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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8. 2019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


우리가 시쳇말로 하는 농담 중에는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말이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개념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이 말은 힘든 삶 속에서 한 줄기의 웃음을 내리는 농담이 된다. 그러니까 죽음을 이겨내는 것만이 삶의 방식이 아니고, 죽음으로 향하는 것 또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곧 희극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두려움이 아닌 희극의 대상이 될 때, 셰익스피어적인 맥락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된다. 이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가까이서는 비극이지만 멀리서는 희극’이라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요컨대 인생은 ‘가까이서는 희극이지만 멀리서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이 늘 곁에 있음을 인지하면서 사는 게 삶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큰 비극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는 방 안에는 진드기와 같은 존재가 많이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깨끗하다고 안심했던 사이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방안을 돌아다니면 그 모든 인상은 깨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음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주변이나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모든 인상이 깨어지면서 자기 전체가 죽음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 이 현상은 말 그대로 죽음으로부터의 지배를 받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의 세상이 아니라 죽음 속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준다. 예컨대 우리는 이미 관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심각한 단어의 앞뒤를 바꾸어 ‘살자’라는 긍정적 언사로 바꾸는 선례를 뒤집어 ‘살자’라는 말이 ‘자살’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 농담에는, 말 그대로의 ‘뼈’가 있는 셈이다. 우리 인체에 뼈가 있는 이유가 뼈를 중심으로 근육이 붙기 때문이듯, 우리가 죽음을 알고 지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죽음에 기대어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갑각류가 아니기에 뼈와 살점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있지 않고, 만약 우리가 가재와 같은 갑각류였다면 죽음의 외피를 방어막으로 사용해 연약한 영혼을 보호했을 것이다. 그래서 갑각류는 ‘자살’이라는 말을 뒤집어 ‘살자’로 사용하면 사망에 이른다. 겉에 둘린 죽음을 ‘뒤집으면’ 연약한 속살이 나와버릴 테니.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구 상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려져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인간이 죽음을 뼈대로 삼아 살아간다는, 바로 그렇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뼈가 우리 안에 있기에 눈으로 볼 수 없듯이, 죽음은 우리를 이루는 것이면서도 안에 있기에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하는데,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말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주지시켜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보면 이 말은 단순한 농담에 그치는 게 아닌 듯 보인다.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말은, 산다의 반대로 작용하는 죽음에 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안쪽에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근원적 증거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죽음의 양태에 대한 관찰 방법을 달리할 수 있다. 어떤 것인가 함은, 우리가 살지 못해 죽는다는 뜻으로 이해한 본래의 맥락에서, 선형적인 삶의 끝에 예고된 죽음을 우리 스스로 앞당긴다는 점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예외적인 행위’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살을 통해 정해진 운명을 거스른다.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죽지만 자살을 통해 죽음의 불확실성을 앞당길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시간에 관한 예외적인 행동이자 저항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세상 만물이 필멸하는 상황에서 인간 또한 언젠가 죽음에 이를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뼈대 삼아 살아가기에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음은 사실,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이다. 여기서 교통사고나 질병에 걸린 누군가에게 죽음은 외피를 쓰고 다가와 그를 겁주는데, 이 예상치 못한 방문을 통해 우리는 겁에 질려 그들을 거부하게 된다. 예컨대 이것은 방구석에서 갑자기 바퀴벌레가 나오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이때 그보다 덜 갑작스럽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징표가 있는데 그게 바로 노화이다. 이 노화는 우리가 죽음에 가까워간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 경고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아서 언제 터질지를 우리에게 예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이루는 내면의 축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면서 비탄과 두려움에 빠진다.


얼굴은 인간의 내면이 세상과 통하는 출구이다. 그래서 거칠게 살아온 이는 거친 얼굴을 하게 되고, 곱상하게 자란 이는 곱상한 얼굴을 하게 된다. 불공평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평소에 곱상한 얼굴을 하고 싶다면 삶을 곱상하게 살아야 한다. 허나 중요한 점은 우리의 얼굴이 세상과 통하는 출구라는 게 클라인의 병 모양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병은 내부가 외부로 통하는 위상수학의 개념인데, 말하자면 이는 우리의 얼굴이 내부에서 외부로 분출되지만 다시 또 내부로 이어지는 ‘위상’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친절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의 분출이 다시 나의 내면으로 돌아온다는 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죽음이 얼굴을 통해 나와 다시금 나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얼굴이란 그런 의미를 지닌다. 얼굴은 죽음이 흘러나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체의 ‘기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얼굴을 통해 가장 먼저 확인되는 노화는 우리의 육체에서 흘러나온 죽음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지이다. 이 표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얼굴로 환원하게 된다. 이러한 순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눈으로 목격함에서 오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뼈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노화란 뼈의 붕괴이다. 늙음은 우리의 뼈를 부실하게 한다. 그러니 이것은 골다공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뼈를 구성하는 인자가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뼈의 강도가 약해지게 되니까. 하지만 이를 다르게 말하면 죽음을 보관하던 뼈가 낡아가며 벌어지는 죽음의 누수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늙음이란 뼈의 붕괴를 통해 그 안의 죽음이 얼굴을 통해 흘러나오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이 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게 되며, 동시에 언젠가는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늙은 노철학자는 자신이 붕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 대표적인 이로는 질 들뢰즈가 있고, 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자살을 택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선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심판하는 게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한다. 죽음이 신의 영역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건 신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논란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서 찾지 못한 해답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만들어낸 신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런 신이 되려 하는 우리의 모습이란 내면의 죽음이 얼굴을 거쳐 얼굴로 편입되는 ‘클라인의 병’과 유사해 보인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모습이 붕괴의 이미지와 닮아 보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건 붕괴의 이미지가 적용된 여러 가지 관념적 개념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는 모습이다. 노화라는 것이 죽음의 물질화 및 표면화라는 점에서 죽음이라는 관념을 가시화하는 것이라면, 이를 두고 노화란 죽음의 현실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목격하는 붕괴의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관념을 배후에 두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세계에서 현상으로 드러나는 붕괴의 이미지에 관하여 죽음이라는 관념을 역으로 추적해볼 수 있을 테다. 예를 들어 이것은 9.11 테러 당시에 무너져 내리는 빌딩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는 단순히 그런 거시적 세계뿐만이 아니라 원자들이 부닥치는 미시적 세계 안에서도 적용된다. 말 그대로의 핵분열, 이 용어는 핵분열이라는 에너지의 창출이 실은 죽음이라는 관념을 배후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배면에는 에너지가 있다고 보아도 좋다. 붕괴하는 것들은 그 안에 에너지를 담고 있어서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라고 하여 별반 다를 건 아니어서, 심적으로 무너져내리는 이 또한 엄청난 감정적 동요를 겪게 된다.


심적으로 무너져내리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대가로 한 일시적인 파워업이 존재한다고 여러 매체에서 언급되곤 한다. 이른바 ‘죽음을 불사한 힘’이라는 건데, 만화 <나루토>에서의 마이트 가이나 <엑스맨> 세계관에서의 울버린처럼 죽음을 대가로 한 것들은 마음과 신체의 폭발을 통해 비약적인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러나 그렇게 벌어지는 폭발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죽음의 밑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죽음을 이겨내는 것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끈다. 즉 이는 니체가 인용한 괴테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나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한, 나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뼈는 부러졌다가 다시 붙을수록 그 부위가 점점 더 강해진다. 부러진 부위 주변에 더 두껍게 뼈대가 둘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뼈가 부러지고 나서 내면의 죽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견뎌낼 수 있다면, 뼈가 두텁게 굳으면서 이전보다 더 부러지기 힘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저항은 죽음을 마주하는 거울 앞에서 시작된다. 죽음이 오가는 통로인 얼굴에서 죽음의 향기가 흘러나올 때, 그에 저항하고 죽음을 수거하는 역할은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것이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 번안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로 에이젠슈타인의 유명한 영화 이론, 쇼트와 쇼트의 충돌은 새로운 몽타주를 만든다는 점을 떠올렸다. 요컨대 영화의 쇼트들은 죽음을 이겨내는 것들이며, 이겨내면서 점점 강해질 테다. 하지만 반대로 매 순간 붕괴만을 겪고서 재기하지 못하는 쇼트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가정에 대해 우리가 추가로 덧붙일 수 있는 생각은 그것들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죽음이란 얼굴에서 흘러나오기에, 얼굴이라는 출입구를 거쳐야만 하기에 우리는 영화에서 목격되는 분열의 양상에도 얼굴이 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구름으로 표현된 볼드모트의 얼굴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것은 이 얼굴이 쇼트들의 집합을 통해 관념적인 형태로 나타나든, 아니면 인물의 얼굴을 빌려 빙의의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그것은 필히 관찰된다는 점이다. 즉 이것은 가설을 따라 떠나는 모험이다. 영화의 얼굴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영화의 얼굴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이 맥락에서 요구된다. 우리는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도 죽음으로 향하는 출입구를 찾아 헤맨다.


만약 영화의 필름 롤이 뒤에서 앞으로 영사되는 것을 두고서 ‘그가 살아간다’고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반대로 돌리는 행위는 ‘죽어가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필름 롤 시대의 영화를 먼저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무성 영화 시대의 필름은 영사 기사의 재량대로 속도를 맞추었기에 실제 세계보다 영화의 세계가 더 빠르게 흘러갔다. 영사 기사가 빠르게 돌리면 영화의 세계는 빨라지고 느리게 돌리면 영화의 세계는 느려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필름 규격이 다양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필름에 소리가 담기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속도인 24프레임의 필름이 필요했고, 다르게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16프레임에서 20프레임 사이의 다양한 프레임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가 지금에 비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요컨대 이 시기의 영화는 현대의 우리보다 더 빠른 생체 리듬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빠른 생체 리듬을 가진 것이 더 빨리 죽음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심장 박동 수가 느릴수록 수명이 길다는 건 여러 생물에서 관찰되는 정설이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는 생물은 심장을 최대한 느리게 뛰게 하여 생체대사를 제로에 가깝게 한다고 한다. 생체대사가 느려져야 에너지의 소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심장이 아예 멈추면 에너지를 아예 소모하지 않는 상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가 멈추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순간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각적으로 관찰하는 정지의 순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단 하나의 순간, 바르트의 용어로는 푼크툼이자 라깡의 용어로는 실재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실재-푼크툼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주이상스-거대한 죽음의 공동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는 마치 영화가 상영되기 이전의 어두운 풍경, ‘죽음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화에서 어둠을 발견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곳으로의 ‘일시적인’ 격동을 겪는다. 이 격동은 일종의 일시적인 죽음과도 같다. 비슷한 단어로는 임사체험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죽음에서 삶을 이루고 그 안에서 일시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게 세상과의 첫 번째 만남을 가능케 하는 얼굴의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분열의 양상 안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한데 모이는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죽음 속의 희열이다.


혹자는 죽음 속의 희열이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 상에서 발견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죽음이 두려워 신의 존재를 믿게 된 우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그것은 곧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일 텐데, 이 대목에서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일시적인 죽음에 불과하다는 점을 견지시킨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고, 격동을 겪은 영화 또한 임사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추동할 것이다. 바로 그때 영화는 쇼트 간의 충돌, 시퀀스 간의 충돌, 맥락 간의 충돌을 통해 죽음을 배면에 둔 에너지를 방출할 것이며 그게 곧 우리에게 전달되면서 아주 강력한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영화가 그런 에너지, 얼굴의 형태로 우리를 마주할 것이라는 점일 테다. 영화의 얼굴은 내면에서 외부로만 방출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다시금 안쪽으로 연결되는, 회수의 역할을 겸하는 죽음이 지나는 자리이다. 아마도 이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얼굴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한다. 또는 영화의 얼굴이 어째서 특정한 형태를 칭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얼굴을 똑 닮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느끼는 분열의 양상은 영화가 우리를 투입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틈새가 아니라, 영화가 살아가는 동시에 뼈가 늙어간다는 결핍의 현상이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가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말이 되지 아니한다. 살자의 반대말이 자살이라는 게 죽음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영화가 죽음이라는 뼈대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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