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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7. 2019

영화의 초상권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간단한 사진은 그 자리에서 촬영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카메라의 역할은 양분화되었다. 일반인 선에서 구매하던 가벼운 카메라의 역할이 스마트폰으로 넘어갔기 때문인데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일상 속에 카메라가 들어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 간추려 말하면 우리의 일상에 카메라가 개입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일상을 견인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을 포착하게 된 게 아니라 포착된 것을 바탕으로 구축된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포착된 것의 시간적 이름은 순간이고 공간적 이름은 현상이다. 순간 위에 구축된 세상이 시간을 바라볼 때 현상 위에 구축된 세상은 공간을 지시하는 셈이다. 


이러한 두 가지 구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건 전자이다. 인간의 눈이 동영상을 전제하기에 우리는 순간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서 단편을 얻어내는 게 카메라의 주된 역할이 되었다. 이는 늙어간다는 것에 저항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흐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일종의 쉼터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쉼터는 어떠한 흐름 안에 있는 게 아니기에 감정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고 따라서 우리가 그에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예컨대 시간은 연속된 흐름이기에 타의적으로 객관성을 띤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순간이 객관적인 게 아니라 흐름이 객관적이라는 이러한 발상은 우리가 여태까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딘가를 바라볼 때 순간의 형태로 묘사하곤 하는데 그게 정말로 순간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변화 아래 있고 우리 또한 그러한데 그런 이유로 자연 상태에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순간이란 것을 우리가 발명했다는 점이다. 본디 인간은 불멸하지 못하기에 영원을 탐하는 필멸자의 숙명을 타고났으며 이는 동굴벽화를 통해 증명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보존하고 싶어하는데 이를테면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분화하는 정념이 뿌연 연기의 형태로 수면에 올라온다면 우리가 그걸 손에 쥘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려고 그것을 단단한 물질에 섞게 되는데 그게 바로 정념의 경화이다. 이때 정념은 자신이 깃들어야 할 특정 공간을 마련하게 되며 순간이 공간에 동화하게 된다. 


그러니 순간과 현상이라는 두 개의 지위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시간이 공간에 깃드는 것이고 그래서 현상은 순간을 받아주는 역할이다. 그런데 현상이 순간을 받아주는 역할이라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찍는 사진은 현상 안에 담겨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진이 인화지 위에 현상되듯이 그렇게 필름을 현상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현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이 인화되는 과정에 떠오르는 뿌연 액질이 바로 정념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 세계는 액체와 같은 경도의 물질로 가득 차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현상 아래에 시간을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액체 상태의 니트로글리세린에 시멘트를 부어 안정화하는 것처럼, 만연하는 정념을 유효하게 다루려면 우리에게 그런 시도가 필요한 셈이다. 


우리가 사진을 자주 찍게 되는 만큼 순간을 더 잘 포착할 수 있게 되었을 듯싶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선예도가 높아지며 유령은 사진에서 물러났으나 그곳에는 여전히 우연이라는 이름의 정념이 존재한다. 길을 가다 우연히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길고양이와 같은 포착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공간을 고양이가 등장한 곳으로 재편하면서 그 위에 귀여움이라는 감정을 덧씌운다. 그 결과 우리가 어딘가로 향하는 이 순간에는 잠시나마 귀여움이라는 정념이 온기의 형태로 남게 된다. 말하자면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은 공간에 동화한 순간을 우리의 마음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그를 포착한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발견 당했다는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 그 또한 우리를 보고 있다. 즉 우리가 세계에 몸담은 만큼 우리는 늘 감시당한다.


그러니 우리가 사진을 찍는 행위를 두고서 세계에 반항하는 것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CCTV로 대표되는 동영상 클립으로 우리를 박제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미지인데 이는 사진이 움직이게 되어 정지상과 이동상을 포괄해 지칭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렇게 감시당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게 아니라 순간이 흐름의 형태로 그나마 남은 시간을 획득했다는 점에 있다. 자동차에 설치된 블랙박스는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시간을 흐름의 형태로 저장해두는데 우리가 그걸 눈으로 확인할 때는 사고가 벌어져 영상을 채득해야만 할 경우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쩌다 발견하는 것은 순간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 즉 현장이다. 그렇기에 지나친 시간에 숨은 단서를 발견하려고 블랙박스를 되돌려보는 행위는 우리가 순간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음에서 요구되는 후천적 판단의 행위인 것이다. 


최근에는 자의와 관계없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일 중 하나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테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시를 하나 들자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인터넷 방송과 셀피 카메라이다. 자신이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을 포착하는 형태로 카메라를 손에 쥐는 이들에게 자신 뒤의 모습은 생각 밖인 듯하다. 이는 그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앞쪽을 바라볼 때 카메라도 앞을 본다면 우리는 눈을 대체할 용도로 카메라릍 택한 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쥔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을 대체하기 위함이 아니라 눈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게 된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다르다. 무언가를 대체한다는 건 기존에 있던 걸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 자체가 된다는 건 기존의 것을 애초에 없던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는 치환과 변화라는 두 개의 화학반응에 의거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제안하는 카메라의 역할이 바로 그것인데 카메라가 바라보는 세상이 과연 치환인지 변화인지에 관해 물음을 던져보려 한다. 먼저 전통적으로 이쪽에서 앞쪽을 바라보는 촬영은 우리의 눈보다 나은 카메라에 세상을 포착하는 것을 위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눈이 있는 자리에는 카메라가 들어앉게 되리라고 우리는 예측해볼 수 있다. 또한 이 경우 순간을 정밀하게 콘트롤하게 된 우리에게 시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눈이 카메라로 대체된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 카메라를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결코 현실에 가까워질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눈이 카메라로 대체된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순간은 영원을 배반하는 가치가 아닐 것이며 어쩌면 영원 속을 살아간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들에게 순간이란 언제든지 돌려볼 수 있고 소환할 수 있으며 다르게 말하면 그런 시간이 이미 뇌의 신경회로에 연결되어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자연스러운 세상에 태어난 이들에게 순간은 더는 영원성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단지 순간을 말하는 공간만이 남아 그들이 품은 현상을 우리에게 돌려줄 뿐이다. 예컨대 순간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은 우리 세상이 명료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 


세상이 명료하지 않다는 게 사실에 대한 정확도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식의 부정확도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분쟁이 일어날 일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현상에 대한 이해가 이제야 막 요구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순간의 가치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 둘은 약간의 절차를 거치면 금세 변환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그 잠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즉 우리가 여전히 시간 하를 살아가는 필멸자임에도 카메라가 눈이 되어버린 이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점의 차이로 이어지게 되면서 우리 시대에 공존하는 이들에게 갈등과 분쟁을 안겨주고 있다. 


포착된 것으로 구축된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배반적 가치를 은유한다면 그것이 옳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할 때 그곳에는 포착된 시간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이 공유하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반려동물의 10년은 인간의 10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여기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눈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단편적이면서도 순간에 깃든 우리의 정념을 의미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 이후로는 세상에 향해야 할 것들이 우리의 안쪽으로 쏟아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어떤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을 찍을 때 길을 가던 타인이 나올 수 있는데 대부분은 그걸 잘 모른다. 디지털 시대에 대두된 사회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제공하는 영원성으로부터 도주할 권리이고 불가피하게 공익을 위해 필요한 몇몇 안전장치를 제하더라도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셀피나 방송을 하는 어느 누군가의 시간에 담길 수 있다. 분명 나는 그저 길을 지날 뿐이기에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나를 영원의 한구석으로 데려간다. 그런 식으로 기록된 나의 모습은 내가 바라보던 현상이 반대로 나를 현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상한 일을 유도한다. 내가 현상으로 파악하던 그들의 시간이 나라는 이름의 현상을 단순히 순간에 그치게 할 때 우리는 타인에게 단편적인 무언가로만 파악되어버린다. 


셀피와 인터넷 방송에는 이곳에 서 있는 자신과 카메라 안에 있는 자신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곁의 시간과 공간은 각각 순간적인 현상으로 치부되면서 우리의 기존 시야를 대체한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나 자신을 볼 때 자신을 둘러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는 단지 네트워크 위에서만 신체의 부재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신체가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기에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여긴다고 말하던 때가 인터넷 시대의 초창기였다면, 스마트폰이라는 인터넷 접속기가 우리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사고의 변화는 그의 몸에 달린 카메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들 눈과 카메라가 형성하는 이미지의 작동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지만 눈은 카메라가 될 수 없고 우리가 그걸 따라가는 과정에서 격차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영원해지려는 시도이다. 


셀피와 같은 행동이 이 순간의 내 모습을 이미지로 남기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허나 다르게 보면 우리가 이미지를 찍으려는 건 이미지라는 매체를 통해 영원성을 채득하려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일종의 현상으로 분류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실 여기서 이미지라는 매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본디 영원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걸 실현하는 게 단지 그 시대에 존재하는 매체였을 뿐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초상을 그렸다. 이미지보다 훨씬 많은 자원과 노고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원함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체로 매체가 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현상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상이라는 존재는 이미 우리가 세계에 속해있음을 간과하면서 자신을 세계에 각인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한계에 부딪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미지를 찍는 건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이미지를 찍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찍는다는 행위가 요구하는 영원함의 기준에는 내면의 시간과 몸담은 공간이 필요할 뿐 으레 태어난 이후로 보아왔던 시야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이미지에 찍힌다는 점에 보이는 의견이 달라지게 된다. 여기 두 갈래의 사람이 있다. 이미지에 찍히는 걸 좋아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에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부류이다. 이미지에 찍히는 걸 좋아하는 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만큼 세상도 나를 바라보리라고 생각하기에 자신을 그에 공유한다. 이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더는 시간적인 무언가가 아니고 젊음의 나날이 됨에 따른 어떠한 현상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 반면 이미지에 찍히는 걸 싫어하는 이는 이미지의 영원함이 자신에게 깃드는 걸 두려워한다. 그들은 영원함을 추구하던 고대 미라처럼 썩어 문드러진 채로 자신의 삶이 남는 것을 경계하고 그에 물음을 던져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말할 때 영화는 자신이 당신에게 목격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영화라는 공간이 바라는 게 과연 목격당한다는 행위일지 아니면 자신을 셀피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우리는 영화에 리얼리즘이라는 객관적 평가 기준을 들이대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문제 제기를 우리가 따로 해야 할 이유는 없는데,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세계이고 영화의 리얼리즘은 영화가 자신을 어떻게 담아내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하나의 세상이자 세계라면 그렇게 표현된 주격에도 초상권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영화를 두고서 그걸 외면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꼭 보아야 하는 또는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무언가로 가정하고 있을 테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가 손수 담아내는 ‘나의 얼굴을 포함한 셀피의 배경’으로만 세워두는 게 되어버린다. 이 경우 우리는 영화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 영화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권리, 잊혀질 권리와 지명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디지털 시대가 우리의 삶을 이미지라는 현상으로 인간을 재범주화함에서 오는 여러 이점이 있고, 그에 따라 아날로그 시대의 가치가 아직 우리 곁에 잔존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발을 맞추어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영화라는 동반자에 관하여 현실 세계의 이미지를 영화에 현상으로 옮겨두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찍는다는 게 일상이 된 우리 시대에 영화라는 매체는 이제 더는 지시된 공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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