. 이 두 가지 현실은 고구마와 사이다라는 극단으로 나누어진다. 한쪽에서 고구마를 먹은 듯 어안이 벙벙한 이들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사이다 전개를 꿈꾸는 작은 혁명가들이 있다. 여기서 고구마의 현실은 항상 사이다 전개를 필요로 하는 듯 보이지만, 사이다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 갑갑한 현실의 대안으로 내놓아지는 해결책은 자신이 돌파해갈 현실이 사라졌을 때 현실의 빈자리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작은 혁명이 꿈꾸는 현실은 현실의 균열로부터 흘러나왔음이 증명된다.



물론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양쪽 모두 우리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다. 참교육이라는 단어는 교육의 불성실함에 따른 반명제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 게 아니다.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남한산성의 비극은 박씨전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영웅놀이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이른바, 국토가 황폐화된 자리에서 떠올리는 이야기의 성격이란 물질을 되돌리는 관념의 현실 조작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과연 관념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매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묘함의 이행은 몰락을 받아들이는 통로의 우회적 표현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매체라는 이름을 한 물질 중에서는 뒤로 가기(Undo)를 허용하는 게 없다. 흔히 지적되어 왔던 티브이의 현실 조작 기능은 정말로 현실을 조작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재생산적인 측면에서 부각되었던 것이었다. 티브이 위에서 현장감은 사라지지만 유사 현실(Pseudoreality)의 감각만큼은 또렷이 남는데, 이것들도 결국에는 어딘가로부터 흘러왔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만큼은 확실히 다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늘 예비된 것으로서 주어지고, 눈으로 확인한 순간에만 비로소 확정된다는 점에서 순서와 방향을 특정 지을 수 없는 좌표의 성질만을 지닌다. 다르게 말해, 인터넷은 관념의 좌표화다.



인터넷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물질 기반 매체와는 달리, 정해진 한도가 아니라 배후의 세계를 자신의 기반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현상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같지만, 그것에 어떠한 타임라인이 새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다음처럼 물음을 던진다. 매체(Media)는 현실과 관념 사이를 매개(Media) 할 수 있을까? 소설과 영화는 자신의 지난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은 단지 해석의 문제로,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예컨대 이는 역사의 계승(factorial)과도 같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사실(fact)이란 발견 자체로 확립되는 사건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현상이 되고 주변부의 것들을 자극적으로 끌어당기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현실의 모자이크 처리된 표면으로서의 화면을 본다.



모자이크 처리된 것은 이미지의 열화를 겪기에 다시 되돌려지지 않는다. AI를 응용해 손실된 이미지 값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손실을 수복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수복된 이미지가 이전처럼 완벽할 수는 없고 애초에 동일한 판본으로 대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되돌려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록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세계가 현존하는 한 영원히 보존될 수 있는 영속성을 만들어냈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원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현실과 사건을 면밀히 이어주어야 할 매체는 오히려 서멀구리스가 되어버렸고, 떠도는 이미지들은 항상 차갑디 차가운 모습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뜨거운 이미지는 없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우주처럼 보이는 인터넷은 하위 매체를 집어삼켜 차가운 평면 속에 가두어버렸고, 이 안에서 우리의 뜨거운 마음은 잠재워졌거나 혹은 있더라도 진공에 가로막혀 전달되지 못하게 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는 평면을 넘어선 우정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듯 보인다. 만약 그들이 운동가라면, 그 요청의 이유가 정말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들이 이미지 몰락의 순간에 닥쳐온 최후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 아무리 비굴하고 비참해진다 하더라도, 차가움의 안쪽에 여전히 남아있을 시대의 불씨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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