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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6. 2019

최후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이곳


1.


겨울이 오면 해가 짧아진다. 일출은 늦고 일몰은 빨라진다. 그리고 이는 겨울의 정점인 동지에 가장 극대화된다. 동짓날 서울에서는 해가 7시 30분 무렵에 뜨는데, 이 시간에는 보통 사람들이 출근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제 막 눈을 떴을 때에도 세상이 여전히 어두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예컨대 겨울의 아침은 대체로 어둡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하다면, 계절의 변화만으로 아침의 풍경이 달라지는 셈이다.


여름에는 오전 5시 30분에 해가 뜨기에 6시 30분에 일어나면 세상은 이미 환하다. 하지만 겨울에는 오전 7시 30분에 해가 뜨기에 6시 30분에 일어나면 세상은 아직 어둡다. 나는 이게 꽤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하루의 시작이라 함은 밝은 태양을 떠올리니 말이다.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다. 5분이라도 더 자고 싶어한다. 그런 이유로 어떨 땐 이 어둠이 걷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둠이 걷힌다는 건, 출근할 시간이라는 것이니까.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에 앉아있으면 5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점에서는 가사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건 마치 무릉도원과도 같아서 현실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현실에서는 5분이라도, 꿈속에서는 1시간이 흘러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이때가 마치 끝나지 않는 밤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출근하기 싫으니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지구 최후의 밤>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염원해본다.


2.


비간이 만든 이 영화의 제목을 보면 아무래도 사과나무 하나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는 격언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뉘앙스인데,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 오지 않으므로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미래를 맞이할 수 없기에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내일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일이 사과나무 정도의 소박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한 밤에 갇힌 우리가 생각했던 게 지구 최후의 날이라면, 그 소박한 일이란 건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은 일이 아닐까. 영원히 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우리가 찾아 헤매야 한다.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은 그런 분위기에서 그런 목표를 지닌 채로 나아가는 영화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고, 아침이 오면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깨우쳐야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잠이 들어선 안 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써야 하니까. 하지만 완전히 깨어나도 안 된다. 일어나면 그 모든 게 현실로 사라져버리니까.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꼼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어나기 싫다면, 일어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꿈속에서는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라면 눈치챌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는 새벽의 분위기처럼 조심히 행동해야 한다. 부산떠는 순간에 우리는 이 꿈으로부터 추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 최후의 밤은 끝나버리고, 우리는 출근할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작지점이 두려워 결말 지점에만 머무는, 그리고 그걸 끝없이 연장하려 하는 우리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3


새 시작은 두렵고, 다가올 종말도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있기를 선택하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므로 가만히 있어도 종말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시간을 연장하면 된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면 동굴을 필요한 만큼 파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밤은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은 꿈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밤에 시작해 밤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이 영화가 줄곧 어둠에만 머무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뤄홍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진귀하게도 밤은 끝나지 않는다. 가장 첫 번째 이유를 꼽으라면 영화가 밤만을 보여주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영화관 안에 있어서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깃드는데, 이 모습이 마치 낯에서 밤이 되어 잠자리로 가는 우리 모습을 닮았다. 그러니 이때 영화는, 우리가 꾸는 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를 보는 순간엔 현실의 고뇌를 내려놓고 영화에만 집중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뤄홍우의 모습이 이렇다.


영화의 중반에는 영화에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뤄홍우가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지나고 나면 영화에 3D 효과가 적용되면서 본격적인 후반부가 시작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대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뤄홍우가 영화를 보러 왔다는 점이다. 뤄홍우가 영화를 보러 왔다는 건, 현실의 무언가를 피해 이곳에 왔고 그곳에서 꿈을 꾼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뤄홍우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오랜만에 고향에 왔고, 그곳에서 잊고 지내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떠올린 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거나 순수였던 모양이다. 뤄홍우가 영화 내내 떠올리는 건 어느 한 여인이니 말이다.


4.


뤄홍우가 떠올리는 여인은 탕웨이가 연기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탕웨이는 외모가 아름답다. 하지만 여배우의 외모를 평가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할 만큼의 매력이 그녀에게 있고, 이런 매력이 우리가 동경하는 어떤 것의 성질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좋았던 시절이나 좋았던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붙이곤 하는데, 뤄홍우에게 그것은 지난 일이다. 다만 뤄홍우가 고향에 돌아옴으로써 여인을 떠올리게 되는 걸 보면, 뤄홍우의 좋았던 시절은 고향에 지내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예컨대, 그런 이유로 뤄홍우는 이 밤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고향에 내려왔으니, 장례식이 끝나면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이 밤이 영원하면 된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가 아는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그 이유로 첫 번째.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영화라는 유희를 통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기 위해서다. 결국 영화란, 끝나기 싫은 무언가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이제 두 번째. 좀전의 문장을 전제로 뤄홍우와 우리를 같은 자리에 두고 생각해보면, 뤄홍우는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된다. 즉 뤄홍우는 빛이 찾아오는 걸 원치 않는다. 빛이 찾아온다는 건 아침이 왔다는 것이고, 아침이 왔다는 건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지루한 일상을 살기보단 영원한 밤에 머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뤄홍우가 무언가로부터 도피해왔고, 익숙한 곳에서 잊고 지내던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과 영원하기를 염원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은 으레 그렇듯이 누구나 한번쯤은 할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치판단을 집어넣지 말자. 영원한 밤에 머무는 게 현실도피라는 등의 생각 말이다. 중요한 건 뤄홍우는 영화 속 인물이라는 점이고, 관객인 우리가 그런 뤄홍우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는 뤄홍우의 과거와, 영화의 결말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 또한 계획한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머릿속에 미리 그려보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기준으로 뤄홍우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정보가 있지만, 뤄홍우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어서다.


5.


즉 뤄홍우는 만들어진 인물이다. 뤄홍우가 쫓는 무언가가 아니라, 뤄홍우 자체가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지망하는 것인 셈이다. 그러니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현실과 꿈으로 빗대어보면, 우리는 영화 안에서 뤄홍우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게 된다. 그래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영화관에서 졸았다가 깬 뤄홍우가 밖으로 나오면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작중에서 잠이 들었으니 으레 낮이어야 하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장면의 핵심이다. 이는 곧, 영화는 영화로만 남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이상한 곳으로 건너뛴다. 뤄홍우가 왜 영원한 밤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영화는 제공해주지 않는다. 단지, 뤄홍우가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옛 연인과 닮은 여인을 만나서, 그와 영원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었다는 점만을 나지막이 암시해줄 뿐이다. 따라서 영화가 영화로만 남게 된 이유는 없이, 현실의 이상을 두고서 영원한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결론만을 제시하는 게 된다. 즉, 이 영화는 깨어나지 않는다. 이게 희망사항인지 아니면 도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깨어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뤄홍우의 현실에는 자신이 그리워하던 첫사랑이 없다. (물론 영화는 첫사랑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친구라는 점에서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계속 꿈을 꾸고 싶은데, 어찌 되었든 깨어나기는 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수가 없는 걸까? 아니다. 자신이 꾸는 이 꿈의 종말을 계속해서 늘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꿈의 영생에 다다를 수 있다. 사라져가는 텔로미어의 끝을 되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대한 비간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뤄홍우에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세상이 밝아야 하는데 아직 어둡다. 심지어 이 밤은 영원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꺼지지 않는 불꽃과 멈춰버린 시계가 그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이런 오브제가 정지된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배경의 흐름에서 우리가 현실과 꿈을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뤄홍우가 영원한 밤에 만난 여인은 원나잇이라는 작은 불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밤은 영원하기에, 이곳에 있던 것들은 그렇게 계속 내버려진다. 그래서 이것은 원나잇이지만, 한 번의 영원함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영원한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허나 문제는 꿈은 꿈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꿈에 개입하는 것들이 우리 현실에서 따온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뤄홍우가 현실에서 그리워하던 여인은, 영원한 밤에서 만난 여인과 같지 않다. 그럼에도 뤄홍우에게는 그녀가 바로 ‘그녀’로 보인다. 현실과 꿈을 분간하기 어려운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는,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자꾸만 어둠을 연장하는 가운데에 벌어지는 일종의 ‘비몽사몽’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원한 밤의 뤄홍우가 여인과 사랑에 빠진 건, 오히려 현실의 그녀가 싫어서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에 대한 거부가 꿈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6.


이제 영화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볼까. 영화는 마지막에 이곳이 영원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걸 보여주는 오브제 중에, 꺼지지 않는 불꽃은 영원히 타오르는 사랑, 멈춰버린 시계는 영원한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그대로 읽어도 문맥적으로 이상하지가 않다. 바로 앞의 쇼트에서 뤄홍우와 여인이 스크린 너머로 사라졌으니 말이다. 예컨대 이 장면은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다. 리들리 스콧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극장판에서 그들은 유니콘을 목격하고는 어딘가로 도피하는데, 그 유니콘은 주인공의 꿈속에만 있던 사물이다. 즉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 시각적 일치를 통해 그의 꿈과 현실은 뒤섞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꿈속에 있던 게 현실에 나타났다는 점으로, 이 현실이 일종의 꿈이라는 점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이걸 두고 그가 인간인지 레플리칸트인지를 고민했었다. 허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가 이 세상이 꿈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는 모든 걸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마치, 이곳이 꿈이기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것처럼. 또는 이 밤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이 점이 <지구 최후의 밤>에서 비간이 의도하는 바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단순히 그런 일치 때문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2D로 볼 때 전반부와 후반부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3D로 관람할 때는, 그 구분이 확실하다. 예컨대, 그 3D라는 게 입체라는 점에서 평면보다 생생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뤄홍우의 꿈은 현실보다 생생한 것일 테다. 어쩌면 현실보다 생생하기에 꿈일 수도 있다. 다만 기술이 발전해가면서 현실보다 생생한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우리에게, 리얼리즘이 곧 허구라고 말하는 비간의 말은 ‘세상의 본질은 현실’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즉,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건 없다.


꿈이 현실에 아무리 가까워지려 한들 그건 결국 모방품에 불과하다. 우리는 현실을 기반으로 대안을 생각하기에, 모든 일의 근본은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복제와 모사에 관한 여러 의견을 끌어올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결국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어떤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불가항력에 가깝다. 그건 마치 아침이 오기를 거부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날이 밝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삶이 영화가 되길 원하지만, 영화는 우리보다 먼저 끝나게 되어있다. 그게 싫어서 시간을 자꾸만 돌려보아도, 그 결과의 종착지점이 변하지는 않는다. 깨지 않는 꿈은 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게 <지구 최후의 밤>이 영원한 이유이다. 우리가 아무리 리얼리즘을 말해도 최후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니 말이다.


이게 비간의 영화적 스타일이 서사적 흐름과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중국과 대만의 여러 리얼리즘 영화를 보아왔고, 그게 그 나라의 현실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간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눈을 돌리라고 우리에게 정중히 조언한다. 이른 아침에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듯이, 영화를 관두고 현실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무언가 시작된다고 말이다. 그게 지루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어떤 감정을 안고 있더라도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깨어있다. 그리고 영화가 그런 하루의 일탈처가 되지는 못한다. 낮에 자는 건 낮잠에 불과하지만 달콤하고, 밤에 자는 건 으레 당연한 일이기에 달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에서 깨는 것을 자의로 막을 수는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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