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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6. 2019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곳처럼 느껴질지언정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등장인물의 성격이 극 중간에 바뀌는 경우가 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고 흔히 접할 수 있는 부류의 이야기이기에 따로 설명할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이야기학 용어로 트랜스 아이덴티티(Trans-Identity)라고 불리는 이것은, 한글로 풀이하면 ‘정체성이 바뀐다’쯤 된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을 해 부모가 된다든지 등의 사례, 하지만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바깥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햄릿』이 대표적이다. 이 희극에서 주인공 햄릿은 내적인 고민을 함으로써 단순히 부모가 살해당한 비극의 주인공에 그치지 않는, 단편적이지 않고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체성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무엇을 하여 어떻게 되었다’는 식의 한 줄 서술이 아니라, 그 한 줄만으로 표현되지 않는 복합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때 대두되는 문제가 있는데, 이야기를 ‘단면’으로 보여주는 스크린 위에서 ‘어떻게’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화면이 평평하다는 점이 인물을 단면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스크린 안의 인물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이 기본적으로 3D라는 점에서, 2D의 것들은 자연스레 ‘다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는 인물의 이야기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기법을 창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여태까지 알던 책이나 연극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이라는 영상에 움직임을 불어넣은 영화라는 매체는, 영상들의 총체이자 자체로 동영상이라는 지위를 겸하는, 어쩌면 특정한 형체가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근본을 지녔으니 말이다.



영화는 순간의 다발이면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흐름이기도 하다. 예컨대 그는, 천의 얼굴이자 순간의 미모를 지녔다. 아마 그 점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 같다. 허나 영화에 매료되면 우리가 그 안에서 어떠한 진실이나 사실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게 된다. 영화는 순간의 다발을 세워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는 그 안에 우리를 초대한다. 여기서 초대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그걸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는 우리를 매료시킬 힘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그에 끌리고야 만다. 결국 우리는 가끔 우리의 참여에 대한 책임을 영화에 전가하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너무 매력적이기에 내가 당신을 보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부도덕하거나 선정적인 것과 같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무언가일 때, 우리는 그를 보았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숨기고 싶은 진실을 보아버린 이의 최후일 수도 있다. 또는 내가 그렇게 부당한 이가 아니라는 점에 결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유미주의라는 사명 아래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금단의 영역, 그 가장자리에 다가선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온갖 폭력과 성이 난무한다. 즉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는 것만이 영화의 역할은 아니다. 영화가 다루는 것 중 일부는,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영화보다 더 현실 같은’ 사건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줄곧 고민해야 한다. 영화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이 영화를 닮아가는 것인지를.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가정을 하나 해볼 수 있는데, 영화와 현실이 일종의 ‘형제자매’ 관계라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하나의 인물이 성격이 바뀌는 ‘트랜스 아이덴티티’라는 것이다.


문장을 다시 한 번 써보려 한다. 보았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가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눈으로 본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것은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야기는 영화의 리얼리즘에 관한 탐구로 이어진다. 영화가 아무리 현실의 사건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걸 두고 ‘진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짜’라는 단어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외면하려 했던 것에 대한 부정적 언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사와 궤를 같이하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래서 다소 낡았지만,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누군가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그것을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입구인 ‘얼굴’에 대응시킨다면, 이 이야기는 흥미로운 변주를 거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얼굴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지에 관한 물음이다. 다르게 말해, 우리가 알던 얼굴이 내가 아는 그 얼굴이 맞는 걸까?


친구나 가족이 겉모습만 같고 속은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고 망상하는 정신질환이 있다. 여러 매체에 자주 언급된 이 병의 이름은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이다. 정확한 원인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조현병이나 치매와 같은 질환에서 자주 발견되고는 한다. 자세히 말하면 자아를 잃어버리고 주체만이 남은 상태, 방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겪는 제자리걸음의 혼동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에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첫 번째로 치매, 그들의 기억은 늘 한 곳에 머문다. 두 번째로 조현병, 그들의 기억은 한 곳에만 머물고 싶어한다. 전자는 기억의 상실 때문에 어느 한순간에 고립되는 일종의 ‘무인도’이고, 후자는 드넓은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겁을 먹는 광장 공포이다. 이 점이 영화가 말하는 ‘순간(Shot)-이미지’, 영상 이미지에 대응한다.


이 질환에서 우리는 많은 걸 떠올려볼 수 있는데, 작게는 도플갱어 설화부터 크게는 위에서 말한 트랜스 아이덴티티이다. 영화가 하나의 인물, 그 안에는 잘게 쪼개진 얼굴 이미지가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는 쇼트를 본다. 그것들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어쩌면 속은 다른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귀신일까. 아니면 우리가 여태까지 잘못 알던 걸까. 영상의 총체, 순간의 총아인 동영상 매체 ‘영화’가 순간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릴 때 우리는 잔상을 목격한다. 그것은 흔히 남겨진 시간이라 부르는, 하지만 너무 빨라 평소에는 쉬이 목격할 수 없던 시간의 일부이다. 그러니 우리가 잔상을 목격한다면 그것은 결코 평시가 아니다. 잔상을 목격할 만큼 그가 느려졌거나, 또는 우리가 빨라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시간의 격차가 발생하고, 다르게 보면 얼굴의 격차가 이 자리에서 목격된다는 점이 그 다양한 얼굴 모두를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우리는 그 얼굴 모두를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의 범주에는 개인의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헛갈리곤 한다. 그가, 과연 우리가 알던 이가 맞는 걸까? 비슷한 쇼트의 전혀 다른 이는 아닐까?


카그라스 증후군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알다시피 이 문장에서 핵심은, 말 그대로가 아닌 ‘추상화(Abstraction)’이다. 또는 회화에서의 추상화(抽象畫)이기도 하다. 병적인 의미에서 카그라스 증후군은 ‘얼굴이 같기에 같은 사람’인 혹자를 두고 ‘얼굴이 같지만 속은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두고 ‘그가 얼굴이라는 표면을 내버려두고 속을 추상화한다’고 말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내면을 더욱 깊은 심연으로 만든다.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좋은 비유가 있지만, 그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아마도 다음처럼 쓰게 될 테다. ‘열 개의 시퀀스는 알아도 한 개의 쇼트는 모른다’고 말이다. 즉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은 정지된 무언가,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의 쇼트이고, 그러나 그 쇼트 안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게 카그라스 증후군의 주된 논지이다.


이 공식은 이미지-쇼트-얼굴의 계열을 상기해야만 비로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셋 중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공식을 성립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서 그것이 다른 차원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세상’이라는 구분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미지와 쇼트, 그리고 그에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겉으로는 차원관문, 속으로는 내적 탐구를 완성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느 정도는 카그라스 증후군을 의도해야만 비로소 영화와 현실 사이의 리얼리즘의 정도에 관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어제의 영화가 오늘의 영화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흘러온 삶에서 나름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이며, 그것은 우리와 영화의 시간이 다르게 흐름에도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인터스텔라>의 머피와 쿠퍼 부녀처럼, 영화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셈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영화에서 변하는 것들, 그 얼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얼굴이 말하는 두 가지 인물, 동형이상의 주제를 말하는 영화들에 관해서다. 첫 번째로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 두 번째로는 조던 필의 <어스>이다. 두 영화는 하나의 얼굴을 가진 것이 두 개의 정체성으로 나뉘게 된다는 점, 그것들이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찾아온다는 점이 포인트다. 어쩌면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다른 판본일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은 첫사랑의 기억과 현재의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파악한 하나의 이미지에 깃든 두 개의 얼굴이다. 그것은 <어스>의 도플갱어다. 반대로 하나의 얼굴에 나타난 두 개의 이미지도 있다. 그것은 <아사코>의 도플갱어이다.


<어스>가 도플갱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개인의 이면에 깃든 그림자의 존재, 그 신화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면 미국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극이라는 사실이 ‘들통난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도플갱어는 자신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본체를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이때 두 주체의 얼굴은 교환된다. 그림자는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본체는 얼굴에서 생기가 빠져나간다. 말하자면 그들은 영혼의 교환, 그리스 말로는 프시케(Psyche)라 불리는 것을 주고받았다. 삶의 생동감이라는 맥락으로 번안할 수 있는 이 용어가 생명이라는 단어로 주로 번역되고는 하는데, 본래 그리스 말로는 ‘숨(Breath)’을 뜻한다는 점을 먼저 알아두자. 이에 따르면 그림자는 숨 쉬지 못하는 이들, 왜냐하면 코와 입이 달린 얼굴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림자란 쥐죽은 듯 지내야 하는 것보다 더 상위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더욱 ‘비참하다’. (흥미롭게도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숨(Sum)은 존재’를 담당한다. 재미난 말장난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도식을 전제한다. 여기서 우리는 카그라스 증후군을 고려해볼 수 있다. <어스>가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극이라면, 영화의 전신이 연극무대라는 점에서 그곳은 거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해두자면, 그곳에는 ‘빛과 어둠’이라는 그림자적 현상이 아니라 ‘현상과 그림자’라는 두 개의 정의만이 있다. 쉽게 말해 얼굴은 현상이지 빛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빛과 어둠으로 세상을 분류한다면 영화와 현실의 관계도 그렇게 된다. 빛과 어둠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고 영화와 현실 또한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게 된다. 혹자는 빛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깃들기에 그것들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그 점이 세계의 연속성을 담지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이 있는 것이지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니다. 그림자는 어둡지만, 빛이 있어야만 그림자는 존재한다. 빛과 그림자는 동시에 존재하고, 그렇기에 이런 맥락에서 빛은 ‘빛이라는 현상’이 된다.


나는 당신을 그림자라 칭하지만 그림자가 있다면 빛이 있어야 하는 법, 그렇다면 그림자의 방향이 향하는 곳 반대편에서 빛이 흘러오는 중일 테다. 이 흘러옴은 스크린 위에 영사기가 자아내는 빛의 움직임에서도 관측된다. 쉽게 말해 스크린이 빛이라면 그 이외의 것들, 관객석에 깃든 건 그림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목격하는 영화라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매 순간 생동하는 빛, 하지만 그림자인 우리가 여전히 이곳에 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스크린에 어떤 빛이 쏘아지든 간에 우리가 속한 어둠인 그 그림자의 안자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단지 우리의 신경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얼굴을 바꾸는 것의 반대편에는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이어져 있지만 한쪽으로 의존하는 관계,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쪽이 오히려 변하는 쪽을 통제하는 이상한 상황을 우리가 겪게 된다.


<아사코>의 변인(變人)은 그런 변인(Variable)이다. 비범하게 등장한 바쿠가 아사코의 마음에 던진 돌멩이라면, 잔잔한 마음에 퍼진 물결이 그녀의 삶에 변인을 만들어내었다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등장한 같은 얼굴의 타인인 료헤이는 흡사 빛과 어둠을 말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보인다. 영화를 선형으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료헤이가 사라진 바쿠의 대체품, 즉 바쿠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꾼 것으로 가정하게 된다. 이야기로 보면 거의 트랜스 아이덴티티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두 사람을 빛과 어둠의 존재,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영화가 진행되면 그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바쿠는 바쿠였고 료헤이는 료헤이였다. 얼굴이 같았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것이 명백한 영화의 트릭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에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것이 영화라고 ‘우리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영화와 현실을 딱 잘라 구분하면 안 된다. 딱 잘라 구분하면 그림자를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 그림자란 우리 삶에서 양상을 가를 수 없는 어떤 것들, 명백히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뒤에 무언가 따라붙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건 일종의 리스크이다. 또는 반동이기도 하다. 바쿠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료헤이는 다가왔다. 아마도 아사코가 바쿠를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할 무렵에 료헤이는 찾아왔다. 그렇다면 그건 빛과 어둠이라는, 전 애인을 잊기 전에는 새 애인을 마주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영화의 은유이다. 그러나 영화는 료헤이에게 익숙해졌을 무렵에 다시금 바쿠를 등장시키면서, 그를 스크린에만 존재하게 하며 하나의 현실, 아사코가 살아가는 현장에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 보이다가, 료헤이의 앞에 바쿠를 대면시키며 이전까지의 공식을 무참히 깨뜨린다.


이야기의 순서를 보면 바쿠가 료헤이의 앞에 자리하니 료헤이가 바쿠의 그림자라고 보는 게 맞다. 말하자면 바쿠가 없으면 료헤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바쿠는 산란하는 빛의 입자처럼, 쇼트와 얼굴이라는 다양한 순간의 총체이기에 어느 하나로 본질을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다. 그 점에 아사코는 홀렸을 테다. 허나 바쿠가 사라진 순간은 빛이 사라진 때가 아니었다. 명목상으로 빛이 사라졌다는 비유는 가능하겠지만, 그녀가 정말로 잃어버린 것은 태초에 어둠이 있고 빛이 있었기에 도출되는 시간의 문제였을 테다. 빛이 사라지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곳은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무(無)로 규정되던 시기에 찾아온 료헤이는 어둠처럼 보이는 그림자, 그런데 실상 그녀가 받은 구원은 료헤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바쿠와 료헤이라는 두 동형이상이었다. 예컨대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형질에 구원받은 셈이다. 마치 죽은 남편의 모습을 아들에게서 발견하듯이 말이다.


이를 영화로 번안하면 스크린 위에 투과되는 빛, 그 영화라는 매체에는 관객이라는 어둠이 자리한다. 하지만 실상은 영화가 시작되어야 극장에 놀러 오는 그림자, 그 영화적 ‘현상’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관객으로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지만, 적어도 극장에 기반을 둔 사고에서는 관객이 극장의 종속물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기가 어렵다. 쉽게 말해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영화로부터 파생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영화가 없다면 관객은 없다는 말, 다시 말해 ‘영화가 없다면 현실은 없다’는 말. 이 이상한 문장에 대해 우리는 의도적인 오인을 해야 한다. 그것은 카그라스 증후군이다. 영화와 현실 간에 어떠한 방향성이란 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돌리거나 꿰맬지를 고민해보기보다는 안갯속에서 방향을 잃은 듯이 제자리에 서서 앞뒤와 전후의 맥락을 모두 잊어보자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알던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곳처럼 느껴질지언정, 그럼에도 영화와 우리 삶의 관계는 ‘이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끈끈해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성애학(Erotic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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