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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0. 2019

현대의 영화는 체험된다


1. 


영화가 시각 매체라는 점에서 우리는 ‘본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시각 매체는 영화 말고도 책이나 그림이 있고, 그것을 다룰 때 ‘읽는다’는 말도 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책을 ‘읽는다’. 마찬가지로 책을 ‘본다’는 말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영화를 두고서 ‘읽는다’는 표현을 쓸 수는 없는 걸까? 아니다. 영화는 분명 읽혀질 수 있는 영‘상(像)’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미 영화를 읽고 있다. 독해로서의 영화 감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쇼트 하나와 카메라의 매치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추측해내는 것은, 책을 읽으며 단어와 문장 그리고 이미지를 상상하는 작업에 대응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말할 때에는 ‘본다’와 ‘읽는다’라는 두 가지 뜻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최초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순전히 세계를 보는 것에 불과했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라는 것은 세계를 목격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영화에 이야기를 불어넣으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의미 없는 문장과 단어의 나열이었던 영상은 자가조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원시지구의 바다에서 우연한 기회로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 것과도 같았다. 사실 영화는 지구와는 다르게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요컨대 영화는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가상의 신이 되어보는 체험을 선사하는 도구였다. 즉 영화를 본다는 것이 세계의 일부를 목격하여 초점을 맞추는 기능을 한다면,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초점이 어느 정도로 깊어질 수 있는지를 시사했다. 


시간이 흐른 현대에는 흔히 말하는 ‘관습’이 너무나 많아져서 웬만한 목격담은 시시한 게 되어 버렸다. 이를테면 미술의 역사. 고흐에서 모네로, 몬드리안에서 워홀로 이어지는 화풍이 생겼듯이 영화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야기의 정형화가 장르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편집의 정형화는 180도 규칙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으며, 그런 이유로 무엇보다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재료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장인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진의 등장이 현대 미술을 촉발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영화의 미래 또한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목격하는 이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계가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이제 세계로부터 목격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읽는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읽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만들어낸 감독의 의중에 끌려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영화를 해석하는 작업은 이 부분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재료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작업이고, 어떤 짜임새인지를 알기에 그걸 토대로 방어막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라는 말처럼, 조립된 영화를 분해하는 작업은 어떻게 조립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 의견에 찬동할 것인지 반박할 것인지를 판단한다. 만약 찬동한다면 영화 속 세계에 공감을 보내는 것일 테고, 반박한다면 영화 속 세계에 동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세계의 원리에 따라 자신이 재조립되는 불상사를 피하려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2. 


과거에 비하면 영화의 침공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 영화를 보면서 그게 정말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서 해석을 찾아보는 등, 예방접종까지 철저히 하고는 한다. 하지만 관객의 수준이 높아지는 만큼 영화도 교활해지는 법. 영화들은 자신의 세계가 관객의 세계에 동화될 수 있도록 여러 책략과 간계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영화가 자국 사회의 사건이나 관습을 묘사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 경우, 그 시대와 국가를 벗어나게 되면 영화의 텍스트는 암호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 텍스트는 영화관 밖을 나오면 존재하는 공기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는 영화관 내부가 아니라 밖에서 물줄기를 끌어온다. 즉, 그 영화는 관객이 이곳으로 와야만 한다고 개미지옥과 같은 구덩이를 파놓는 셈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표현은 진정성이나 개연성일 것이며, 여기서 진정성은 체험의 영역에 개연성은 독해의 영역에 자리 잡는다. 다르게 말하면 진정성이란 본다는 것의 침공이고 개연성은 읽는다는 것의 침공이다. 어쩌면 이것을 두고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갈림길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 우리는 이것을 사용하도록 하자. 이에 따르면 진정성이라는 것은 영화가 우리 세계를 얼마나 잘 재현했느냐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란 실제 사회가 아니라 관객이 몸담은 세계를 뜻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관객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광경을 가상의 형태로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VR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겠다.  


반대로 개연성이란 독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 지금 우리가 보는 풍경이 사실은 거짓이고 그리하여 왜곡된 세상에서 탈출하려면 그것을 필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요구되는 능력이다. 진정성이 이것이 VR 세상임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개연성이란 우리 세계와 너무나도 닮은 이곳이 VR 세상이라는 점을 의심하려는 태도이다. 요컨대 이것은 영화를 만든 이들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영화관으로 데려와서, 이게 당신네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다시금 밖으로 돌아갈 때 왠지 모를 찝찝함을 남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연성은 의심의 영화이며, 진정성은 믿음의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잘 짜인 개연성은 세계의 완고한 벽에 균열을 내어 그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탐구하게 한다. 이때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더 나아가 현실 세계와 자신, 여태껏 익숙히 알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이때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감독들은 단순히 카메라가 포착하는 풍경만으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개미지옥과 같은 영화관 안으로 관객을 끌고 오는 게 단순한 호객행위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박물관 안에서 인류의 기원, 원숭이부터 현대 인류까지의 역사를 전시해 놓았다 하여도 정작 그것이 관객들에게 자신의 기원을 돌아보게 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의 개연성, 선형적인 시간이 자리하는 공간의 연속성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답은 다음 문단에서 이어진다. 


3.  


앞서 말했다시피 태초의 영화는 진정성에서 시작했다. 뤼미에르의 필름들. 이때는 세계를 진정으로 잘 묘사하는 게 목표였고, 기록이라는 용도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멜리어스의 필름이 등장했다. 동시에 에이젠슈타인과 푸도프킨이 탄생했다. 이 모든 일은 영화의 발명 이후 20년 이내에 벌어졌고, 관객들은 열차의 도착이 묘사되는 스크린에 놀라던 것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어떤 잔혹함이 벌어져도 스크린과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감독들은 이제는 영화가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세계를 끌어당겨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달리 선택지가 없었고, 그런 와중에 찾아낸 응용법이란 구소련과 나치독일의 유명한 선전영화들. <전함 포템킨>과 <의지의 승리>처럼 당신의 세계는 다름 아닌 이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화법이었다. 


개연적으로 돌아가는 필름 세계 안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영화 밖에 진정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이런 개연성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독해되는 필름 세계는 눈으로 보이는 현실에 그런 원리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반발했겠지만, 용도가 용도인 만큼 대놓고 반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이것은 독일과 소련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국도 선전 영화를 찍었고,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의 한국도 영화 상영 전에 뉴스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했다. 이때 뉴스 영화는 그것이 정말로 현실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영화가 영화 바깥의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관객 스스로가 영화로부터 읽히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다만 보는 것은 거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수에게 현실 세계는 여전한 진정성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우기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몇몇 이들이 있었다. 이 당돌한 친구들은 영화 밖에서 영화가 볼거리가 아니라 읽을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깊이 있는 글들을 써내려갔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직접 카메라를 들기까지 했다. 영화사의 2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까이에 뒤 시네마의 친구들은 다시금 천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개연적인 척하는 영화들을 부수고자 했다. 바다 너머 할리우드에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오손 웰즈의 딥 포커스가 나타나고 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영화 밖의 현실에까지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며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아예 카메라를 영화관 밖으로 옮겨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프랑수아 트뢰포의 자서전격에 해당하는 사적 필름 <400번의 구타>는 현실의 진정성이 영화관 안으로 흘러들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트뢰포의 분신과도 같은 이 필름은 관객들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것은 마치 트뢰포 본인이 보내는 시선과도 같았다. 트뢰포는 자신의 슬픈 유년기를 타자화할 수 있었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내어 따스한 품에 안기도록 했다. 말하자면 이제 영화는, 응시되는 대상으로서 관객에게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 우리는, 영화사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 영화가 주체인 세상에서, 관객이 주체인 세상이 왔고. 영화사의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글을 쓰던 이 친구들은 신대륙에 도착한 바이킹처럼 카메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허나 그중에 단연 독보이는 사람은 고다르였다. 고다르의 방식은 영화를 개연적으로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들에 모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줄곧 고민하다가 단편 영화 몇 편에 손을 댔고 마침내 최초의 장편영화를 찍었는데 그게 바로 <네 멋대로 해라>이다. 이 시기 고다르의 생각은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인 ‘숨 쉴 수 없는’ 을 빼다 박은 듯 보였고, 한국어 제목인 ‘네 멋대로 해라’라는 말 또한 기묘하게 들어맞는다. 그는 개연적인 척하기 위해 진정성을 끌어들이는 영화들에 대항하여 카메라를 응시하는 배우를 만들어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지금까지 진정성이 곧 개연성이라고 말해왔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 또한 그저 ‘개연적인 척’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요컨대 고다르에게는 세상 모든 영화가 진정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냥 ‘네 멋대로’ 찍는 게 곧 진정성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여기서 멋대로 한다는 말을 아무런 체계가 없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체계는 기존 영화들을 개연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원리를 상쇄하는 것, 일종의 카운터 펀치였다. 그가 날린 카운터 펀치를 통해 발가벗겨진 다른 영화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러니 그에 따를 반발감은 예고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고다르의 펀치는 그동안 개연성에 따라붙던 진정성이라는 항목을 해체했으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금 진정성이 지배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으므로 양측은 평등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영화를 이루는 원리가 특정한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는 진정성이거나 개연적이기보다는 그저 알 수 없는 타자에 불과하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4. 


영화는 타자가 되었다. 물론 단지 그들만의 일은 아니었고 시대와의 협업이 그렇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이들에게 독해로서의 영화, 개연성이라는 것은 회의적인 대상이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네오 리얼리즘이라는 진정성의 시대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아우슈비츠 안에서의 실존에 대해 고민했던 이들이 있었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고민은 타자 철학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시기의 걸출한 것들, 본다는 것은 곧 타인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라스 레비나스가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의 타자라고 말하는 자크 라깡이 있었다. 그러니 까이에의 친구들이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테다. 사실은 당장 까이에의 친구들만 보아도 몇몇 철학자와 교사, 비평가들이 모여있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뢰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타자화하여 가둬놓은 그 시공간이 새 시대의 개막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속의 풍경은 자신이 믿는 것이 곧 진정성이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스필버그의 <죠스>와 함께 도착한 디지털 시네마의 어떤 경향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속삭였다. 최초로 여러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된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디지털 시네마가 어떤 모습일지를 대략 예측하게 해주었으며, 그 예언은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21세기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이전의 그 잠깐 사이에 영화는 디지털 형태로 배급되었으며,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범람이 이루어지면서 눈으로 보면서도 현실이 아닌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다시금 대두될 수밖에 없었고, 진정성과 개연성의 영역은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영화가 어느 지역 어느 관에서 개봉하노라고 특정될 수 있던 반면에, 현대의 영화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 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이 특정하는 세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영화가 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영화가 세상에 만개하게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게 현대 영화의 경향이다. 


현대의 영화는 체험된다. 태초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뤼미에르의 필름은 스크린의 내용물이 바깥세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밖에서 온 관객에게 있어 그것은 고개를 돌려서 보는 풍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게 영화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영화는 세상 속에 파묻힌 진실을 두고서 끊임없이 파헤쳐 나간다. 이곳은 실재하지도 현존하지도 않는 이상한 시공간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정말로 오묘한 것이었다. 그는 명백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엇박자로 붙이면서 그곳을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시대의 신화가 이미지의 형태로 구현되면서 우리가 ‘보는 것’이 오래전부터 ‘읽히던’ 구전인지를 확신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영화를 두고 현실의 일부라던가 아니면 이게 현실이라던가 하는 수사를 덧붙일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온연한 형태로 나타난 타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를 보면서 버스터 키튼을 떠올리거나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을 보면서 페데리코 펠리니를 떠올릴 수 있다.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키튼과 펠리니는 그들을 떠오르게 한 감독보다 이전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영화들을 보면서 선대를 떠올리는 것은 이미 그들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펠리니를 보면서 <시네마 천국>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주세페가 펠리니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키튼을 보면서 <폴리스 스토리>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성룡이 키튼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기시감을 두고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현실을 쓰고 있다 칭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선대와 후대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말 그대로 우리에게는 체험으로서의 영화가 주어진다. 우리가 목격한 이미지가 곧바로 우리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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