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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2. 2019

진짜 광기와 가짜 광기

최근 인터넷상에 유행하는 단발성 유머 중에는 ‘진짜 광기와 가짜 광기’라는 게 있다. 이른바 ‘광기 드립’이다. 여기서 ‘드립’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맥락인 ‘애드립’에서 후행을 추출한 후, ‘관습적인 유머’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조어이다. 예컨대 광기 드립이란 ‘진짜 광기와 가짜 광기’라는 주제로 양측의 두 가지를 비교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광기라는 단어가 섬뜩해 보이지만 유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진짜지만 가짜보다 무섭지 않은 것’과 ‘가짜지만 진짜보다 무서운 것’이라는 두 가지 상황을 교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극이지만 희극인 것과 희극이지만 비극인 것이라는 두 가지 상황에 빗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맥락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으나, 표피를 제하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역설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양측’이 아니라 배면에 닿은 ‘한몸’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광기 드립이 유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한국에 개봉했다. 묘하게 맞아떨어진 시기에 사람들은 영화를 광기 드립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이때 그 드립의 내용을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은 세상으로부터의 광기가 아니라, 영화보다 더한 현실이 있다는 식의 유머, ‘진짜 광기’란 바로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실 비판이라는 일차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영화란 본디 허구이며 진실은 항상 우리네 현실에 있었다는 점이 가짜와 진짜라는 두 가지 갈래를 만든다. 예컨대, 그 가짜(영화)는 진짜(현실)를 보여주려 하는데 우리는 그걸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가 아무리 진짜 같다 하더라도, 현실은 ‘영화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면서 그들과 자신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이 아무리 영화 같다 하더라도 ‘정말로’ 영화가 되지는 못한다. 이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가 현실을 일방적으로 모방하는 관계임을 말해준다. 만약 현실이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현실 안에 속한 영화라는 시공을 ‘재현’하는 것이지 ‘모방’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영화란 현실 속에 벌어진 현상이다. 그렇기에 영화와 현실은 기본적으로 교집합을 갖지만 합집합의 관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영화를 보고 나서 모방범죄를 일으키리라고 염려하는 이들은 영화를 현실에 대한 무엇으로 보는 걸까. <조커>가 전미에 개봉하고 난 후부터, 상영관 바깥에는 경찰들이 자리를 지킨다고 한다. 추측건대, 이 흥미로운 사실에는 약간의 진실과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보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영화 한 편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염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따라 하거나, 영화의 내용이 현실에 전도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일 텐데. 위의 가정에 따르면 우리는 영화가 우리 현실 안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스크린이 그런 현실을 은폐 상태에서 탈은폐화 하는, 일종의 ‘가시화’를 하지는 않을지를 두려워하는 것일 테다.


은폐와 탈은폐라는 것, 아마도 이게 <조커>라는 영화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개념일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시위할 때 가면을 쓴다. 이는 얼굴을 은폐하는 행위이다. 이때 그들이 시위에 나서는 게 그 자체로는 폭동에 불과할 수는 있어도, 그런 ‘모습’ 자체는 사회적 병폐가 ‘탈은폐’화되는 듯 보인다. 이를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바이러스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평소에 멀쩡하던 것들이 멀쩡하지 않게 바뀌는 것은, 그것 또한 그들의 모습일 뿐 어떠한 형질의 변화가 아닌 셈이다. 그러므로 이 은폐는 탈은폐의 기능을 수행하는, 어쩌면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역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는, <조커>라는 영화가 수행하는 사회비판의 기능을 정반대로 수행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진짜 광기와 가짜 광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광기라는 단어의 양측이 아닌, 배면에 자리함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배면이기에 영화 속 현실 또한 우리네 현실이라고 자연스럽게 여겨버린다. 즉 그곳이 가짜라면 이곳은 진짜이고, 은폐와 탈은폐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게 된다. 그렇기에 여기서 다시금 또 한 번의 변주가 필요하다. <조커>가 보여주는 광대라는 직업이 자의와 관계없이 늘 웃어야 하는 희극인의 희로애락을 대변한다면, 어쩌면 이는 섬뜩함이 아니라 측은함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광대라는 캐릭터에 억지웃음이라는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언캐니’한 느낌을 주는 가면의 굴곡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언캐니함이란, 일상 속에 있던 것들이 어떤 자각을 통해 ‘갑작스레 낯설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캐릭터화된 광대란, 행복을 주는 것이 낯설게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미소라는 것을 일종의 현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재를 ‘언캐니’로 만들고 삶의 자양분을 얻고자 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비관’을 웃음의 디폴트 값으로 정해두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 디폴트 값이 다다미를 뒤집듯 손쉽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가면의 뒤에 얼굴이 있는 게 아니라, 가면 그 자체가 우리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가면을 뒤집을 때, 그 안의 시꺼먼 어둠을 직면하는 게 아니라 가면의 뒷부분’도’ 우리의 얼굴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직면한다. 가면의 앞뒤 모두가 우리의 얼굴이라면, 우리의 본 모습은 무엇인가? 이는 마치 웃음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두고서, 비극과 희극 모두가 우리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실상 광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광기란 현실에 뚫린 불쾌한 골짜기가 우리에게 보내온 전언이다.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처음으로 경이함을 느끼고, 그다음으로는 불쾌함을 느끼며, 마지막으로는 공포감을 느낀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가지 단계처럼 우리가 욕망이나 죽음, 심연을 대하는 태도라고 익숙히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들을 경이롭게 숭배하며 가끔은 싫증을 내고 끝내는 두려움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얼굴의 공동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이 자신의 세계를 대변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영화의 얼굴이 영화의 세계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영화에 얼굴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편에서 출발해보면 된다. 영화의 얼굴은 세계로부터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의 얼굴이 우리가 상상하는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도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광기라는 얼굴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평소에 마주한 웃음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 번째 웃음은 욕망을 대변하고 그것은 우리를 자발적인 숭배로 이끈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봉사, 서비스업에서 주로 발견되는 부류의 희극이다.


당연하게도 <조커>가 빈부를 말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어떤 성질로 연결될 수는 있겠지만, 그에 선행하는 사실은 그들이 웃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웃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웃음이 필요할 때는 의도적으로 웃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웃음은 가짜 웃음과 진짜 웃음으로 나뉘어 있고, 진짜로 웃음이 나올 때는 입꼬리와 더불어 눈꼬리도 같이 올라간다는 점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니 우리가 입을 쭉 벌린 광대의 이미지에 언캐니를 느낀다면, 눈꼬리를 제한 입꼬리만이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건 ‘가짜 웃음’이다. 우리는 인간이 거짓으로 웃음 지을 때, 그가 이 웃음을 의도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본질적으로는 그런 생각에 앞서 이런 사실 자체가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탈은폐’이다.


부자연스러운 표정은 그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른바 ‘포커페이스’라 불리는, 포커 게임에서의 무표정 또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서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그런 인상이 그라는 사람에게 역으로 진입하는 시초가 된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인간의 깊은 심연으로 통하는 현실 세계에 뚫린 출입구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그런 얼굴, 가면을 통해 인간으로 향하게 되며 그곳은 은폐된 곳, 어두컴컴한 영화의 스크린과도 같을 테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현실 안에 속한 ‘영화라는 시공’과, 얼굴을 통해 진입하는 ‘인간이라는 심연’은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우리는 흔히 영화는 가짜고 인간은 진짜라고 생각한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를 묻는 건 우리가 그동안에 많이 해왔던 물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여기서 묻지 않는다. 우리가 가짜와 진짜라는 두 가지 성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그 두 가지가 교차할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일종의 희비 교차, 어쩌면 희극이거나 비극, <조커>의 아서 플렉이 말했듯이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서 보다 중요한 건 양측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손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뒤집힌 물음표, 만약 그것이 심연에 대한 호기심이라면 반대로 쓰인 이 기호는 우리를 천상계로 인도한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는 말을 써도 크게 이상은 없다. 왜냐하면 진짜 같지만 가짜인 것과 가짜이지만 진짜 같은 것은 마치, 영화 같은 현실이거나 현실 같은 영화라는 말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사람들은 현실에서 벌어진 그런 일에 여러 의미로 감탄한다. 하지만 반대로 영화가 현실보다 더할 때 사람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영화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 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은 스펙타클이라는 이름으로 쓰여 ‘스펙타클의 사회’로 우리를 인도한다. 기 드보르는 동명의 저서에서 스펙터클이 이미지의 총체가 아닌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이라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 속의 자본에 대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반대로 응용할 것이다. 어떻게? 스펙터클이라는 이름의 가짜는 진짜와 별반 차이가 없고, 오히려 그 두 가지의 교차점에서 광기가 태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희비극이다. 희비교차이다.


영화의 스펙터클이 용어 그대로의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스펙터클한 영화란 많은 인상을 남기는 ‘자극적인 무언가’일 테다. 기 드보르는 그런 점을 예시로 들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극으로 가득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허나 이런 가정 하에는 온 세상이 그저 아서 플렉에만 그치게 된다.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더니 희극이었다는 그의 발언이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가지 ‘극’의 다른 성격을 교묘하게 역전해놓음에서 비롯되는 유희를 주기 위함이라면, 이 발언에서 핵심이 유희라는 점은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유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면서, 그것이 직시하는 게 과연 희극일지 비극일지를 따져보게 된다. 말하자면 희극이 유희일지 비극이 유희일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이 선택지의 문제점은 어느 한쪽에 유희를 부여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굳이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것은 분명 영화가 제공하는 두 가지 갈림길, 우리가 쉬이 선택할 수 있도록 열어둔 선택지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것일 테다. 이때 그런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를 감추어버린다. 이 점을 사람들은 간과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두 가지 선택지 안에 가두어버린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감금당한 이들이 이 선택에 자유가 없다고 말하는 건 꽤 웃긴 일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고담시에서 문제가 되는 건 사회인가 개인인가. 이 도식은 우리로 하여금 너와 나라는 두 가지 갈림길, 주체와 타자의 길이 아닌 ‘주체와 주체를 둘러싼 것’이라는 세계의 문제로 우리의 사고를 제약해버린다. 바로 그렇게 우리에겐 우리와 세계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편협함이다.


혹자는 너와 나라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 또한 그런 부류의 갈래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만, 세계의 문제와 세계 안에 속한 존재의 문제는 분명 다르다. 영화가 현실의 산하에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영화는 현실이 되려고 모종의 쿠데타를 계획한다. 그 과정에서 스펙터클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데 그에 따르면 세상은 모두 거짓되고 그릇된 것에 불과하게 되고 그런 인상들이 바로 아서 플렉의 조현병으로 나타난다. 기 드보르의 논의를 따르면 아서 플렉이라는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적 피해자로서 망상증이라는 이름의 스펙터클이 실체화된 세계에 사는 것일 테다. 그리고 이 논리는 영화가 지배한 현실, 이미지가 진실처럼 여겨지는 사회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유효타로 작동하면서 <조커>의 아서 플렉을 우리 세계의 주민, 개인의 심연에 자리한 무언가로 여기게 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길을 가다 춤을 추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서 플렉의 시선으로 진행되어 조현병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지는 여러 스펙터클의 사례에서 눈치채듯이, 이 세계가 어쩌면 약간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그리 거짓에 불과하게 만은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곳과 이곳 사이에 선을 긋게 된다. 그곳은 그곳이고 이곳은 이곳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현병 환자 아서 플렉은 객체가 되고 관객인 우리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선 긋기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객체화를 뜻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맥락으로 흘러들어 종국에는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분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현실과 영화의 혼합을 가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조커>를 본 후에 상영관 바깥에 깔린 경찰관은 영화를 영화로 여기는 행위가 그런 혼동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알고도 간과하는 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진단은 영화 속 아서 플렉의 태도가 옳았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가지 조합이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가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다는 슈뢰딩거의 역설이다. 어떤 면에서는 희극이고 어떤 면에서는 비극이지만 종국에는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런 불확실한 혼돈의 상태로 남겨두는 게 우리가 영화와 현실 사이의 어떤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쉽게 말해 영화는 현실의 반면교사가 아니고, 현실은 영화의 소재가 아니다. 당신은 영화가 건물 안에서 바라본 창가라고 여기며 고개를 돌리면 항상 그곳에 영화가 있음을, 그리고 그런 심연이 언캐니하다는 점을 직시하고서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는 광기라는 가면의 두 가지 용례일 뿐이다. 세상은 가면 뒤에 숨어 있지 않다. 오히려 숨어있는 것은 우리이다. 그들은 가면을 두고 스펙터클이라 말했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종국에는 유령극단이었을 뿐이다.



https://youtu.be/50rlHVe6g9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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