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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8. 2019

21세기가 20세기를 구하다



21세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대체로 기술과 미래에 관한 이미지다. 요컨대 ‘테크노’라 불리는 기술적 공룡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 공룡들은 (<쥬라기 공원>에서 그러했듯이) 과거에 죽은 사실에서 추출되어 현세에 재림했다.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 생겨난 이 공룡들은 미래의 기술이면서도 과거의 생물, 미래에서 온 과거의 존재였다. 따라서 우리가 이를 두고 취해야 할 태도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미래에서 왔지만 과거에도 있었던 것이므로, 그를 대할 때 시야를 미래에 두느냐 과거에 두느냐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관점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것이 21세기라는 새 바람을 타고 재등장했다는 점에는 어딘지 모를 의구심이 든다. 왜 하필 21세기인가? 21세기의 테크노 바람이 기술적 특이점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낭만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전쟁의 광기를 반면교사 삼아 일어선 이성이 그들을 기계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생각하는 기계인 게 아니라, 생각하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때, 앨런 튜링이 고안해낸 실질적인 컴퓨터 기계가 시의적절하게 우리 곁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킹과 룩의 자리교환(캐슬링)처럼 그들과 자리를 바꾸었다. 인간은 컴퓨터처럼 계산하고자 했고, 컴퓨터는 인간처럼 따스해지고자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숙히 알아왔던 인류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그 위에 계산 능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생각+기계의 조합이 아니라, (생각+기계)X이성or감성의 조합이 토대가 되었다는 소리다.


몹시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기계적인 것이 내장되어있다. 여기서 ‘기계적’이라 함은 계산을 뜻한다. 다르게 말하면 결과물이 아니라 그곳까지 향하는 회로를 구축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또는 책임을 어느 정도 회피하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런 구조가 21세기에 등장하는 매체들에도 어떠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승-전-결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던 전통적인 서사의 흐름이 이야기의 구조, 편집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면서 21세기의 대문은 열리게 되었다. 이른바 소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영상’으로 불리는 영상 매체의 혁명은 그들의 여정에 온갖 것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영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그 비선형성에 호응하여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작품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자. 먼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린치가 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루이스 캐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서술한 방식만큼이나 독특하다. 그들은 영화의 도입부에 멀홀랜드 대로로 와서 어느 순간 토끼굴을 타고 이상한 나라로 빠져버린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거울 나라의 붉은 여왕을 따라 붙잡을 수 없는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공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 논리가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런 느낌이 <현기증>에서 히치콕이 렌즈의 확대와 카메라의 후진을 통해 만들어낸 입체적인 쇼트와 비슷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것은 시야가 앞을 바라보는 동시에 몸은 후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에서 말한 <쥬라기 공원>과 유사하다. 미래에서 온 과거라는 말을 미래에서 과거로 늘어지는 신체라고 칭한다면 말이다. 요컨대 시야를 앞에 두면서도 몸은 뒤로 늘어지고 있다는 점이 그 쇼트의 촬영 방법과 비슷하고, 우리가 21세기를 말하고자 하는 방법론과도 유사하다.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를 적어보자면, 우리가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시공이 일그러지면서 이미지가 쪼그라들듯이 묘사하는 것도 그와 유사하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시공을 도약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공간을 도약하려면 미래로부터 과거로 늘어지는 우리의 신체가 그 힘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향하는 궤도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수정을 위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히치콕의 영화에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만 몸은 겁에 질려 나아가지 못할 때 현기증은 일어난다. 둘째, 그 영화의 결말에서 남자는 그토록 바라던 목적지 즉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셋째, 그렇다면 사랑은 곧 목적지가 된다. 따라서 그런 흐름은 이런 공식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내 운명이에요, 라는 말은 You are my Destiny. 그리고 그 운명(Destiny)은 목적지(Destination)으로 변형된다. 말하자면 운명 같은 사랑은 목적지로 변형된다.


이 논리(사랑 Destiny/목적지)에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목적지로 가야만 하는 게 히치콕 시대-아날로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로부터 내용을 추정하는 행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결과는 늘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종탑의 상층부로 올라가면 영화가 끝나버린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흠모하는 대상은 그곳에서 바닥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지만 제자리에 불과한 회로를 짜두지 않는다면, 영상 속의 공간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말이다.


쩌면 미래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히치콕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느낌은 영화 서사 자체에서 드러나는 건 아니고, 영화를 반복해서 관람하는 우리의 내면에서 피어난다. 회로에 대한 반복학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시간 너머로 잊히는 부분이 있고, 어느 순간에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음에도 이미 다 아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단어로 표현하면 기시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때 그 느낌이 ‘결말은 알지만 그곳까지 향하는 서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쥬라기 공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현재이지만, 미래에 벌어질 결과를 과거에 이미 보았기에 기시감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테크노라는 이름의 공룡으로 칭할 수 있다면, 과거의 방식은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사건의 지평선에서 시공을 도약하지 않고 다시금 안쪽으로 돌아오는 게 20세기의 방식이었다. 그것을 설명하는 몇몇 영화는 다음과 같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공간을 먼저 설정한 후에 그곳을 한 바퀴 흩어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인물은 침묵하지만 시선은 메아리치고, 그런 울림이 파장이 되어 파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나비효과, 시선이 만들어내는 작은 소동극이 어떤 결말로 달려가는가. 이때 시선은 누구의 시선이며 결말은 어디로 향하는가. 요컨대 이 통로가 영화의 전후반이 아니라 우리의 전후반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목적지로만 가야 한다는 20세기의 방식은 그들의 관계가 마주해야 할 결말을 그들과 우리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카메라는 우리가 미래로 향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잡아끄는 중력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체가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시선은 앞쪽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이 과정에서 미래는 자신과 닮은 과거를 살려내면서 세대를 교체한다. 다르게 말하면 오즈는 자신이 떠올리는 과거를 살려내면서 미래가 된 과거를 그곳에 투입한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이것을 역(逆)패러독스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 이유로는 첫째. <백 투 더 퓨쳐>에서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과거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맺어주었을 때, 그 모양새는 미래가 과거에 존재하는 미래를 구하는 게 되어버린다. 이게 바로 패러독스다. 그리고 둘째. 하지만 오즈의 영화는 과거가 미래에 존재하는 과거를 구하려고 든다. 즉, 오즈는 가부장제가 존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오즈의 영화는 오즈 자신이 만들어낸 강한 염원이 투영되어있다.


다음으로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 댐이 들어설 예정인 마을을 돌아보는 이 영화가 편집을 마치고 상영관에 걸렸을 때는 이미 마을이 물에 잠기고 난 후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내부 공간은 과거이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현재이다. 아마도 감독으로서는, 이곳이 영화가 상영될 무렵에는 물에 잠길 공간이라는 점에서 미래에 존재하는 과거의 어떤 형태처럼 보였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미래에서 온 과거의 존재, ‘테크노’라는 이름의 공룡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마찬가지로 곧 물에 잠길 이 공간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소환되기까지의 과정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영화 밖에서 이곳은 댐을 세우고 나서 물이 가득 차오르는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이곳은 그저 평범한 마을이고, 재개발 이야기로 뒤숭숭함이 감도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우리는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아 장커는 이 영화를 20세기가 아닌 21세기의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방식은 과거를 말하는 미래였고 21세기의 방식은 미래가 말하는 과거였다. 전자는 과거를 위해 과거를 설명하며 후자는 미래를 위해 미래를 설명한다. 물론 그 둘 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 뒤로 잡아당기는 신체의 무거움을 이겨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나아감이 단순히 운동 이미지에 불과할 뿐, 어딘가로 향하는 방향성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런 운동이 곧 논리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 회로/경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운동을 만들어내는 건 우리 인간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하는 동물이자 기계였던 우리가 이성의 힘을 과신했을 때 그것은 운동/파괴력이 될지언정 논리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시공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시공으로 도약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터스텔라>로 화답했다. 그는 플랜 A와 B를 제시한다. A는 지구를 재건하는 것이고 B는 지구를 탈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플랜 A는 20세기의 방식이고 플랜 B는 21세기의 방식이다. 그리고 플랜 B는 A와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말하자면 애초에 성공이란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플랜 B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로 보낸 메시지’를 받아서 시행된 ‘미래로 향하는 소동극’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여기서 테크노라는 이름의 공룡을 데려와 보자. 요컨대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잠시나마 박제된 화석, 유전적 코드를 미래로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정말로 유일한 방법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고? 그에 대한 놀란의 답변. “이곳은 5차원 공간이고 현 인류는 설명할 수 없어요.”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간 사내는 미래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과거의 존재이며, 반대로 사내의 딸은 과거가 있기에 과거에 존재할 수 있는 미래의 존재이다. 간단하게 말해 플랜 A를 대변하는 딸은 히치콕의 그것처럼 미래를 바라보지만 몸은 여전히 뒤처지고, 그 모습은 지구를 탈출하는 로켓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치 종탑 위에서 히치콕의 남자가 등을 돌렸듯이 말이다. 반면 플랜 B를 대변하는 사내는 <쥬라기 공원>처럼 미래의 기술인 우주선을 과거에 배웠던 전투기 조종술로 조종한다. 또한 블랙홀 안이라는 미래의 공간에서도 과거의 사실들을 건드리고, 살려내면서 다시금 미래를 구축한다. 그런 식으로 플랜 B가 플랜 A를 건드리면서 버려진 20세기가 21세기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는 다시금 과거(지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음 우주 시대를 위한 개척지, 토성의 위성 가운데에 놓인 정거장에서 사내는 깨어나게 된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21세기의 방식은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말하는 것이다. 20세기가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미래에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를 고민했었다면, 21세기는 일단은 이상적인 목적지를 만들어 두고 그곳까지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비유하자면 리모델링과 디자인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전자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반해서, 후자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어떻게 보면 같은 말이지만 그 희망의 주권에 있어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할 수 있다.’의 영역이고, 후자는 ‘해냈다.’의 영역이니 말이다. 물론 ‘해냈다’라는 말이 막무가내식으로 들이대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과거완료 식의 수사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결과는 벌어졌고 후행적으로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 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영상의 형식이 뒤틀어지면서 매체는 체험의 영역으로 들어서기 사직했다. 원인과 결과, 소위 말하는 인과관계/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의 자신이 결과가 되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동안의 원인을 판단하는 체험의 영화가 늘어나게 되었다. 구스 반 산트는 그에 <엘리펀트>로 답했고, 네메시 옐레시 라슬로는 <사울의 아들>로 답했다. 혹자가 이것들을 두고 비디오의 형식, 가상현실 속의 관객이라고 표현하는 가운데 우리는 <쥬라기 공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알을 깨고 나온 공룡에게 그곳은 여전히 현실이지만 외부의 관찰자에게는 과거가 미래에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공룡에게는 매 순간이 결과물이지만 그 밖의 우리에게는 그가 원인(과거)이면서도 결과(미래)이다. 이처럼 분명 우리는 과정이 생략될지언정 고개를 들어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들 속에서 우리라는 존재가 완고함을 느꼈다. 그것은 생각하는 기계, 즉 논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은 논리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목적지가 우리를 바꾸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말은 현대 사회가 왜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우리 몸에서 논리의 목적지/표출지점은 얼굴이다. 인간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대부분은 얼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뉴런이 시냅스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뇌가 시냅스를 두고 기억을 전달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기만 할 뿐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얼굴 대 얼굴로서 소통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얼굴과 얼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정도가 친밀함의 등급을 나눌 수는 있어도 과정을 규명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논리와 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정도로 유사함을 따질 수는 있어도 공식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반복서술. 카메라가 자리하는 곳과 그 시선이 닿는 곳을 쇼트와 리버스 쇼트라는 대화의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라는 매 순간의 결론-이미지는 카메라라는 대변인을 통해서 그 현장의 이미지와 대화하고 있는 게 된다. 물론 그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결론과 과정을 따져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미지를 목격함으로써 실시간으로 읽어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가 자신과 대화하는지 아니면 그 밖의 우리와 대화하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미래의 존재고, 하지만 그 영화는 미래의 우리가 개입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즉,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21세기의 방식이고 영화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20세기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21세기 영화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미지의 생명체를 알아보려고 직접 안으로 뛰어드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온, 앞으로 만나게 될 21세기 영화의 최대 화두가 체험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더 나아가면 그것은 체험이라기보다는 만남이 될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대화를 나누듯이, 인간과 영화가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방식으로 미래는 쓰일 것이다. 또한 이는 그동안 우리가 영화는 닫힌 형식, 죽은 매체라고 부르던 사실을 뒤엎으면서 그동안의 오해를 종식시킬 것이다. 영화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리모델링하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안쪽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 그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 다원주의가 발전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맞물리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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