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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31. 2019

시인과 평론가


시인과 평론가의 관계에 관한 글을 보았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이 이야기가 예술 전반에 적용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내가 본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학계에서 시인과 평론의 관계를 말하는 여러 관점이 있다. 소소하게 다르지만, 시인의 역할과 평론가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쯤은 모두가 동의한다. 먼저 시인은 자신이 본 것을 자신에 빗대어 표현한다. 반면 평론가는 자신이 본 것으로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짧은 요약. “시가 소중한 글쓰기라면 평론은 중요한 글쓰기”라고 이병철 작가는 말한다. 여기에 가하는 변주. “시가 규격을 벗어나는 창작이라면 평론은 규격을 부여하는 창작”이라고 김지윤 작가는 말한다. 마침내 결과물. “시인이 오롯이 혼자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개인적 정체성이라면, 평론가는 연대적 책임을 지게 하는 사회적 정체성”이라고 김효은 작가는 말한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보니 다소 흥미로웠다. 먼저 평론가에 대한 생각을 말해보려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평론가의 역할은 비슷하지만, 한국에서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평론가에게는 어떠한 권력이라는 게 있지 않다. 한국에서 다소 기형적이라고 평가받는 등단 시스템이 문학 분야에서의 권위를 요구하게 한다면, 그런 권위를 창출해내는 게 기성 문인과 평론가이다. 다소 불편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기에 이렇게 적어둔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등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다른 분야의 평론가들에게는 권위가 없거나, 또는 어떻게 평론가가 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 전자는 다양한 의미로 사실이 되었고 후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숙제이다.


후자를 먼저 말해보면 문학 분야에서 평론가는 기성 문인과 기성 평론가가 신인을 뽑는 방식으로 생겨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제 시스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기성이 없다면 신인도 없다는 말로도 읽혀진다. 기성이 신인을 끌어준다는 점에서, 신인에게 성장의 기회가 되고 문단 분위기 형성에도 도움이 되지만 카르텔로 변할 위험이 있다. 양날의 검인 셈이다. 그러나 다른 부분을 제하고 이런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안의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화나 음악과 같은 분야에서 평론가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때, 그 누구도 어떻게 해야 평론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확언하지 못한다. 많이 배웠거나 방송에 자주 나오면 평론가라고 인정해야 할까? 만약 그걸 인정한다면 그걸 인정하는 이는 어떤 권력이 있는 걸까? 다시 말해서 대중으로부터의 지명을 논할 때, 불특정 다수의 의견이 불특정 다수의 의견을 견인한다면 그곳에는 특정한 방향성이 없을 테다. 예컨대 평론가가 해야 할 일은 거리 위의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권력이 아니다. 이쪽 길을 안내할 만큼의 노하우가 있는 것뿐이다.


평론가가 누군가를 이끄는 존재라면 시인이 이끄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이는 각각 리더쉽과 오너쉽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대중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것, 그걸 위해 담론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게 평론가이다. 그러니까 평론가에게 필요한 건 매력이다. 그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자발적으로 따라가게 할 무언가다. 아는 것이 곧 매력일 수도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라는 이름의 친절함에 반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리더쉽의 정의이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한 부분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이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다. 말하자면 평론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이끌만한 정도의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무언가의 권위자라고 부르곤 한다. 마찬가지로 평론가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이다. 즉 평론가가 되면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고 권위가 있는 이가 평론가가 된다. 정확하게는 매력이라는 이름의 권위이다.


평론가가 뒤를 돌아보면 그곳엔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시인이 돌아보는 건 자신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곳엔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사실 시인도 누군가와 연대한다. 사람들과 연대해 의견을 만들어내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라고 우리가 말했지만, 시인의 연대는 바깥세상의 누군가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시인은 지나온 길의 과거와 연대한다. 그곳에는 과거의 자신이 있고 현재의 자신이 있으며 그 모든 걸 끌어안는다. 어쩌면 운명이라거나 숙명이라거나 하는 식의 수사가 이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말보다는 작가라고 쓰는 게 나을 듯하다. 영상 시인이라 불리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평론은 중요하다. 평론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다. 평론이 없어도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의 길로만 가면 그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다. 정해진 답이 있다는 건 명징하다는 것이지만 그만큼 다른 수를 생각할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술은 정해진 답이 없다. 정해진 답이 없고 모두의 생각이 있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시점이 발굴된다. 그리고 이 시점이 잘 닦인 길이라면 시선은 그걸 뚫는 도구이다. 그래서 평론가에게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동시에 그런 길을 함께할 친구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느 길로도 갈 수 있느냐는 문제부터 이 길이 아름답다는 미학의 문제까지, 또는 이 길이 경제적이라는 효율적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실은 어떤 것이든 간에 이해가 가지 않는 길은 없다. 단지 함께하지 않을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시인의 역할은 아무래도 창작자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영화로 치면 영화감독이거나 음악으로 치면 작곡가나 가수라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글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그렇게 역할을 겸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시인과 평론가의 관계를 말하는 글에서 시인과 평론가를 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인으로서의 자아가 있다면 평론가로서의 자아가 있고, 그 둘은 서로 영향받는다고 한다. 공존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공존할 경우에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시를 쓰는 자아는 평론가의 자아에 영향을 받아 조금이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타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라면 그것이 그에게 왜 소중한지를 먼저 묻겠지만, 그럼에도 이해만이 있을 뿐 지지는 받지 못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영화도 만들고 평론도 쓰는 사람들. 그러나 영화를 만들게 되면 평론에서는 멀어지는 게 관례인 듯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만드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간과할 수밖에 없고, 그런 간과에서 오는 여러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소중함을 품는 시인이 꼭 그런 쪽의 창작자일 필요는 없다. 창작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중에는 글도 있다. 그러니까 평론의 형태가 글이라고 가정할 때, 시의 형태를 글로 하여 양쪽을 맞추어 주면 꽤 좋은 시너지가 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시란 우리가 아는 그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소중한 창작물이다. 말하자면 평론이 대의적이라면 시는 자신을 위한 행위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부류의 시를 잘 모른다. 꽤 추상적이지만 시란 단순히 리뷰나 칼럼은 아니고 에세이에 더 가까운데, 평론가이자 시인인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 예컨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의무와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가 충돌한다면 그는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


답은 정해지지 않는다. 취향의 문제이지 정답이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여기에 쓸 수는 있다. 시와 평론의 공통점은 세계를 날카롭게 거두어내고, 그에 날개를 달아 보내는 것이다. 차이점은 자신이 리더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다. 리더가 된다는 건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이거나, 또는 선두에 선 모습이 멋져 보이거나 해서일 테다. 평론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을 동경하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동경만으로 평론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입하는 공상 하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생각했다면 그걸 어떻게 가공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게 현실에 벌어지지는 않지만, 그걸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평론가는 그런 생각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고자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함께라는 것,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일이 있다는 것, 내가 떠올린 의문을 사람들과 같이 생각해보려 한다는 것. 평론의 방향이 사회문제를 말하고 그에 참여를 요구하거나, 또는 미학의 문제를 논하고 그다음 방향을 제시하거나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모든 게 생각의 공유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각과 뜻이 맞는 이를 찾는다는 것, 생각이 다른 이를 만나 차이를 찾고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게 평론가라는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작은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평론가 자신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며 겸손을 취한다.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미덕이지만 정말로 개인이기도 하다. 평론가로서의 자아가 있다면 관객으로서의 자아가 있을 테다. 그리고 두 자아의 평가기준은 굳이 같을 필요가 없다. 영웅에게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있다면 개인으로서의 이야기도 있다. 단지 우리가 어느 한 쪽을 주로 보기에 벌어지는 일들일 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런 고충은 본인에게 더 많이 있을 테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평론가로서는 주목해야 할 수도 있다. 평론가는 그런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고, 그 소의 범주에 자신이 포함된다. 그래서 평론가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길을 닦을 수 있느냐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길을 망치는 게 아닌지를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시인과 평론가를 겸하는 사람이 그걸 조절하기가 쉬울 것 같지는 않다. 두 가지를 겸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보고 듣는 것이 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지켜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그에 휩쓸리기 쉽고, 반대로 자신이 지켜야 할 것도 늘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게 되면 전체적인 방향이 개인의 측면에 부합하지 않는 때가 생긴다. 아마 여기서 필요한건 뚝심이다. 재미있게도 평론가가 무언가를 말할 떄 가장 많이 듣는 욕설이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보라는 것인데, 못 만드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모두를 옮겨 담을 수 없다는 게 큰 문제이다. 무엇보다 시가 함축적인 글이기도 하다.


요약을 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같은 글을 두고 시와 평론을 에세이와 비평문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 둘의 차이는 자유와 방종이다. 방종이 주로 일탈이라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감이 있지만, 글에서의 방종이란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원하는 방향에 맞는 것만 추리는 게 비평문이다. 반대로 욕심을 내어 모든 걸 쓰고자 한다면 그건 에세이다. 욕심이 많은 이가 그만큼 많은 것을 잡지만, 그 모든 걸 유지할 수 없다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예컨대, 글 한 편에 다양한 이야기를 조화롭게 배치하지 못한다면 그런 욕심은 손해가 된다. 그렇지만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점에서 마음은 평안을 얻는다. 그러니 이는 구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얼마나 깊이 아는지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보았다고 말할 때 그게 전부를 본 게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술할 장소는 몹시 부족하다. 무언가를 깨우칠 때마다 계속 적는다면 그곳에는 각주의 각주만이 남겨질 테다. 시인과 평론가라는 자웅동체는 그런 식으로 상호작용한다. 보았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면 무엇을 보았다고 말할지를 결정할 평론가가 있다. 어느 한쪽만으로 되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모두 양쪽의 성질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단지 어느 성향이 더 강한지의 문제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여성과 남성으로 지칭되듯이, 그러나 여자 같은 남자와 남자 같은 여자는 성별이 아니라 성향이듯이,


어쩌면 이 말이 우리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언가에 특화하려고 하나를 택하는 게 아니라면 구태여 진영으로 들어갈 이유는 없다. 국적이 없다는 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에 국적이란 정체성이 아니라 표현수단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가진 잠재성은 어느 하나를 지시하고 있지 않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하면 그것은 다른 표현이다. 다른 표현이라도 하나의 대상을 말한다면 그건 같은 말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손에 쥔다, 또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문제는 플랫폼의 차이일 뿐, 궁극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평론가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평론가라는 직함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하기 이전에 평론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겠지만, 적어도 평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먼저 묻지 않는다면 좋은 글은 나올 수 없다. 시인이 발견이라면 평론가는 발명의 역할이다. 발명은 발견을 토대로 하고 평론은 시를 토대로 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굳이 평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위대함의 한 갈래가 아닐까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쓴 글이 타인에게 평론으로 비추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럴 때면 이건 평론이 아니라고 부정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쓰는 건 평론을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마도 보는 그대로를 말할 때 순수해지는 건, 어린 시절에 그치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쓴 글이 무엇보다 위대하지만 그게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글이다. 문제는 순수함과 욕심을 구분하는 게 어렵다는 점이다.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평론을 하고자 마음먹으면 순수할 수 없게 된다. 만들어진 물음표,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한 물음은 길을 가다 마주친 누군가에 대한 극적인 호감이겠지만 그런 글은 그만큼 찾기가 힘들다.


평론이 죽었다는 말이 클리셰처럼 떠돌지만 반대로 평론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진 요즘 시대에, 평론을 쓰려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볼 곳도 많아서 오히려 중앙에 있는 것들이 잊혀져 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원래 그곳에 있었고 따라서 위치에는 변함이 없다만, 그 주변부에 고지를 오르려는 이들이 몰려서 중앙은 더욱 베일에 싸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안다는 게 곧 보았다는 말과 같지 않게 되었고, 수줍은 고백에서 더는 예전과 같은 냄새가 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순수에 더 집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가장 순수한 고백이 담긴 글은 무엇일까. 가장 깊게 들어가면서도 여전한 순수를 유지하는 그런 글이 나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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