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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3. 2019

전생을 기억하는 영화

나는 당신이 전생(前生)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아마도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답변을 두고 떠들어 볼 수는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 떠도는 숱한 소문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어느 아이의 사연이 있다. 이 사연이 놀라운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인간의 기억력이 어디부터인지에 관한 물음을 넘어서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극히 소수인데, 그리고 그게 두뇌 발달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과학의 영역을 살아가는 우리인데, 자신이 세계의 일부가 되기도 전부터 자신이 있었노라 말하는 그것에 우리는 의구심을 보내게 된다. 


아마도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전생에 관한 두 가지 답변. 내 기억은 한 번의 단절을 겪고서도 다시금 이어진다. 혹은, 내 기억은 현재에서 과거를 후천적으로 구축하는 방식으로 생성되었다. 이를 영화적 요소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한 번의 단절을 겪고서도 이어지는 편집의 기술. 시간에 지배당하며 세계의 특정 지점으로 돌아가는 도돌이표. 여기서 전자는 공간에서 시간인 당신이 움직이는 것이고, 후자는 응시하는 게 곧 통과의례인 시간의 건널목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학문적인 제안. 전자는 공간 속에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당신에 관한 현상학이고, 후자는 당신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다른 곳을 바라보는지에 관한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시선은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이다. 당연하게도 그 둘은 종교학이라는 하나의 믿음으로 귀결된다. 인간이라는 종교 안에서 그들이 인식하는 현상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교 안에서 그들이 욕망하는 내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나와 타자라는 인간과 신에 관한 대조분석이다. 다시금 이 이야기를 반복해보자. 신의 존재 여부는 곧 세계에 존재하는 숱한 주체의 현상을 한곳에 모은 결과물로서 통찰된다. 또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세계가 곧 주체이고 주체가 곧 세계인 정신분석학적 통찰 안에서, 인간의 내면 욕망을 반영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신이 된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먼저 제안해두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전생이란 종교의 탈을 쓴 무언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생은 사후세계와 짝패를 이루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전생이 현재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면, 사후세계는 현재의 후 단계에 해당하는데, 사후세계에서 환생의 문으로 들어가면 이전의 삶이 전생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현세의 힘든 삶은 전생에서의 업보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상이 현 삶의 불합리함을 감추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보이지 않는 낙관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카스트제도다. 최상층인 브라만이 있고, 최하층인 수드라가 있다. 그렇다면 전생에 그들의 위치는 피라미드가 아니라 역 피라미드 형태였을 수도 있을 테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뒤죽박죽 섞일 뿐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그 두 가지를 영화의 삶에 관한 이야기로 번역해보고 싶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면서 다른 영화와 분위기나 맥락이 유사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순한 내적 기시감에 불과한 것인가? 혹은 표절인가? 아니면 오마주인가?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추상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어올 것이다. 허나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그 추상은 당신이 느낀 영화 간의 깊은 어둠, 사후 세계라는 거대한 단절 속에서 뒤섞인 현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라는 종교는, 영화라는 종교가 되면서 그곳에서의 현상과 정신분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내가 곧 세계이고, 그래서 영화도 세계이다. 하지만 영화는 타자이고,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나라는 이름의 타자이다. 이러한 일치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목격하고, 부활도 목격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한다는 건 우리의 삶이 끝나고 영화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고, 영화가 끝난다는 건 영화의 삶이 끝나고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음처럼 묻게 된다. 영화가 우리를 사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영화를 사는 것인가. 이는 일종의 호접몽이며, 세계가 곧 주체이고 주체가 곧 세계라는 정신분석학의 명제와도 맥락이 닿는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중간에 끊긴 단절의 순간, 영화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그 자리 바꾸기 시간을 두고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는 한번은 죽음을 경험해야만 타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마치, 전생에서 현생으로 넘어가려면 사후 세계라는 거대한 미지의 숲을 건너야만 하듯이? 


하나의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은 하나의 삶을 두 번 사는 것이고, 하지만 매번 다른 느낌이 든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의 삶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 삶을 보면서 전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현세가 아니라면 전생 말고는 이 이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은 시퀀스의 교차와 쇼트의 편집 사이에서 전생과 현생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자면 영화라는 것은 타인처럼 여겨지는 자신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윤회의 늪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당신이 지금 보는 것은 현재라는 이름의 삶이거나 쇼트이다. 


누군가는 영화에서 카메라를 발견했을 때가 곧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 영화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우치는 순간이라고 말했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세상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요컨대 인간의 얼굴이 외부를 향해 열려있는 이유, 또한 거울을 거치지 않으면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를 비추는 거울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그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말해준 사실이고, 영화 속 세계가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렇게 건너갈 때 단절되는 찰나의 순간에 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거울이 우리를 받아들 일 때, 우리의 시선이 스크린 위에 내리꽂힐 때, 전생에서 현생으로 넘어가는 사후세계라는 미지로 남겨진 공간.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체계가 되고 무엇을 누구와 함께하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확대해서 보면 굉장히 쉬운 답을 낼 수 있다. 영화를 한 번 보고, 다음에 두 번 보기까지에 주어진 길고 긴 시간은 우리가 그것을 성찰하기에 충분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반추동물이 되어 영화의 쇼트를 분해하고, 넘기고, 음미하고, 다시금 자연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자연이 순환한다고 말하는 <라이언 킹>의 도입부에서 “서클 오브 라이프”를 들을 때,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많은 쇼트들의 연속인지를 생각해보라고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이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수십 만장의 셀들이 이루어 낸 작은 생명이 바로 그 일렁이는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직시의 다른 표현은 영화가 바로 그런 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다. <라이언 킹>의 시작과 끝은 부모가 자식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가부장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미리 해두면서, 그 장면을 제한다면 이것이 바로 일종의 영화적 세계라는 점을 말해보려고 한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은 가부장제에서 탈피해 언젠가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처럼 물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이길래 동물은 여전하고 인간은 여전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 장면이 곧바로 우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당신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전생을 기억한다’는 식의 종교적인 테마도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현상을 목격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내는 건 오로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비현상적인 동물이다. 그리고 그 현상이 바로 본능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 죽음충동이라고 프로이트가 말했을 때, 그것은 여전히 동물적인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 하므로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동물이 되지 못한다. 영화의 숱한 쇼트들은 거의 매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기억 너머로 사라진다. 여기서 잠깐.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영화를 오해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영화의 쇼트와 시퀀스가 분해되는 게 끝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 너머로 넘어와서 다시금 재구축되는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현생은 우리의 기억 안에 있고, 전생은 영화의 스크린 안에서 여전히 남겨져 있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고 싶다. 영화가 우리의 기억 안으로 넘어와서도 여전히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요컨대 영화가 자신의 죽음을 단지 잊고 있던 것에 불과하다면? 스크린을 떠나 우리의 망막으로 전해지기까지의 그 사후세계를 그가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은 전생을 기억하는 어느 한 생명체의 이야기가 된다. 이때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이며, 그 내용도 스스로 변화를 거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게는 사후세계가 스크린 밖의 우리 세계에 해당할 텐데, 바로 이때 우리 현실의 온갖 더럽거나 아름다운 문제를 뒤집어쓰게 될 테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21세기 안의 20세기를 살아가려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세에서 전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들이 말했던 ‘현실은 추한데 어째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이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현상학에서의 현상이라는 용어가 우리 눈앞에 일렁이는 사막의 신기루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미지는 곧바로 냄새라는 심상으로도 연결될 수 있을 테고, 그러므로 냄새를 맡으면 20세기라는 전생으로 돌아가는 그 영화의 설정은 아무쪼록 흥미롭다.


21세기 안에 20세기의 건물을 지어 외부와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21세기인 현재에 20세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혹은 반대로도 물어볼 수 있는데, 20세기의 영화가 21세기의 우리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거나 하는 기시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과연 정말로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미래는 그저 그렇게 예측될 정도로 허심탄회한 것뿐일까?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 영화 또한 우리의 삶으로 넘어와서, 스크린 안에 남겨진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점을 가정하면서 풀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영화이자 우리, 우리이자 영화인 모두가 어째서 전생을 잊고 사는지에 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나는 멸망해가는 지브리 왕국의 남겨진 유산인 <추억의 마니>를 보면서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문득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그 두 가지 영화가 유사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엉클 분미>. 당신도 잘 알다시피 이 영화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삼촌’이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알랭 레네의 <내 미국 삼촌>은 삼촌이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엉클 분미>와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일종의 격언에 해당하는 ‘미국 삼촌’이라는 말은, 내가 아니라 우리 밖의 타자가 그랬어라고 말하는 알랭 레네 식의 기억에 관한 질문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라는 주체가 외부 세계, 사후세계로 넘어간 자신이라는 이름의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죽어가는 삼촌이 꾼 하나의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문제는 이 꿈이 영화의 초반이 아니라 중반부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이때 당신은 이게 뭐 특별히 문제 될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말이 맞다. 그러나 당신은 이 영화가, 영화라는 주체가 자신의 전생을 영화 안에서 기억해내는 방법에 관한 주제의식을 지녔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느닷없이 태국의 한 전설 속 이미지를 소환해내면서 그것을 현실의 이미지 바로 뒤에 붙여버린다. 이 과정은 용접처럼 불꽃이 튀지도 않아서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곧바로 눈치채기는 힘들고, 그러나 어찌 되었든 곧바로 눈치채게 되는 그런 장면이다. 허나 이를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그 두 가지 세계가 부닥치는 현상에 관해서, 그 사후세계의 면밀주도한 움직임에 관해서 추론을 해보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주님은 메기와 결혼했다. 그리고 정글에서는 망자들이 돌아온다. 하나의 쇼트 안에서는 유령 같은 망자가 조잡한 CG처럼 보이는 역투명화의 형태로 개입해온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심령사진이 찍히는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런 심령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메기들의 설화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분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셈이다. 당신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몇몇 설화들이 실제로 존재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전설의 트로이 목마가 뒤늦게 실존했다는 점은 알지만, 황금의 땅 엘도라도나 가라앉은 땅 아틀란티스는 아직까지도 설화로만 남아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반복, 우리가 생각하는 전생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단지 우리가 꾸며낸 설화에 불과한지, 아니면 실존했던 일인데 너무나 까마득한 일이기에 기억이 희미해졌을 뿐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가? 


알랭 레네의 물음. 내 삼촌은 미국에 있어.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그 외부란 건 바로 영화의 바깥, 우리 사유의 바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기억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게 된다. 당신이 그걸 기억하든 아니든 간에 어찌되었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불신을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신을 기억하든 아니든 간에 결국에는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설화의 형태를 빌린 외부 기억을 하나의 쇼트 안에 현상으로 불러내면서, 사후세계와 현 세계를 이곳에 불러 모으려고 시도한다. 이는 마치 그 중간 지대가 사라져버렸기에 망자들이 현세로 건너오는 듯한 느낌을 주며, 반대로 망자들에게는 현세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게 산자와 망자라면, 그 구분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자리할 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그에 대한 답변은 현재, 이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현상이 되어야 한다. 현재라는 말은 그 특유의 시공간적 특정으로 인하여 영화를 쇼트로 분절해버린다. 그리고 여기서 되물음. 당신은 당신의 삶이 쇼트라고 믿는가. 즉 당신은 숱한 쇼트들의 모음집인가. 그럴 수도 있다. 허나 당신이 그걸 주장한다 하여도 당신은 영화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기에서 그곳을 보고 있고, 그 과정에는 어딘가로 건너간다는 필연적인 의식, 무의식의 지대가 사후에 비견되는 일을 몸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태국의 정글이 아닌 일본의 홋카이도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마니가 살고 있다. 하지만 마니는 달이 떠오르는 날 밤이 아니면 소녀에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그들의 만남이 성립하는 조건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은, 마니가 소녀의 할머니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녀의 할머니가 자장가로 들려준 무의식의 이미지가 현재에 와서 구체화된,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소녀가 미친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의 세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다르게 말해서 이것은 개별적인 셀 하나에 기억 하나가 담겨있고, 우리는 그것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그저 돌돌 돌아가는 영화라는 이름의 필름, 그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이 마니라는 ‘할마니’를 눈치채기 전에는 아마도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니가 소녀의 먼 조상이라는 점, 또는 소녀의 전생이라는 점이다. 달밤에 불이 켜진 저택과 그곳에서 소외된 마니, 여기에 뱃놀이를 즐긴다는 설정은 그녀가 어쩌면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한다. 거기에 영화는 자꾸만 두 소녀를 트라우마가 담긴 장소, 이제는 생명의 결과물이 담기지 않는 곡물 저장 창고에 가두어 놓고는 번개를 내리 처댄다. 나는 이 모습을 두고 거의 죽으라는 식의 악담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후세계를 걷는 두 명의 소녀, 전생과 현생이 만나는 추상적인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모두를 생각해볼 때도 가능한 추론이다. 첫째, 할머니는 손녀가 태어날 무렵에 죽는데 어떤 면에서 할머니는 손녀의 전생이기도 하다. 단순히 유전적인 요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외면받거나 받고 있다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이거나 하는 외견적인 차이가 다른 생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어떠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둘째, 그 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마니에게 집착하는 주인공 소녀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그 전개는 영화가 그들의 만남을 축복하기 위한 화해의 무대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는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쌍둥이 인간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고 나는 생각했다. 


소녀는 일기를 읽으며 마니가 자신의 할머니였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은 밋밋할 정도의 감동을 주지만, 만약 그들의 관계가 현생과 전생의 조합. 그 둘이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의 차를 배를 타고 겨우 넘어서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서, 심지어는 할머니는 이미 죽어서 소녀의 상상 속으로만 존재하는 마니의 모습이 어째서 이곳에 ‘현상’으로 벌어지는지에 관한 가정을 해보게 한다. 이것은 가상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인가. 아니다. 그럼 뭔데? 이것은 기억이다. 애초에 영화는 개별적인 기억의 간혈적 모음집이다. 그리고 쇼트 사이에 벌어지는 부정교합은 지진대의 활발한 활동에 의한 마그마 분출이다. 호주에 있던 화석이 아시아 대륙에도 발견되며, 그것이 지구가 태초에는 하나의 대륙임을 말해주는 증거라면. 영화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원형과 기억에서 출발했고, 우리가 보는 건 단지 현생과 전생이라는 구분에 불과할 뿐이다. 


어머니 저는 죽지 않았어요. 어머니 망자들이 이곳으로 넘어와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가 일본의 훗카이도에서 목격되는 것은 그 영화 사이의 간극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틀을 지닌 영화가 전혀 다른 형태로 지구 반대편에서 목격되고 있는 걸 ‘목격’하는 걸지도 모른다. 일본의 <추억의 마니>가 특별한 순간에 만나는 과거의 자신, 혹은 선대와의 접촉을 보여준다면. 태국의 <엉클 분미>는 자연의 순수함과 군부의 총소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설화 건너의 죽음이 한곳에 모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신기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고, 당신이 기억하는 쇼트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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