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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6. 2019

카르마 시네마


1. 


인도에는 카르마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보통 불교의 윤회 사상과 결합하여 전생에서의 업보가 현생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에 부연 되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카르마란 원인이 결과로 이어지고 결과는 원인을 낳는다고 말하면서 그 고리는 무한히 순환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 삶에 벌어진 현상의 원인은 단지 현생의 범주 안에서만 찾는 게 아니라 전생에서까지 그 수색의 범주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브라만교는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적용했고 그 결과가 카스트제도이다. 그들은 ‘우리 삶에 벌어진 현상’이 하위계급이 현재 받는 불평등과 부조리라고 말하면서, 그런 결과의 원인이 전생에서의 ‘업’에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전생에서 좋지 못하게 살았으니 현생에서 그 업보를 갚으라는 것이다. 허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말은, 전생이라는 게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이미 ‘증명할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증명할 수도 없는 곳으로 책임의 소재를 돌리면서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카르마라는 게 세계의 모순을 합리화하는 것이자 ‘증명 불가능하지만 증명된 것’으로 돌려버린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예컨대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무의식이자 그것으로의 환원이다. 이 말이 무의식을 발명한 프로이트와 그 후손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돌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이전 삶에서 그것이 발견된다는 점’만큼은 카르마와 정신분석학이 공유하는 하나의 일치점이라 할 수 있겠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추상이 있을 것 같다. 그중에는 희망처럼 막연한 게 있을 수 있고, 또는 죽음처럼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증명할 수 없는 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생각은 우리가 기억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일 테다. 기본적으로 기억이란 것은 우리의 현재 시간(에 뒤따르는 공간)을 머릿속에 기록해두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이 저장이 정말로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확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지나버려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증명한다고 스스로 말하고는 한다. 왜냐하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뇌는 그것을 이미 증명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현혹에 대하여 뇌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이 우리 몸에 대한 경탄을 불러올지 아니면 한탄을 불러올지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몸이 갖는 선의의 왜곡 능력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야 하는가. 같은 시간에 벌어진 사건이라도 당사자의 신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은 신체가 시공간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도 이것이 카르마가 말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 관한 신체로의 번안일 테다. 카르마는 본디 인과라는 추상을 다루기에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것을 신체라는 물질에 안착시키면 우리는 이제 그것이 추상일 때보다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더 쉽게 왜곡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왜곡이 자아내는 시야의 왜곡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접목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허나 지금의 우리는 그러한 제도 아래를 살아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로부터 벗어나는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 삶의 현상들은 신체라는 고정점을 잃어버리고 네트워크의 바다 안을 부유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의 우리가 카르마라는 현상에 대해 논하게 된다면 그 관점은 세계 안을 부유하는,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내 존재로서의 카르마란 무엇인가. 이것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경합하는 거대한 혼돈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카르마를 발견하면서도 그 모든 게 서로를 지나쳐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 각자가 서로의 길을 간다는 점이 아니라 이들이 개척한 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동안에 자리한다는 것, 즉 우리가 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이다. 이때 공동체는 무한한 네트워크의 확장을 우리 의식의 경계를 통해 확정 짓는 방식으로 설립된다. 말하자면 서부개척 시대의 농민처럼 우리가 의식하는 곳까지가 우리 의식의 경계이며, 발이 닿는 곳이 곧 카르마가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러하니 원인과 결과라는 전생과 현생으로의 확장은 무한한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가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결과를 응시할 필요도 없고, 원인을 미리 가정하면서 결과를 예상하는 것 또한 예상치 못한 변수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에는 우리라는 주체가 신체 밖으로 나가며 벌어지는 카르마의 자유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의 카르마는 신체가 아니라 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과이다. 그래서 이 인과는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2.


영화에서의 카르마는 어쩌면 신기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영화가 하나의 원인 혹은 결과로서 우리 삶의 무언가로 성립된다는 점을 따져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게 삶의 귀감이 될 수도 있는데, 이때 영화는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결과를 만든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는 쇼트와 리버스 쇼트로서 우리와 대화하게 된다. 영화가 질문을 던지면 (쇼트), 우리가 응답한다(리버스 쇼트). 이러한 응시와 피응시의 관계는 필름이라는 물질이 우리라는 물질에게 전하는 일종의 업보, 이른바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카르마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물질로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이 영화라거나, 또는 영화가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는 두 갈래의 공식을 세우게 된다. 즉, 신체가 없으면 시선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이 영화에서의 카메라를 통해 증명된다. 그런데 이 카메라가 영화 안에서 응시와 피응시라는 두 가지의 물질 이동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영화 안에서 반복된다는 점을 또다시 말해준다. 예컨대 나와 영화가 주고받는 영향은, 그 원인과 결과를 물질의 형태로 주고받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생겨나는 게 바로 영화의 물리적 이미지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동선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또는 내부의 시선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흐름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기민한 이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물질의 형태에서 카르마를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카르마라는 것은 말 그대로의 흐름이기에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명확하게 할 수 없고, 그렇기에 더욱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틀이 하나의 세계로서 그곳을 현생으로 만들고, 이곳에서의 전생과 다음 생을 엿보는 우리는 우리가 그 흐름 중 어디에 편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네트워크 시대가 요구하는 탈신체화의 경향이라는 게 영화에 적용될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다소 흥미로운 지점으로 흘러가게 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영화에는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말로 영화를 카메라로 찍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영화에서 카메라의 존재를 더는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과거보다는 현대의 관객이 더 똑똑하기에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는데, 오히려 더 잘 보이기에 의도적으로 간과해버리는 결과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또렷해질수록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서 우리가 앞서 말한 카르마라는 개념을 사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관객은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기호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자신에게 유의미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영화에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대의 소비자가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공정무역’과 같은 바른 소비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영화를 소비할 때도 영화의 생산과정에 개입하면서 자신이 영화라는 세상으로 다이브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화는 단지 개입하거나 개입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항상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공간을 발굴해냈고 그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것들은 영화가 아직 모르고 있는 부분이어서 영화는 그제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선두와 선미의 형태를 견인하는 것은 영화와 우리라는, 전생과 현생의 관계인 셈이다.


이때 흥미로운 사안을 하나 말해두고 싶다. 실사영화 <알리타 : 배틀엔젤>로 제작되기도 한 일본의 만화 <총몽>에는 카르마라는 현상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한 과학자가 나온다. 물론 카르마라는 게 우리 현실에서는 하나의 관념이지만, 만화 안에서는 정말로 현실 세계의 법칙 중 하나로 언급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 법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말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증명되기 이전의 중력과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만화에서 과학자의 목표는 로봇 바디로 신체를 구성한 이들과 실제 신체를 가진 이들이 자신의 신체에 연결된 카르마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즉 카르마라는 게 우리의 신체에 종속되는 개념인지 아니면 정신에 연결되는 개념인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사람의 뇌를 가지고 이런저런 잔혹한 실험을 수행하는데, 그중에 주인공은 카르마를 변형하는 이로써 과학자의 흥미를 끌게 된다. 이게 작품의 주된 내러티브이고, 우리가 여기서 떠올려볼 수 있는 개념은 위에서 말한 탈신체화의 경향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하면 영화와 우리의 관계는 신체에서 비롯되는 걸까 아니면 정신과의 교감인 것일까. 이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무의식 단에서 이루어지기에 더 알기 어려운, 분명 있지만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임이 틀림없다. 예컨대 뇌가 스크린이라고 가정한다면 영화는 뇌의 표면단에서 이루어지는 물질 작용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과정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총몽>이 말하는 현대 영화의 카르마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다.


3.


들뢰즈의 말처럼 현대 영화는 우리의 두뇌 작용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실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발전하고 있음이 위 문단의 주된 논지이다. 이를 두고 우리가 똑똑해졌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영화는 이제 수동적 대상에 불과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훈육할 수 있다는 점이 주된 관전 포인트이다. 그러니까 <총몽>의 논의처럼 영화에서 신체라는 게 거의 중요하지 않게 된 요즘 시대에는 영화를 어디에서 보든 간에 그는 그일 뿐이고, 카메라라는 것은 몇 mm인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여기 이곳’에 카메라가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졌다. 이전 시대에 거리에 나가 영화를 찍던 이들에게 16mm 카메라가 세상의 거친 면을 눈으로 담아내었다면, 현대의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점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카메라가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구나 그걸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카메라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 먼 미래의 인류는 찍는다는 개념을 모를 테다. 왜냐하면 CCTV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는 항상 찍히는 중일 테고, 그래서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찍는다’라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르마라는 것, 이 원인과 결과가 영화에서의 쇼트와 리버스 쇼트라는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진행될 때, 우리가 그걸 알고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가 이를 대담으로 불러야 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영화를 보며 상시 질문을 던지는 상태에 있다. 너무 많은 생각과 질문이 영화 안으로 침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질문을 이미 던졌는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말 그대로 결과는 있는데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원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수없이 넘쳐나는 이미지의 바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이미 착각이라고 부를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선이 닿는 곳, 그 결과가 어디에서 흘러왔는지를 따져보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게 바로 결과가 떠나온 자리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서 흘러왔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서 왔는가. 흥미롭게도 분명 그것은 단지 우리의 배경 현실뿐만 아니라 배경 현실 안에 포함된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도 귀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이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뇌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낼 수 있을 테다. 분명,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뇌이다. 뇌는 안구에 들어온 시각 이미지를 조합하여 위아래를 바꾸어놓고 떨림을 수정하며 멀리 있는 것에도 초점을 맞추고는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뇌만큼 가장 완벽한 카메라를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 덧붙여서 안구는 뇌에 연결된 시신경 다발이기에 안구가 카메라라는 말은 엄밀히는 ‘틀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카메라는 곧 스크린이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카메라와 스크린의 관계는 영사기와 스크린처럼 투사하고 투사되는 게 아닌, 스크린이라는 생각의 바다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촉수, 카메라를 그곳에 투입한 것이다. 이러한 투입 과정에서 누가 수비자이고 누가 공격자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원인과 결과, 라는 이름의 영화와 우리가 모두 하나의 세계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생과 현생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하나의 개념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카르마이다. 우리는 그것을 짊어진다. 하지만 체험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체현도 아니다. 현현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단지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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