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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0. 2019

증상과 징후를 말하는 영화들




의학에 따르면 증상과 징후라는 표현은 유사해보이지만 용례가 다르다고 한다. 증상이란 우리가 주관적으로 내리는 판단을 뜻하고, 징후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인 판단을 뜻한다. 쉽게 말해 어디가 아프다는 식의 통증은 증상이고, 코피가 나거나 황달이 지는 것과 같은 외부적 현상은 징후이다. 그렇기에 증상은 전적으로 환자의 판단에 맡겨지는 반면, 징후는 철저한 검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인 차이로 거론된다. 허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떠한 병명을 내릴 때는 환자와 의사 모두의 판단, 증상과 징후에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컨대 증상이나 징후, 어느 하나만으로 우리가 병에 대해 판단하고 검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불협화음이 일기도 한다. 이를테면 환자는 자각하는 증상이 없다고 우길 수 있다.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자신의 몸상태를 간과하게 된다. 하지만 외관상으로도 명백히 관찰되는 징후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지적하게 하고, 그럼에도 환자가 피드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붕괴하고야 만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안전불감증’이다. 이 안전불감증을 두고 사람들은 대표적인 후진국형 질병이라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는 질병으로서의 은유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사고라는 말의 속뜻은, 본체가 곧 후진국이라는 식의 전반적인 지적이다. 평소에 몸관리를 소홀히 했고, 정작 질병이 발병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부류의 영화였다. 여기에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간접적으로 언급된 <벌새>가 있고, 세월호 사건의 남겨진 것들을 조명하는 <생일>이 있었으며, IMF라는 건국 이래 최대 금융 위기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이 있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영화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픽션의 틀을 취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기반에 둔 사건까지 픽션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들에서는 픽션과 논픽션이라는, ‘증상’과 ‘징후’의 영역이 명확히 나뉜다. 여기서 증상이 부정하고픈 것이라면 징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는 증상을 부정하는 이들을 내세우면서, 관객에게는 그걸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부정할 수 없는 무기력’을 선사한다. 


증상과 징후라는 주관과 객관의 사이에서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게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 즉 영화를 기준으로 볼 때 우리가 ‘미래인’이어서 일 수도 있다. 이미 아는 사실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감정인 셈이다. 그러나 그게 예견된 미래를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다. 비록 영화를 보는 게 어떤 교훈을 얻기 위해서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떤 사건을 우리가 복기한다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모색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게 우리의 의견일 테다. 예컨대, 모두가 그걸 목격한 상황에서 목격을 위한 묘사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흔히 보는 금연 광고처럼 폐암 환자의 썩어 문드러진 폐 사진을 담배갑에 붙여 놓는 식의 시각적 경고를 하는 게 좋을까. 분명 시각적 경고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충격을 우리에게 전한다. <벌새>에서 티브이 너머로 짤막하게 등장한 성수대교가 붕괴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주인공 은희(박지후)의 마음이 현재 어떠한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때 은희가 그걸 보며 어떠한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이 은희 스스로 어떤 ‘증상’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 반대편에는 ‘징후’가 있으리라는 점을 추측케 한다. 왜냐하면 증상과 징후는 어느 하나만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가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 식사 자리에서 은희의 오빠가 아무런 이유 없이 울먹이는 장면은 증상에 대한 징후를 예시하는 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은희라는 증상에 대한 오빠라는 징후, 은희네 집 자체가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왜곡된 힘의 역학관계를 은유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런 흐름 안에서 은희와 오빠의 관계는 가부장제라는 여성주의적 맥락을 벗어나 그것을 품은 거시세계 안으로 편입된다. 은희는 분명 아프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증상이다. 그런 와중에 증상이 곧 징후라는 걸 알아차린 몇몇 이들만이 은희를 진정으로 보듬는다. 자신이 아픈 걸 알아주니 자연스레 은희는 그들에게 끌리게 된다. 우리도 알다시피 증상이라는 건,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어떤 종류의 ‘통증’이기 때문이다.  


증상과 징후의 사이에서 그런 주관적인 통증이 객관적으로 관찰된다면, 본격적으로 위험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직감이라는 말이 그것과 유사한 듯하다. 동물들은 위기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행동하지만, 그게 재앙의 징조를 알리는 ‘징후’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야 동물의 이상행동이 재앙의 징조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전불감증을 다룬 영화에서 우리가 어떠한 불안을 직감적으로 느낀다면, 그건 영화가 우리를 그런 직감 안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기술이기에 명백하게 의도된 징후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본인에게는 아주 개인적인 증거, 즉 ‘증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영화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런 불안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게 괘씸하게 느껴진다.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현실이 아닌 장소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영화가 묘사하는 현실이라는 게 우리와 기본적으로 분리됨을 가정한다면, 스크린이 보여주는 건 증상도 징후도 아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버린다. 나도 느낄 수 없고 상대방도 보지 못한 무언가가 스크린 위에 놓이는데, 이 경우에는 나도 몰랐던 사실이고 상대방도 몰랐던 사실이기에 그것은 말 그대로의 ‘최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최초란 것은 어디로부터 흘러왔을까? 재앙의 근원, 그 뿌리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더욱 불안해진다. 어쩌면 그런 충격이야말로 영화가 의도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해보고 싶다. 우리가 증상이나 징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영화가 말하는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는다. <벌새>로 예를 들면 은희가 목격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영화 바깥에서 은희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만 관측되는 징후의 지점이지 영화 안에서는 은희에 대한 설명, 또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즉,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착각’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영화 속 사건에 대한 분노에 따르는 반발로 ‘무기력함’을 손에 쥐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기력함이 슬픔이나 처량함등의 우울로 바뀌는 건 금방이다. 결국 우리는 영화 안과 영화 바깥을 연결하는 고리가 직접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영화의 한계라고 말할 테다. 영화가 실화를 스크린에 끌어들이든 간에 그것이 허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건은 각색을 거친 실제 사건입니다.”라고 말을 할 때, 그보다 상위에 자리하는 것은 이것이 근본적으로 ‘영화’라는 허구의 매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영화 속 실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하여도, 모름지기 그 눈물이 진정으로 향해야 할 곳은 스크린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영화와 영화의 바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화가 징후라면 영화 바깥은 증상인 것이다. 


영화가 현실의 재현이라고 말하는 고전적인 관점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런 대변이 공감의 행위일 수는 있어도, 물리적인 한계로 직접적인 증상을 나누지는 못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환자와 고통을 분담할 수만 있다면 가족인 우리가 그걸 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테다. 기쁨이나 슬픔, 고통은 나눌수록 더 나으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영화가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직접적인 치유가 되지는 못한다. 만약 영화를 보고 치유받았다는 혹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치유한 것이지 영화가 그를 치료한 게 아니다. 우리가 고양이를 보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지만 고양이가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듯이, 영화와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타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자체는 영화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의 고민과 비슷한 면이 있다. 결국에는 타인이기에 본질적으로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여러 사람들에게서는, 이것은 단지 영화일 뿐이고 그렇기에 당신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몇몇 영화의 화법이 관측된다. 말하자면 그는 겉으로 괜찮은 척, 아닌 척한다. 객관적이고 도도한척하지만 속을 뜯어보면 서서히 망가져가는 뼈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컨대 그는 증상을 부정한다. 하지만 징후는 뚜렷이 관측된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주체와 객체라는 닿을 수 없는 구분선이 사이에 그어져 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든 그것은 허울뿐인 위로로 전해진다. 예컨대 영화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전불감증이라는 게 정말로 몰라서 벌어진 일인지를 재고해보게 된다. 우리가 그걸 정말로 몰라서 대처하지 못했던 걸까.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기본적으로 안전에 대한 불감증, 즉 감각의 무뎌짐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상처에 대한 무뎌짐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안전하지 못한 상황은 곧 생채기를 내는 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마치 <벌새>의 은희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안전하지 못한 것처럼, 안전에 불감한 것들은 자신이 상처를 주는 존재임을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영화나 우리, 둘 중 하나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민감한 소재를 우둔하게 다루면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다. 반대로 우둔한 소재를 예민하게 다루어도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그것 또한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다. 영화의 환영은 우리가 스크린에 몰입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허구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그것은 곧 영화가 다루는 사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절차 속에 영화가 재현하는 현실, 그 모사물은 영화적 허구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한 이야기, 그렇기에 스크린 안에서만 힘을 갖는 시뮬라크르의 잔존물로 남는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세계는, 이미 시뮬라크르에 뒤덮인 원초적으로 거짓된 세계이므로, 그 안에서 진실은 힘을 잃고 잔여는 알갱이로 분해되어버린다. 


혹자는 현실이 거짓된 세계가 아니라고, 그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말하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는 이들이 왜 영화를 보는지를 생각하면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다. 이런 표현이 옳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이들은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일종의 휴양지로서 영화를 찾는 것일 테다. 그러니 영화를 두고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칭하는 건 타당하다. 영화가 현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더라도 개인의 자장으로부터 분리된 루틴 바깥의 세계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결국 이는, 그곳이 거짓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허구라고 믿게 되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와 유사한 입지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금이 정말 있다고 믿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안전불감증이라는 사건이 벌어진 현실이 있고, 영화가 그걸 반영한 허구의 땅이라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던 사건의 증상을 스크린을 빌려 객관화, 이른바 징후로서 변용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이 겪는 사춘기의 감정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벌새>의 은희처럼 그런 주관적인 증상을 징후로서 보아달라는, 일종의 위기감각이다. 이 호소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게 과장이나 허언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런 생각이야말로 안일한 것임을 영화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안전불감증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느끼는 징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화는 분명 익숙한 외견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다. 그것은 일종의 관습이다. 장르나 클리셰, 또는 기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우리가 그들을 미리 예측하고 다음을 제시할 수 있게 해준다. 말하자면 모든 이야기는 원전의 변용일 뿐이어서 우리가 그런 경우의 수를 예측해보는 것은 영화를 볼수록 점점 더 쉬워진다. 그래서 종국에는 어떤 영화도 우리에게 흥분을 주지 못하게 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영화 불감증에 걸리게 된다. 


잘 만든 영화와 새로운 영화는 확실히 다른 개념이다. 잘 만든 영화가 새로운 영화일 수는 있지만, 새로운 영화가 꼭 잘 만든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따금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영역에 접근하는 영화를 발견하고는 한다. 그럴 때 그가 영화적인 탐험이나 제안을 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새로움은, 어떤 미개척지를 우리에게 보여줌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다 알고 왔다고 착각했던 지난 길의 어떤 면모를 다시금 확인시켜줄 때 유발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화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건네온다.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시기의 미묘한 것들, 몸소 느꼈던 이질감이 바로 증상이었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현재에 들어 ‘징후’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흔하다고 생각했던, 변용의 범주 안에 있고 그래서 충분히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던 영화에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징후가 감지될 때, 그제야 영화는 발언권을 갖게 된다. 이때 드는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감정’이 <벌새>의 은희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되돌아보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법한 증상이 현재의 징조, 혹은 징후였다는 사실에 대한 ‘후회’는 늘 남기 마련이니 말이다. 말하자면 안전에 대한 정의는 안일함과 등치되고, 재앙에 대한 정의는 일상 속의 미미한 사건으로 변주된다. 길을 가다 문득 보았던 풍경이 훗날의 사건 현장이 되고, 무심코 지나쳤던 통증이 거대한 질병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실은, 은희가 겪었던 건 사춘기의 열병이 아니라 94년으로 지정된 시대의 아픔이거나 또는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 흔히들 중이병이라고 부르던 질환이 우리가 놓친 무언가의 예후는 아닐지 반문해보게 된다. 또한 은희에게 물음을 던진 영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방안에서 바깥을 향해 내지르는 목소리도 답변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은희의 몸이 보내는 증상에 대한 영화의 답변이었을 것이다. 영지 선생님의 사망은 은희에게 증상에 대한 사고를 불어넣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몸으로 다가오면서 허언은 현실이 된다. 현실에 대한 압박이 은희를 지배하는 가운데 영희는 그게 증상인지를 알지 못한다. 단지 관객만이 그것을 징후로 선언할 뿐이다. 


놀랍게도, 증상과 징후가 일치할 때 병명은 선고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영화 안의 현실로 개입하는 지점도 현실에서 모두가 겪었을 법한 일들, 성수대교 사건이라는 ‘본격적인’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이다. (그 뒤로도 안전에 관한 많은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은희가 겪었던 일방적인 소통, 그 차단에 관한 이야기가 일종의 뇌경색, 혈관이 막히는 질병이 될 때 그곳에는 죽음을 맞이할 신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김정일의 사망이라는 북부 사회주의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라는 남부 자본주의의 죽음으로 다가오면서, 이 땅에 도피할 곳이 없어졌다는 점에 대한 징후로서 영지 선생님의 사망을 은희에게 선고한다. 그래서 이제 그곳에 영화라는 허구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현실에 내디딘 발만이 존재할 뿐이다. 관객과 마찬가지로 은희는 스크린 안에서 바깥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열에 합류하게 된 셈이다.


https://youtu.be/l_BN5W7xf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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