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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6. 2019

은유로서의 게임, 질병으로서의 은유


인류가 태초의 지혜를 획득한 이래로 질병은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때에는 질병의 감염 경로를 알지 못했기에 그것은 하늘의 천벌로 여겨졌다. 필멸자인 인간에게 죽음의 시기를 미리 예지해준다는 맥락이었다. 즉 죽음의 현신이 신의 강림에 빗대어졌다. 이후 과학의 힘으로 감염경로가 밝혀지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신과 죽음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신이 사라진 후에도 질병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질병을 신의 형벌쯤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혐오한다. 단언컨대 이것은 이상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도 신은 형벌하는 존재로서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둘 중의 하나다. 신기루에 속고 있거나, 신기루에 속고 싶거나.


근대 서양사에 있던 사건 중에 하나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서게 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그런 사건 중에는 자연을 정복했다고 여겼던 인간을 초라한 먼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흑사병 사태가 있었다. 여기서 전자는 신이라는 주체를 인간의 내면에 편입하여 르네상스 시대를 연다. 그리고 흑사병이 코페르니쿠스보다 이전 시대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흑사병을 통해 부르짖던 신의 존재가 곧 인간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의 질병은 오로지 인간만의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근대 이후의 질병이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질병을 여기는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모든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달했기에 질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질병을 신화화하면서 내면의 신을 외부의 것으로 분리하려는 시도, 즉 필요할 때에만 과거로 회귀하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문제이다.


여기까지가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지적한 부분이다. 이 글에서 손택은 질병을 은유에 빗대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통렬히 비판한다. 이를테면 이렇다. 은유가 인접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유래된다는 점은 마치, 병균이 공기 중을 떠돌면서 서로가 ‘인접하지 않아도’ 질병을 전파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 성립한다. 질병이란 흑사병을 배경으로 한 죽음의 현신이다. 그리고 주체의식이 정처 없이 떠도는 현대인에게 있어 질병이란 잃어버린 자아와도 같다. 타성에 젖은 현대인들은 그런 질병에 주체의식을 담고서는 자기 자신의 삶을 망치려고 든다. 왜 병에 걸렸는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가 없기에,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 여겨야만 정신적인 자유를 얻을 수가 있다.


손택을 내 앞에 불러온 최근의 사건은 게임이 질병으로 지정되었다는 뉴스였다. 최근에 세계보건기구가 게임을 질병이라고 지정한 것을 두고 각계각층에서 잡음이 일어나고 있다. 게임업계와 인터넷 기업들은 게임을 질병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규제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학부모와 정치권에서는 게임을 질병으로 규정해야만 무기력한 이들에게 자신을 통제할 권리를 쥐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질병이 주체를 앗아간다고 믿는 이들이 벌이는 설전이다. 질병에 깃든 주체의 의무는 질병에 걸린 대상이 자기 통제력이 없다는 식의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뉴스에 흔히 나오는 묻지마 살인에서 발견되는 부류의 통제력만을 칭하는 게 아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그런 통제력의 상실은 무언가를 운영(Drive)할 만한 힘이 없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말 그대로 신체를 조종하지 못하는 영혼의 무능력함을 증명하는 게 바로 질병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인 변형은 ‘배를 가라앉히는 선장’이나 ‘비행기를 떨어트리는 기장’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린 기억이 무엇일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술의 윤택함이 인간존재의 윤리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 다시금 증명되었다는 점에 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영혼이 고결해지는 게 아니고, 삶을 통제할 도구가 발명되었다고 해서 그런 통제가 잘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이 말했듯이 인간 자체가 곧 질병이라는 은유는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셈이다.


꽤 우스운 말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허나 스미스 요원 비유를 들었다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세상에 신이 퍼져있다는 만신론의 주장에서 신을 질병으로 치환하면 문장은 아무런 손상 없이 이어진다는 점이 무서운 것이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은총이 질병이 우리에게 부여한 은총으로 바뀌어도 별 이상이 없다는 점을 깨달은 순간부터가 시작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축복과도 같던 죽음이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가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과학이 없던 시대에는 질병에 걸리는 행위가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도덕적인 규율을 어겼기에 내려지는 형벌쯤으로 여겨졌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생기고 나서 밝혀진 질병의 모습에는 우리가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내면의 도덕에서 외면의 도덕으로 옮겨가는 오만이 자리하게 된다. 즉, 질병은 우리의 오판을 유도한다.


게임이 질병이라는 말을 두고 소름이 끼치는 대목은, 그것이 주체가 아닌 형상에 그런 오판을 확대 적용한다는 점이다. 질병 같은 사람이라는 비유가 흑사병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건 단순히 무력의 상징으로만 여겨질 수도 있다. 질병이 동물이나 사람이라는 개별적인 주체에 스며든다는 점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변형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질병이 곧 사회나 국가와 같은 거대집단에 적용될 때에는 참과 거짓이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중세의 검은 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고대 이집트의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병은 재앙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메뚜기 군단과 범람하는 강물이 점조직의 형태로 흩어질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의 모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재앙이라는 점에서 질병을 이루는 병원균을 떠올리게 된다. 질병은 그렇게 재앙이 된다. 말하자면 신을 필요로 했던 우리가 주체로 일어섰을 때는, 이제는 우리가 재앙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방문한 백인이 병원균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은 두 가지다. 바이러스와 세균으로 구성된 질병이 점조직의 형태로 흩어져 있다는 점과 바로 그렇기에 소리 없이 일상에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게임은 질병이라고 규정한 대목이 디지털게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이라는 게 0과 1이라는 두 가지 숫자 혹은 점들을 조합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군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디지털 게임을 질병에 빗대는 현상은 그런 맥락을 거쳐 생성되었을 테다. 디지털이라는 게 그림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점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회화를 따르던 이들이 자신을 기만한다고 생각하며 격하게 반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전제를 가져와 보면 게임이라는 큰 틀에서 우리는 이미 아날로그 시대의 게임을 알고 있다. 당구, 축구, 골프, 스도쿠, 체스. 이를 디지털에 견주어 보았을 때 비교적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들이 게임에 보내는 시선이 왜 그러한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기술을, 더 나아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크나큰 오판이다.


디지털 게임을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게이머들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경계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에 근거가 있다. 통제라는 것이 무기력화되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 현시점에서 통제라는 것을 규정하고, 또 그렇게 규정하는 기술을 발달시키려는 시도는 질병에 대한 오판을 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게임을 보다 현실적인 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게임 업계의 반발이 단지 앞으로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지레 겁을 먹은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이 그렇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확신을 두고 무언가를 지지하는 행위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질병의 메커니즘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것이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며 지레 겁을 먹었던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 질병이 곧 죽음의 은유가 된다고 가정할 때 인간 주체가 죽음을 경계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우리가 어차피 삶의 끝에 죽음이 있을 텐데 무엇하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문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게 공포로 다가오게 된 건 오히려 기술이 발전했다는 점에 있고, 말하자면 우리가 질병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죽음은 계속해서 달라붙는 것이다.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달라붙는 죽음을 칭하는 게 너무 부정적인 시각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싶다. 디지털 게임의 산업적 논리로 계산하려고 들면 우리가 이야기할 공론장은 단지 자본으로만 얽힌 울타리가 된다. 이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건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 아니다. 그 반대로 희망만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불쾌한 것들이 이 속에 들어있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이 허수아비 같은 공의 기표를 통해 울타리를 지켜낼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불과한 이것에 오만가지 이유를 집적하는 행위가 울타리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녀를 위해서라든가, 치료에 들어갈 비용을 예방한다든가 하는 식의 그릇된 폭로가 정작 그들이 애용하는 기술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도 이 비판은 아이러니하다. 기술이 통제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기술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모른다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쯤에서 질문, 죽음은 통제될 수 있는가. 먼 미래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No’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변형, 기술은 통제될 수 있는가. 재밌게도 이 물음은 앞선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먼 미래에는 통제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단 ‘Yes’다. 여기서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대목이 <터미네이터>의 재림과 같은 뚱딴지같은 소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는 정말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AI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게 인간이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하다는 점은 확실하다만, 인간이 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에서 이때의 인간은 기계와의 싸움에서 어디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이며, 완벽하지 않은 창조주의 불완전한 창조물인 기계가 어쩌다 한 번 실수할 때 도출되는 피해는 누구의 책임으로 소명될 것인지의 문제가 우리에게 던져진다.


은유로서의 게임이 있고 질병으로서의 은유가 있다. 여기서 전자는 게임이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측면의 논리이고 후자는 그런 논리에 보조적으로 투입되는 술어이다. 말하자면 은유로서의 게임을 설명해주는 문장은 질병으로서의 은유이다. 그리고 이를 이으면 ‘질병으로서의 은유로서의 게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때 지금까지 글을 함께해온 독자들이라면 이 세 가지 단락이 점조직의 형태로 줄곧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 것이다. 질병은 파편화된 형태로 은유로 빠져나가며, 그런 은유는 점조직의 형태로 디지털 세상에 안착한다. 물론 아날로그 게임이 게임 중독으로 지칭되지 않을만한 이유는, 또는 아날로그가 중독의 세상에 있더라도 안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날로그라는 게 점조직이 될 수 없다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인다. 이에 대한 설명은 켄 로치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소외된 계층을 모니터 안의 점으로 은유하면서 풀어내기도 했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시각적으로 분명했던 것들이 디지털 세상에서는 단지 점조직에 불과하게 되면서 아날로그는 다시금 형태의 붕괴를 겪는다. 요컨대 주체에 대해 물었던 형이상학이 디지털의 공격을 받아 현상학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우리가 늘상 변화하는 사회를 산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파편화된, 양자 세계와 같은 현상적인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기술에 의한 죽음이 아닐지를 되물어 보아야 한다. 디지털 게임이 질병이라는 말은 주어와 술어 사이에 점조직의 형태라는 공통점을 기반을 두는데, 그런 것들이 신체에 침투하면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흔들어 놓지는 않을지 의심하는 듯 보인다. 즉 우리의 모습은 마치 이렇게 보인다. 아직 죽음에 대해 잘 모르던 시기, 그러니까 신이 세상의 법칙으로 전제되어 있던 때처럼 우리의 판단을 외부에 맡긴 채로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때 신으로부터의 신탁은 질병으로부터의 신탁으로 치환된다. 이 신탁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라는 생존의 길이다. 질병에 오염되면 안 된다, 또는 기술에 오염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이고 그에 오염된다는 건 죽음이 만연한 세계에 내쳐지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죽음이 극복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니체와 하이데거와 같은 기술과 죽음에 대해 말했던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게임을 두고 벌어지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싸움에만 불과한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세상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갈등을 미리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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