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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8. 2019

디지털 시대의 밈과 필수요소가 영화보기에 미치는 영향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무엇이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그 제목처럼 생물의 발전은 유전자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겠지만, 그곳에는 ‘밈(Meme)이라는 문화적 개념 또한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에서 이기적 유전자라는 유전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문화에서도 그런 개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단지 유전자의 이기적인 행동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문화적 코드를 유전적 코드에 빗대어 만든 이 개념은, 문화 속에서 문화 코드가 어떤 방식으로 통용되고 살아남고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허나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밈이라는 개념이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어떤 돌림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밈’이라는 새로운 문화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본래의 의도에서 파생된 근래의 밈이라는 단어에 대한 적절한 한국어 번역을 찾아보자면, 필수요소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의 밈 개념이 정신분석학과 면밀히 얽힌 현대 사회의 광고 이미지와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면, 그에 파생된 필수요소는 본래의 맥락이 아니라 발견하는 이의 맥락으로 그 당락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컨대 필수요소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결정사안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필수요소란 보는 이가 그 이름과 역할을 지정한다는 점에서 전후의 맥락은 큰 필요가 없다. 물론 그것이 인기를 끌다보면 필수요소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전후 맥락을 파악하려 들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행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이는 짤방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고, 이는 아마도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전반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짤방이란 단어는 짤림방지라는, 텅 빈 게시물에 썸네일을 만들어주려는 용도로 시작했다. 단어 그대로, 게시판 주제에 맞지 않는 글을 올리면 글이 삭제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짤방이라는 개념이 자신의 맥락을 지우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짤방은 게시판의 주제에 부합하는 이미지와 그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텍스트를 연계하는 개념이었고, 그 과정에서 주객이 전도되어 텍스트보다는 이미지가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주제에 부합하지 않는 텍스트가 게시판 주제에 맞지 않기에 당연히 퇴출되어야 할 것이었던데 반해, 주제에 부합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형식상으로는 옳지만 본질을 파고 들면 어딘가 이상한 ‘동떨어진 이미지’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종국에는 게시판의 주제와 부합하는 이미지보다는 누가 더 신선한 짤방을 들고 오는지가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발전하던 인터넷 시기의 문화가 이유로 자리하기도 한다.



인터넷 시대의 초기는 나우누리나 유니텔과 같은 텍스트 위주의 채팅 및 게시물이 주류였었고, 시간이 흘러 인터넷이 조금 더 발전한 2000년대 초중반부터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의 업로드가 유행을 끌었다. 여기서 시작했다는 표현이 아니라 유행을 끌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텍스트로만 단조롭게 이루어진 게시물보다 아무런 사진이라도 들어간 게시물의 조회 수가 더 높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이 올리는 게시물에 아무런 사진이라도 꼭 첨부하고자 했는데, 이에 이용자들끼리 경쟁이 붙어 누가 더 기발하고 자극적인 사진을 첨부하는지를 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짤방이라는 이미지의 다수가 앞뒤 맥락 없이도 볼 수 있는, 또는 맥락이 없어서 더 재미있는 이유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개념에 의거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은데, 첫 번째로 글과는 다르게 이미지는 맥락의 형태로 존재하는 문법이 없다. 글을 쓰고 읽으려면 주어와 목적어로 연결되는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미지를 보고 연상하는 능력은 인간의 본연적 능력이자 글에 비하면 순식간이다. 말하자면 이미지는 조합된다기 보다는 연상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우리가 단어를 보면서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 주어와 목적어와 같은 문맥을 배치하는 반면에, 이미지를 볼 때는 그곳에 연상되는 다른 것들이 달라붙는 형태를 취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이미지를 보고 무언가를 연상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다만 그 연상의 절차가 심화될수록, 본래의 맥락에서 멀어지면서 비약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기가 더 쉬워질 뿐이다.



따라서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는 그것이 어떠한 정형성을 지니고 체계를 이륙하는지에 관한 논설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크리스티앙 메츠가 영화를 언어로 파악하려 했던 것처럼, 정형성과 체계는 문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언어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이다. (물론 메츠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이라는 언어 이전의 것을 언어 이후로 기록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광고와 같은 단편적 이미지에서도 내부에 배치된 이미지의 조합을 두고서 그것을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지를 구조로 만들어보려는 구조주의적인 흐름으로 진행된 일이었다면, 구조주의에서 벗어난 현재에는 그것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역설할 수 있다. 또한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어가 아닌 언어 이외의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말해볼 수 있다. 그게 바로 짤방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짤방이라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흐름에 위배되는, 하지만 그럼에도 즉각적으로 받아질 만한 수용성을 지녀야만 한다. 즉 짤방에서 중요한 것은 신선함이다. 세계 안에서 자신이 최초로 이 광물을 발견했고, 그것을 보석으로 가공해 내놓는 게 바로 짤방화의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보통 짤방은, 한번 보았던 것이라면 본래의 힘을 잃거나 퇴색된다. 그러나 그것을 아직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해서, 그것을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전파된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이것을 밈의 개념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예컨대, 짤방이 전파되는 것은 우리가 그걸 보고 유희하기 때문이 아니라 ‘짤방이 자신의 전파를 위해 수용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 아니냐는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짤방이 우리에게 있어 유희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이 도구를 사용하는 종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짤방을 유희의 도구로 여길 때 그것은 우리의 문화를 위한 도구로 여겨졌었다. 즉 짤방은 인터넷 문화를 설명하는데 부연으로 첨부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터넷 문화에서 그 이용자들이 필수로 알아야 할 짤방이 생겨났다. 그게 바로 필수요소다. 필수요소란 짤방의 발단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지점을 공유하지만, 짤방이 인터넷상에서 발굴되어 불규칙하게 유통되는 문화적 코드의 역할을 한다면, 필수요소는 사용자가 인터넷상에서 지정한 리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짤방이 본래 의미에서의 유전적 코드에 대입된다면, 필수요소란 문화적 의미에서의 밈에 대입된다.



우리가 아는 익숙한 필수요소에는 <야인시대>의 심영과 같은 게 있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왜 참석하지 않았느냐.”는 꾸중을 듣곤 했던 조세호 씨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필수요소라 함은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것이다. 조세호 씨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강조되는 건 참석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해당 단락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부재의 시그널이다. 이미지를 보고 연상하는 인간의 능력이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 참석의 신호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야인시대>의 심영을 살펴보자. <야인시대>의 64화와 65화에 단역으로 등장한 배우 김영인이 연기한 심영이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이 캐릭터는 본래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묻혀야 했음에도 인터넷상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내가 고자라니.”라는 단말마가 짤방으로 인기를 끌게 되어서다.



심영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 드라마 클립이 유행을 탄 것은 꽤 오래 되었고, 그게 현재까지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의 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영이라는 필수요소의 탄생과정이다. 심영이라는 캐릭터는 처음에 “내가 고자라니.”라는 대사를 외치는 장면이 동영상 짤방 형태로 유통되던 중,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는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필수요소로 등극하였다. 예컨대 지금 인터넷을 하는 젊은 세대 중 다수는 남성의 성기에 영향이 가는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심영의 얼굴을 떠올린다. 즉 그는 “내가 고자라니.”라는 대사에 얽힌 고통스러운 얼굴 이미지를 통해 고자되기(To be)라는 이미지를 획득했다.



이 경우는 심영을 연기한 배우가 있기에 인격모독이나 초상권 침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다행히도 김영인 씨 본인은 그에 대해, 과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그렇지만 다른 부분은 아무래도 좋다고 답변하면서 ‘요즘 사람들이 옛날 사람인 자신을 그렇게라도 기억해주는 게 배우로서는 큰 행복.’이라고 덧붙인 바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동일 드라마에 있던 다른 배우 김영철 씨의 김두한 연기가 간접적인 이미지의 수혜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배우 김영철이 연기한 <야인시대>의 2부 중에, 협상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협상 장면에서 김두한의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필수요소가 된 것이다. 이때 그 이유를 추측하자면, 4달러라는 금액을 고수하는 김두한이라는 캐릭터의 우직함이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하는 젊은 세대의 심리를 자극했을 공산이 크다.



심영이라는 캐릭터가 필수요소로 등극하면서, 이 캐릭터의 앞과 뒤가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생겼고, <야인시대>가 역사 드라마인 만큼 심영이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탐구하려는 긍정적 시도가 늘어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 작중의 김두한 캐릭터를 비롯한 다른 장면을 클립 형태로 따오며 <야인시대>라는 드라마 프렌차이즈 전체를 하나의 밈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야인시대>에서의 심영과 김두한은 그를 연기한 배우와 이미지의 분리를 겪게 되었고, 그런 점을 근거로 들며 김영인 씨는 ‘배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 것이었다.



반대의 측면으로는, 이러한 인터넷 문화가 필수요소라는 문화적 소비의 지참물로서만 소비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필수요소에 대한 인기는 필수요소라는 이미지에 응집되는 것뿐이지 그 본질에 관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이 필수요소를 소비하는 방식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닌, 그게 형성한 문화적 소비 행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해당 문화를 향유할 수 없기에 문화가 아닌 이미지를 취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미지를 대할 때, 해당 문화에는 이미지의 연상을 이루는 중심 축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에 이렇게 형성된 문화는 질적으로 공허한 빈 공간을 만들어내게 된다. 결국 이미지의 분리를 겪은 이상 그 두 개를 근본적으로 등치시킬 수가 없다는 점이 긍정적인 부분으로도 부정적인 부분으로도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짤방과 필수요소라는 인터넷 문화의 산물이, 그것이 몸담은 인터넷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밀레니엄 세대와 Z 세대의 특징이 개인주의와 같은 독립성인데, 이는 그 이전의 386세대에게 부여된 독립성이라는 성질과는 다르다. 386 세대의 담론이 주체와 객체라는, 중앙에 대항하는 주변부의 소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인터넷 세대는 자신을 객체가 아닌 개체로 칭하면서 마땅한 주체를 설정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중앙이 없고 점조직의 형태로만 자신을 규정하고 서로를 규합하는 형태를 띤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공통되는 것이 중요한데,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가 없다면 개체를 하나로 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떠올려볼 때, 단박에 떠오르는 게 없다면 그것은 자신과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학교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과 친한 또래를 모아 그들만의 축사를 벌이고는 한다. 그리고 인터넷 세대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모습은,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짤방이라는 형태로 포착되어 본류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미지를 두고서 주체와 객체가 아닌 개체로의 분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밈화되어 생존 및 전파를 위해 다른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필수요소의 모습은 개체에 근본적인 성격이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컨대 인터넷 세대가 무엇도 아니지만, 무엇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해진 소속이 없다면, 그것은 질적으로 공허한 공간일 테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지적해볼 수 있는 사안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 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보다는, 디지털 시대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인간의 사고능력이 본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파생되는 고리의 형태를 취했다면, 근래에는 문자에 걸린 하이퍼링크의 모음이 그 고리를 대체한다. 이전에는 책을 읽으며 모르는 개념이 있을 때, 그게 무엇인지 전후 맥락에 견주어 파악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곳에 걸린 개념적 연상의 고리를 따라가 제시되는 정보를 읽어내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사고의 확장에 제한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때 사용자는 자신이 정보를 탐색해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걷는 것에 불과하다. 즉, 정보는 해당 정보로의 연상을 유도한다. 말하자면 디지털 데이터는 우리가 그들을 더 잘 탐색할 수 있게되었노라고 선언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들의 독자생존을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디지털 데이터가 자신을 위해 수용자를 이용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이전처럼 그것을 수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영화이다. 밈이라는 것이 독립된 개체로 작용하며 자신에서 파생된 것을 연상의 형태로 방출한다면, 우리는 그걸 보며 유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사고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관객을 매혹시켜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부류의 영화이론이 아니다. 기존의 영화이론은 형체가 없는 영화라는 이미지에 관하여 간접적인 형태로라도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을 영화에 접근하는 방법론으로 설계했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밈, 짤방과 필수요소라는 이미지 소비의 형태들은, 그것들에는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서의 고리만이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공허함이 자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발신자 측에서 전해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신자가 이미지의 연상을 통해 끌려가는 이미지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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