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아이>는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그렇게 높은 흥행 수치를 얻지는 못했다. 국내 배급사 측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허나 영화 자체와 주변 기류에 대한 평가보다는, 전작의 인기가 워낙 컸기에 그 후광을 이겨내지 못한 감이 없지 않다. 이는 영화를 좋게 보는 쪽이나 나쁘게 보는 쪽이나 공통적으로 말하는 의견이다. 확실히 <너의 이름은>의 성공은 이례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성공했고,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미시적 카테고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겨울왕국>처럼 본작과 속편 모두가 천만 영화를 달성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사실은 그리 특별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의 이름은>의 이야기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대중성을 담지하지 않으면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물음을 던질 곳은 그런 대중성이 어떻게 하여 우리에게 공감을 얻었는지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부 하자면 길다. 그러니 생략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여길 만한 부분이 하나 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두 개의 나라가 있고, 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너의 이름은>은 예외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영화라는 예술은 문화와 언어를 가리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이 염두에 둔 것은 문화도 언어도 아니다. 이곳에는 닥쳐오는 재앙과 남겨진 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공헌한 만큼 그것은 추리가 아닌 사실이다. 따라서 <너의 이름은>을 현실 세계에 벌어지는 재난서사를 가상의 무대에서 재현한다고 보아도 상투적이거나 뻔하지 않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날씨의 아이>에서 벌어지는 재난서사는 <너의 이름은>의 그것과 동일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별개의 작품이기에 그 둘을 동일선에 올려두는 건 옳지 않을 수 있다. 허나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의 사실상의 후속편이라는 점에서 이 논의는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 사이에 재난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고, 그런 점에서 <날씨의 아이>는 대중성을 담지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품성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평가가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의 후속작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르문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영화는 대립항으로 자리한다. 가장 먼저 지적해볼 수 있는 건 <날씨의 아이>가 재난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들은 재난을 응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날씨의 아이>가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는 영화가 재난이 벌어지는 세계를 대하는 화법과도 닮아있다. 즉 <너의 이름은>이나 <날씨의 아이>나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가 미츠하를 구하려던 이유가 그 재난으로 미츠하가 사망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츠하와 주변인이 그 재난과 별 관계가 없었다면 그때도 재난에 간섭했을지와 같은 의문이 남는다.
쉽게 말해 <너의 이름은>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 중, 다른 하나를 실현한 게 <날씨의 아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가 세계에 대항했던 것은 세계에 속한 미츠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미츠하는 세계의 종속항으로 보아야 한다. 반대로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쪽의 인물이다. 작중에서 설명되듯이 히나는 예로부터 내려온 날씨의 무녀의 힘을 물려받았고, 그것은 도쿄라는 장소의 지리를 바꾸어놓을 정도의 힘이 있다고 언급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둘 만의 세계를 전제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히나의 힘은 세계의 문법을 바꾸는 힘이다. 보통 장르문법의 변주가 영화 바깥으로부터 시도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선택은 다소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것 또한 장르문법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변주의 주체가 영화 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는 의의가 있다.
<너의 이름은>이 벌어진 재난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면, <날씨의 아이>는 벌어질 재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서사는 방향이 다르다. 그리고 이는 세계의 주체가 인간의 안에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밖에 있는지와 같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먼저 <너의 이름은>은 몸 바꾸기라는 전통적 장르문법 아래에서 시공간적 차이를 세계의 동질성으로 극복한다. (즉 이 영화에서의 몸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과정에서 무스비와 같은 강조가 강박적으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아마 그것은 영화 나름대로 연대를 요청하는 것이었을 테다. <너의 이름은>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마을공동체에 울려오는 비상벨이 음악과 겹쳐지는 장면은 어느 한 사람의 행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점이 재난을 대하는 태도는 개인이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타키와 미츠하의 시간이 다르니 실질적으로는 다른 세계이겠지만(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에 닥쳐올 재난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가 연결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너의 이름은>은, 영화와 관객의 시간이 다를지언정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곳에 닥쳐올 재난을 당신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영화다. 또한 이러한 호소가 일본에 통했고 부차적으로 한국에서도 통하게 된 것은, 재난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된 몇몇 사실이 영화 안의 문법과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과 한국이 공간적으로 다른 곳에 있으므로 그 둘은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공간은 곧 세계이기도 하다. 이게 세계(세카이)라는 장르의 문법이다. 그리고 세계와 공간을 같은 의미로 둔다면 그곳에 남는 건 시간이다. (국가는 다르지만 슬픔은 같다. 공간은 다르지만 시간은 같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간명한 메시지. 잊고 싶지 않은 공간, 잊어서는 안 되는 시간. 공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모하게 되고, 시간은 기억의 너머로 사라지게 된다.) 이때 재난이라는 현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작용하는 게 시간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의 1초와 재난에서의 1초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 일상에서 1초는 인식하지도 못하고, 무의미하게 흘러가기도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재난에서의 1초는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시간이다. 더 나아가서 바라보면 공간이 응시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재난이 벌어진 전후의 시간을 비교해볼 때, 주체가 떠나온 자리는 공간적으로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되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상이라는 생활 속의 한 카테고리가 재난이라는 현상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함에도 모든 것이 부재하는 이상한 세계가 되어버린다.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가장 큰 힘이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영화라는 현실과는 달리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은 나로 지정된 타자를 숨김없이 투영하기에 적합한 매체이다. 영화가 언어 이전의 것을 담는다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 이전의 것을 담는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가장 근원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가 언어를 분자적으로 세계에 흩뿌린다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를 몰적인 것으로 채운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단어는 둘 중 무엇을 택해도 이상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이 영화에 가깝다면 <날씨의 아이>는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너의 이름은>이 만연하는 세계라면 <날씨의 아이>는 차오르는 세계다. <너의 이름은>에는 알 수 없는 재난의 신호가 팽배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면 타키는 이미 미츠하를 잊어가는 상태다. <너의 이름은>이 강조하는 이름과 운명의 가치는, 우리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고, 기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반면 <날씨의 아이>는 그런 세계로부터 추방된 아이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이곳에는 이름과 운명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이라는 측면으로 보면, 미츠하에게는 선택권이 없지만 히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이는 그들이 몸담은 무녀라는 직업에 얽힌 사연을 영화가 말해주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미츠하에게 몸이 바뀌는 행위는 운명이다. 그러나 히나에게 몸이 바뀌는 행위는 운명이 아닌 선택이다. 신사를 지키는 노인이 벽화를 보며 말해주듯이, 세계(도쿄라는 공간)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그렇다면 인간의 선택에 따라 이 세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공간의 가치는 <너의 이름은>처럼 무스비라는 운명이 아니다. 분자적 세계에서 중요시되는 게 시간의 응집이라면 몰적인 세계에서 중요시되는 건 시간의 파편화이다. 왜냐하면 재난의 고리가 분자형태에서 물방울의 형태로 합쳐질 때, 그것은 재난이라는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난이 차오르는 세계에서는 개인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나로 응집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의 개인은 몰적인 것에서 분자적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게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부분이다.
<날씨의 아이>의 결론이 물에 잠긴 도쿄의 모습으로 끝나는 건 장르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부분일 수도 있다. 두 사람만을 위해 모두를 포기하는 선택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기적인 생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너의 이름은>의 연장선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 외적인 사실이지만 도쿄의 방사능 수치는 체르노빌 격리구역의 방사능 수치와 같다. 이 사실은 도쿄가 체르노빌만큼 위험하거나, 체르노빌이 도쿄만큼 안전하다는 두 개의 해석을 낳는다. 허나 이 해석 이전에 자리하는 것은 도쿄나 체르노빌이나 결국에는 지구라는 공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그 방사능 수치는 평범한 축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곳은 도쿄와 체르노빌이다. 서로 다른 세계라 할 수 있는 일본과 우크라이나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면, 그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현재가 일본의 현재가 될 수도 있었다는 가정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맥락은 <너의 이름은>의 서사처럼 그것이 두 개의 재난이 아니라 하나의 재난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위치한 시간은 다르더라도 세계는 동등하다. 이것이 <날씨의 아이>의 시작이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인 도쿄인 이유이다.
<너의 이름은>의 마지막은 타키와 미츠하가 도쿄의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모습이다. 영화 내내 미츠하는 도쿄로 가고 싶어했고, 이는 도쿄로 가면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내내 자기도 모르는 구원의 신호를 발산하고 있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것은 그렇게 파편화된 시간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타키와 미츠하가 주인공이기에 그 부분이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종국에는 개인의 힘만으로 극복되는 재앙은 없다고 말하는 영화다. (타키와 미츠하에게 친구들이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런 신호를 응집하는 게 타키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재앙의 징조를 응집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그 세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너의 이름은>은 희망을 말하는 듯 보였지만,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결과론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그곳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지의 문제가 이곳에 남는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는 전작이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일종의 ‘To be Continue’다.
<너의 이름은>에서 응집의 주체가 타키라는 점은, 이 영화가 도쿄라는 공간을 정확하게 호명함을 말해준다. 굳이 도쿄일 이유는 없지만, 도쿄가 나라의 중심이라는 점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중심이라는 말은 공간의 측면으로 볼 때 주변부를 통솔할 권한을 지닌다. 수면의 중앙에 돌을 던지면 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컨대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라는 지명은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다. 그리고 두 영화가 각각 영화와 애니메이션 장르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영화에서의 도쿄란 언어 이전과 이미지 이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 즉 <너의 이름은>이 인간의 속살에 주목한다면 <날씨의 아이>는 도시의 속살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너의 이름은>은 언어라는 신체에 구애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신체의 교환이라는 직접적인 교류 장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도쿄라는 이미지가 수분으로 가득 찬, 비가 오는 일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몰적인 세계이고 그들의 시간은 파편화되어있다. 히나가 찾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타키였다면 그들의 시간을 하나로 모아 재난에 대항하자고 말할 테다. 하지만 이곳에는 호다카가 있고, 그는 공간을 공유하기에 시간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호다카는 이 희생제의에 반대한다. 그에게 있어 공간/신체를 제물로 바쳐 공간/신체를 되찾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히나가 사실상의 문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히나의 붕괴는 곧 문법의 붕괴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언어가 담긴 신체가 붕괴하고 남은 자리에는 이미지라는 언어 이전의 형태가 남는다. 그런데 호다카는 이미지가 아니라 언어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혹은 이제 곧 다가올 이미지 이전의 세계에서 나로 지정된 타자를 마주하기가 싫었을 것이다. 호다카는 히나를 만났고,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진 이상 히나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즉 호다카에게 도쿄란 히나라는 인물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언어에서 이미지로 취향이 변화하는 호다카라는 이의 사랑극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일례로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와 히나는 서로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의 나이는 정확하게 추론되지 못한다. 숫자로 표현되는 나이가 언어의 그것이라면, 이 영화에서 언어는 배반한다. 히나가 나이를 속였고 호다카는 중반까지 그걸 알지 못한다. 예컨대 이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호다카카 히나의 나이를 알아차리는 대목이다. 호다카는 히나의 진짜 나이를 알고는 자신이 연장자로서 지켜주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호다카가 히나라는 사람을 이미지가 아닌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너의 이름은>에서 비상벨이 마을에 울리는 장면의 전후로 존재하는 타키/미츠하가 산 위로 뛰어가거나 내려오는 맥락이 이름을 잊어서라도 기억하고 싶은 누군가의 존재, 즉 언어 이전의 무언가가 이미지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라면,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는 정반대다. 이곳에서 호다카가 히나의 나이를 알아차리고 그녀를 희생제의로부터 구원하려고 달려가는 장면은, 자신이 그동안 알아왔던 게 사실은 언어 이전의 무언가에 대한 지지가 아닌, 이미지 이전의 무언가에 대한 지지였음을 깨달았다는 걸 보여준다. 즉 이 장면은 분자적 세계관이라는 나, 그렇게 지정된 타자인 몰적인 세계, 여기에 몰적인 세계를 마주한 분자적 세계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호다카는 히나를 언어의 맥락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호다카의 취향은 영화인 것 같지만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여기서 애니메이션은 자신이 추구하는 시간의 파편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은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으로 변모한 세계에서 개인의 시간은 캐릭터라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쉽게 말해 그들에게 부여된 언어를 잃어버리고 이미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러한 점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잘 증명된다. 어떠한 대상이든 간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가 된다. 인터넷은 점이라는 분자적 형태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점묘화의 형태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즉 인터넷은 몰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점이 이미지/기호의 제국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과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미지를 기호라고 부른다. 그렇게 기호가 된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영화라는 타자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적 이미지를 통해 캐릭터화가 진행된 이미지 이전의 무언가이다. 이 변모에서 개인의 시간은 오히려 응집되어버린다. 바로 그렇게 재난이라는 시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세계의 이름으로 변모한다. 이때 사람들은 그러한 재난에 대해 세계의 시간만을 보게 되고 개인의 시간은 간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간과는 의도했든 간에 의도치 않았든 간에 세계의 시간에 잠겨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예컨대 호다카는 그런 시간이 하나로 응집되어야 행복하다고 믿었었다. 다르게 말해서 그게 바로 호다카와 히나의 공동 사업이 사람들에게 날씨를 되찾아주는 것인 이유이다. 허나 분명 이 선택은 잘못되었다. 날씨라는 세계를 직면하고 나면 히나라는 개인의 시간은 사라지고야 만다. 세계 안에 개인이 자리함에도 세계를 구하는 것으로 히나를 구할 수가 없다. 이는 세계를 구하는 게 미츠하를 구하는 일이었던 것과는 방향이 다르다. 하늘과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히나에게 세계의 구원은 곧 자신의 상실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이곳에서 하늘이라는 공간은 히나라는 신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나라는 신체가 붕괴하고 나면 그곳에는 맑은 하늘의 이미지가 남을 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이미지화된 시간을 두고서 날씨가 맑아졌다고 착각하며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갈 테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결국 호다카의 선택은 이것이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호다카의 선택은 낭만으로 끝나는 <너의 이름은>의 결말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화가 되려는 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션이 되려는 영화가 안고 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