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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2. 2019

게임으로서의 영화와 콘트롤러로서의 관객


1.



영화와 게임의 관계를 논할 때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콘텐츠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며, 그동안 나온 영화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소닉 더 헤지호그>나 <명탐정 피카츄>처럼 기존에 유명했던 캐릭터를 실사로 살려보자는 성격의 영화가 있기도 했고,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이나 <어쌔신 크리드>처럼 매력적인 세계관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며, <사일런트 힐>이나 <반교 : 디텐션>처럼 전하려는 메시지가 확고한 발화의 시도가 있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을 단순히 게임 원작 영화라는 틀에 모아두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본래 영화의 경우에도 원안이 되는 콘텐츠가 무엇에 중점을 두는지를 명확히 하니 말이다. (<트랜스포머>처럼 본다는 것 이외에는 텅 빈 영화가 있기도 하지만, <로마>처럼 텅 빈 자신을 돌아보는 영화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게임 원작 영화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기존의 것들처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게임을 무언가의 원안이 될 콘텐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그게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게임이 하나의 문화적 콘텐츠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반대를 불러올 것이다. 허나 다르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게임을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따져 물으면 게임이란 곧 유희를 위한 도구이고, 그렇기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게임에 몰두하는 이들을 두고서 ‘도구’에 집착하는 바보라고 말한다. 즉, 게임은 삶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안마 의자 같은 도구일 뿐, 그에 몰두하는 이는 도구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영화사의 초창기에 영화가 단순히 구경거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최초의 영화는 정원에서 물을 주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과 같은 짧고 간략한 일상을 동전 몇 푼을 받고 구경시켜주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최초의 게임이라 알려진 <퐁>은, 본래 작업을 위한 도구였던 컴퓨터에서 짤막하게나마 유희를 제공할 용도로 제작되었다. 결국 게임은 도구에서 나온 도구였다. (그 결과로 <퐁>은 떼돈을 벌어들였다. 사람들은 이 짤막한 유희에 열광했다. 편리한 업무를 위해 제작된 컴퓨터라는 기기로 단지 일만 하기에는 너무 심심했던 모양이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게임 제작자들은, 이야기의 길이를 늘이고 음악과 일러스트 같은 것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그 몰입감을 높이고자 하였다. 여기서 핵심은 몰입감이다. 현실과 동일한 무언가라면 우리가 그에 흥미를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의 핵심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본원적 흥미를 추구하는 것이기보다는, 위험을 유예하고 나자 비로소 보이는 유희에 가깝다. 즉 그것은 안갯속에 자리한 신천지이다.) 이 과정에서 게임은 기존에 존재했던 매체가 밟았던 전철을 재현하게 되는데, 이 점이 흥미롭다.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는 일렁이는 그림의 환영(도트)로부터 시작하여 줄글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통해 세계관을 구축했고(이는 보드게임에 부록으로 제공된 텍스트북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동굴의 벽화에서 기록된 이야기로 이어지는 인류사의 초창기 모습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알려진 이야기 중에 가장 오래된 『길가메시』라는 고전은 석판에 기록된 문자였었고, 그것은 마치 흑백 모니터 위에 하얀 점으로 이루어진 게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며(이 석판은 뾰족한 물체로 점토를 찌르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진귀하게도 그 안에 어떠한 세계와 주인공이 있다는 점 또한 닮아있었다. (이 석판은 종이에 기록되어 소설이 되었고, 중간마다 삽화가 적용되는 방식으로 게임에서의 컷신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이후에 이러한 고전이 연극의 형태로 상연되는데, 이 모습은 다음과 같은 점을 떠오르게 한다. 때마침 발전한 컴퓨터의 그래픽 연산 성능이 3D라는 폴리곤의 구현을 가능케 함으로써 게임은 이제 2D에서 3D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2D에서 3D로 변한다는 건 그들이 현실에 가까워지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사진과 영화의 관계가 떠오른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2D 프레임에 담겨있다는 것이지만, 영화는 우리 현실을 그대로 목격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3D에 가깝다. (VR이나 3D 시네마 같은 건 훗날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게임은 사진에서 영화로 도약했던 그 시기를 넘어와 영화의 영역에 들어섰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게임이 영화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게임과 영화가 동일선에 놓이지 않음에도 그 과정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다른 환경에서 유사한 결론으로 수렴하는 수렴진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매체들의 수렴진화가 이곳에 응집된다. 게임이라는 매체는 우리 시대에 태어났지만 이전 시대를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게임은 코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글로 구현하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는 글에서 이미지로 변화하며 다시금 영상의 시대로 들어선 우리에게 그 중간에는 어떤 종이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중간과정이기도 하다. 예컨대 게임은 영화의 먼 친척이다. 그는 영화와 소설이 교배하여 태어난 아종이다. 여기서 게임이 영화의 아종인 것에는 그 출발선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는데, 글을 시각화하는 게 도스에 UI를 적용한 윈도우와 같은 프로그램에 빗대어진다면, 문자로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체험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게임은 ‘문자로 쌓은 세계’라고도 할 수 있어서다. 즉 영화가 시나리오라는 문자를 이미지로 구현해 세계를 구축하는 것처럼, 게임도 코드라는 문자를 UI라는 이미지로 구현해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그 틀이 유사하다.



물론 이는 여타 컴퓨터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글을 이미지로 구현한다는 점이 ‘소설이라는 글’에서 ‘이미지’를 떠올리는 우리의 모습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매체의 일원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나의 점으로 수렴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주가 빅뱅이라는 태초의 점으로부터 시작했듯이, 인류는 배아라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탄생했고, 게임은 도트라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영화는 목격이라는 카메라의 수렴적 아우라로부터 시작했다. 허나 앞서 말해두었듯이 이 유사점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일치나 대입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영화가 게임이 되는 것과 게임이 영화가 되는 것과 같은 부류의 교배이다.



2.



영화가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 게임도 영화가 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문장 중에서 후자는 다들 익숙할 것이다. 이른바 ‘시네마틱’이라 불리는 영상이 게임 안으로 삽입되고 있다. 이는 게임의 예고를 위한 트레일러를 뜻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임 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영화 같은 영상으로 보여주는 걸 시네마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게임이 영화의 방법론을 취하는 건 영화가 이야기를 전하기에 최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게임은 게임 자체만으로 몰입감을 주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닐 테다. 게임에서 영상은 어디까지나 보조에 머무르니 말이다. 즉 우리가 게임을 존중한다면 ‘저렇게 영화처럼 만들 거면 차라리 영화를 만들지 왜 게임을 만들었냐’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반대는 조금 흥미로운 것 같다. 영화가 게임이 되어 간다는 문장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화가 어떻게 게임이 될 수 있는가. 영화는 게임처럼 사용자가 직접 참여하는 매체가 아니다. 영화는 게임과 같은 몰입감을 주지 못한다. 또는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은지 100년이 넘은 것에 반해 게임을 예술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와 게임을 비교할 때는, 영화가 굳이 게임이라는 매체에 손을 내밀 필요가 있는지를 묻게 된다. (아무래도 게임은 영화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게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영화와 게임은 둘 사이에 어떠한 위계가 있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점을 묻지 않으려 한다. 다만 영화가 게임에 손을 내미는 게 과연 무엇을 빌려 오기 위함인지는 여전히 물을 수 있다.



영화가 게임의 방법론을 취한다고 말하는 게 어찌 보면 도발적인 문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게임이 갖는 장점이 플레이어를 자신이 구축한 세계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란 벽에 걸린 액자처럼 세계 안에 걸린 스크린이라는 평면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란 우리가 본질적으로 바라만 보게 되는 대상이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체득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영화를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여겨왔는데, 거울이란 곧 반사면을 대표하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그곳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거울을 보는 행위는 닿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집착 (나르시시즘)이 되며, 다가갈 수 없는 세계(『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를 대변하는 게 된다.



그러니 영화가 게임에 도움을 청할 이유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두는 차이를 대범하게 지나칠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스크린만으로는 영화가 관객에게 깊이 몰두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깊게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영화 자체에 귀의한 게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이렇게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에 흥분을 느낀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삶의 교훈을 얻고 삶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생성의 단초가 되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영화를 늘 대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영화의 대상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한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대상화하는 것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아쉬워야 할 이유는 있다.



게임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조작한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보통은 주인공과 캐릭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은, 우리가 게임 안에 진입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주체의 대리물이다. 주체의 대리물이 없다면 우리는 게임이라는 세계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며,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게임 안에서 현실에서의 자신을 숨기게 된다. 왜냐하면 게임은 주체의 대리물을 필요로 하기에 현실에서의 자신은 필요가 없고, 그 과정에서 과하게 몰두하면 현실에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고 게임에서의 자신만이 존재하게 된다. 즉 주체의 대리물이 역으로 주체를 탐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곧 피조물이 창조주의 위치를 점하려는 시도와도 같으며,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반역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게임을 두고 현실도피의 매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옳다고 볼 수 있는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부분이 영화가 하지 못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스크린을 경계로 세계의 안팎이 갈라지는데, 여기에서 관객은 스크린 안의 주체로 설정된 것을 조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기본적으로 짜여진(예고되었거나 정해진) 연극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영화에서의 주체란 감독의 대리물로서 우리가 관람을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경로와 대본을 지닌 채로 행동하는 콘티에 가깝다. 예컨대 그 주체는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을 모방하여 저격하면서 스크린 안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귀화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또는 그 반대로, 주체는 무대 위의 발레리나처럼 자신이 하려는 연기를 혼신을 다해 연기하고, 무대 아래 관객인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의 예술혼에 감명을 받는다. 즉 우리는 영화적 주체의 팬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적 주체를 총괄하는 플레이어가 바로 감독이기에 우리는 감독의 팬이 된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라는 온전한 주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크린을 보면서 단지 영화 밖에 존재하는 타자로만 남게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영화는 게임 세계의 주체를 스크린 안으로 데려오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게임에서의 플레이어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스크린(프레임)을 경계로 나뉘어있지만, 스크린 밖의 플레이어는 스크린 안의 게임적 주체를 조종하는 방식으로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즉 게임의 몰입감은 우리가 직접 그곳에 귀의하는 게 아닌, 게임 안으로의 대리자를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아바타>에서 원격으로 육신에 접속하며 닿을 수 없는 타자와 소통하고, 종국에는 그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건널 수 없는 경계의 한계를 회피하기 위하여 게임적 주체를 내세우며 영화 속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스크린 안에 모종의 주체를 설정해두고는, 관객이 그것을 조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에 여러 장치를 마련한 다음, 그 세계를 관객이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여기서 핵심은 관객이 직접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스크린 밖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방식이 관객 자신의 관찰에 의한 반사적 행위를 동반한다면, 스크린 안에서 스크린 안을 체험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세계에 견주어볼 때 어떤 느낌과 심상을 갖는지에 대한 반사적 행위를 동반한다. 즉, 게임적 주체를 만들어낸 영화에서 관객은 하나의 플레이어가 되어, 현실에서의 자유로움을 느낌과 동시에 (죽음과 같은 제약이 존재하지 않음. 본질적인 위험의 회피. 아바타이기에 본체에는 위협이 되지 않음.) 그 심상만을 온전히 취할 수 있다.



3.



죽음의 본원적 회피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두고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는 한다. 여기서 게임이라는 단어는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죽음이 우리에게 선고되지 않는다는 점에 적용된다. 예컨대 서사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다시 살아나는 인물이 있다면, 그에 이입한 우리는 정말로 죽지는 않지만 그런 식으로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에서 ‘신체가 아닌 시각에 선고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게임이 갖는 함의는, 영화적 주체가 맞이하는 비자발적인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돕는 게임적 주체의 시선이다. 이 게임적 주체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시각의 차단이 세계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주체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죽는 것이지 우리가 죽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조종하는 캐릭터에 이입함으로써 캐릭터로 향하는 발언이나 감정에 동화되곤 하지만, 그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 단절은 세이브와 로드, 시작과 재시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캐릭터가 우리의 명을 거역하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관계는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와도 같아서 일방적인 조종의 위계를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게임의 방법론을 빌려 온 영화는 관객이 세계 안으로 진입하지만, 그것이 관객에게로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준다. 비유하자면 관객은 항상 영화를 내려다보게 된다. 이것이 다른 영화와 게임적 영화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허나 그 무엇보다 영화가 게임을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것은 그 생생함이 이유일 것이다. 게임이 갖는 체험성은 우리가 그걸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소설처럼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영화처럼 목격에만 그치지 않는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수족을 대리하는 것으로 세계를 거닌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입력 도구, 눈이라는 광학적 재현의 도구, 여기에 우리는 VR과 같은 체험의 도구를 덧붙인다. 그러니까 이전이 스크린의 경계 너머로 우리의 수족(아바타)를 파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직접 스크린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되었다. 예컨대 이것은 세계와 세계 너머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이세계로의 소환을 거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시대의 판타지 소설에 소위 말하는 ‘이세계물’이 넘쳐나는 건, 그런 니즈가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일 테다.



이세계물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동떨어진 세계에 살게 되었음에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또한 그곳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평범한 주인공이 이세계로 가서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이세계로 넘어감으로써 주어진 현실문제에서 이탈하고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시각에 선고되는 죽음’ 정도로만 대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이세계물의 핵심은 우리가 그렇게 동떨어진 세계를 지금 이곳에 불러와 우리의 현실을 변화하지 않고서도 그대로 덧씌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게임의 방법론의 취한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게임의 방법론을 취한 영화는, 그렇게 동떨어진 스크린 안의 세계에서 우리가 현실문제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지만, 그곳에서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도록 종용한다.



영화라는 이세계는 분명 그 리얼리즘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현실과 다른 곳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들과 우리의 차단막인 스크린 너머로 우리가 직접 탐사를 나서더라도 우리가 가는 그곳이 탐사의 현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는 한, 영화와 인간이라는 매체 사이에는 본질적인 구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화라는 이름을 지울 필요까지는 없다. 영화는 영화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서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이따금이나마 만날 필요가 있으며, 그때의 만남에 보다 더 친숙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의 도로시가 그러했듯이, 간절한 갈망의 바램은 이세계로의 귀향을 제안하지만 종국에는 그곳에서도 어떠한 문제는 있고,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 우리의 육신이 직접 넘어가는 게 아니므로 분명 우리는 이곳에서 죽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런 육신에도 고통은 온전히 전달된다는 점에서 죽을 만큼의 고통은 느낄 수 있다. 결국에는 우리가 영화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단순히 목격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스크린의 밖에서만 머무르는 영화가 스크린이라는 본질적인 차단막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려서 어째서든 좋다는 느낌을 준다면, 스크린의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스크린의 안팎을 연결한 컨트롤러에 전달되는 진동과 같은 감정을 몸소 느끼며 영화에 자신을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시대에 매체는 점점 더 인간의 현실에 다가서려 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의 매체들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과거의 매체는 새로이 개발된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옴으로써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영화의 게임화도 아마 그런 시도의 일종일 테다. 물론 이러한 추론에서 기술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지 아니면 필요가 기술을 만들어내었는지에 대한 순번을 정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영화도 시대에 맞추어 나름의 시도를 한다는 것이며, 그런 유대에서 피어나는 공감과 동화가 영화에 몰입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3D 영화를 예매한다. 그리고 극장 안에서 고글을 쓴다. 스크린 밖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의 본체는 여전히 스크린 안에 있다. 그렇기에 이 시도는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다음으로는 4DX 영화가 등장했다. 이는 놀이공원에서 방법론을 빌려왔다. 그래서 이전과 별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는 이제 VR이라는 이세계로의 소환 도구가 등장했다. 우리는 이것을 머리에 뒤집어씀으로써 이곳에서 저곳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대리자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직접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아니기에 우리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체험의 마지막은 감각까지도 유사하게 재현하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는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거울 뉴런이라는 세포는 거울에 비친 것으로도 그 감정에 동화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볼 때 마음 한편은 아려온다. 게임적 영화도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영화의 스크린 안으로 직접 다가서야 하는 이유는, 스크린이 우리의 감정이입을 방해해서가 아니다. 직접 다가가서, 그 현장을 목격하는 게 더 깊은 통감을 끌어낼 수 있어서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우리 시대가 점점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과는 다르게(의학적으로도 그렇지만), 반대로 그 죽음이라는 감정에 가까워져야만 죽음에 직접 귀의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공감의 다른 이름은 현장에서의 목격이다. 그것이 체험이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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