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제국의 물질과 기억

by 수차미



하라 케이이치는 좋은 의미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고리타분하거나, 심지어는 꼰대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그는 강한 애착을 갖는다. 여러 작품을 볼 것도 없이 그가 손댄 짱구 프렌차이즈 작품을 본다면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핵심 단서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짱구’라는 개구장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봐도 재밌지만, 이 영화의 초점은 영화관 밖을 향해 있다. 비평가들이 으레 말하곤 하는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인간의 기억을 물질로 칭할 수 있다면,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로 변하고 있다. 물화한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물질로 잡힌 기억들이 안쪽에 있다면, 그들이 본래 자리했던 바깥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마치 우주처럼 외부가 진공으로 남겨진다. 그곳엔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구를 벗어나면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떠올리고 추억하는 것들은 모두 지구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라 케이이치는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 거대한 돔을 짓는 것으로 자신의 이론을 실험한다. 이곳에는 과거를 향유하는 이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우주에 사는 외계인처럼 그들에게 추억을 남긴 지구를 떠나왔다. 동시에, 지구의 탁한 공기가 있으면 숨쉬기 어렵게 되었다. 지구인들에게 이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구 입장에서 우주는 진공이기에 ‘숨쉬기 어려운’ 곳인데, 오히려 외계인들이야말로 지구를 어려워하니 말이다.


이 대목에서부터 영화가 기억의 외재성이라는 주제의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억이라는 건 우리의 과거,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면 ‘안쪽’에 자리한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라 케이이치는 그것이 우리의 안쪽이 아닌 바깥에 자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깥에 자리한 것들은 붙잡으려 해도 계속해서 멀어진다. 이 점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공상과 닮아있다. 기억은 무겁게 태어나 옅어져만 가는 물질이다. 결국 언젠가는 하늘로 날아가 우주 너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런 물질에 빠져버린 이들은 현실로부터 두둥실 떠올라 우주 너머로 날아가고자 한다. 거대한 돔 안을 살아간다는 프로젝트가 현실성이 없어보이면서도, 동시에 모종의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과거를 추억하는 향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영화라는 물질 자체에 대한 공상이라는 지적을 피해 가기도 힘들다. 스크린에는 후각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기억이라는 물질은 현재의 안쪽이 아닌 위로 떠오른다. 따라서 우리가 후각에서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스크린 안에서 영화관 밖으로 향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프루스트의 마들렌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결말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중간의 과정들이다.


골다공증은 노화에 따라 뼈에 구멍이 뚫리는 질병이다. 나이가 들며 기억능력이 퇴화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뇌에 구멍에 구멍이 뚫리는 질병이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우리가 의사는 아니니 세세하게까지 알 필요는 없고, 사라져가는 기억이 그런 식으로 ‘가벼워져 간다’는 점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죽었을 때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그런 추상이 반영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비유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이 영화의 서사가 치매노인의 질병경과처럼 짜여 있다는 점이다.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아이에 가까워져 간다고 흔히들 말하곤 한다. 기억 능력도 어린 시절과 유사하게 변한다. 어린 시절만을 떠올리고, 그때의 길고 긴 시간관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정확하게는 그 골목의 끝자락에 죽음이라는 막다른 곳이 있다. 돔 안의 시간이 늘 해질녘 노을로 고정되어 있는 건 노년이 죽음이라는 밤으로 향하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짱구 가족이 쫓겨 다니면서 결코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는 것도, 그들에게 삶의 끝자락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하라 케이이치는 짱구 가족을 자택으로 불러내는 켄의 모습을 핵심 쇼트로 설정한다. 이것이 작품 전체에서 핵심인 건 바로 그곳에 오즈 야스지로가 있기 때문이다. 책상을 수평으로 하여 눈높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 짧은 장면은, 영화감독의 흔한 오마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의미는 폭이 넓다. 먼저, 오즈 야스지로가 스튜디오 시대의 감독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당시 스튜디오는 고정된 멤버로 몇몇 스타 배우를 스타처럼 맞이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 점이 각 반 구성원 그대로 소학교를 졸업하는 학교 시스템과 맞물려 유년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다르게 말하면,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는 더는 같은 공간을 향유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 모습이 유년의 기억에 균열을 만들어낸다면 이후 (포스트~)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곳은 가벼움을 만들어내는 부유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두려움을 느낀 이들이 시간의 안쪽으로 가려는 것도 이해될 만하다. 가장 안쪽으로 향할수록 압력은 높아진다. 기억이 사라지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오래도록 품어두려고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런 면에서는 스크린이 갖는 프레임의 형성이 기억을 담아두는 봉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순간’이라는 미명이 아니라 ‘포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뉘앙스가 더 잘 살아난다. 휘발되려는 걸 잡아두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사실은 그게 사진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과거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과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준선이 명확하다는 뜻이다. 선을 긋는다는 표현이 영화가 표방하는 운동 에너지의 선적인 흐름에 적용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180도 규칙이라는 금, 불가시편집이라는 리듬, 이 선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영화가 갖는 운동 에너지를 잘 표현해준다. 시간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시간과 운동을 영화에서 논할 때 그 둘을 명확히 분리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과거와 단절하는 지점에 명확히 서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일본 영화이기에 언급하는 것이지만, 일본에는 연호라는 한 시대의 구분 같은 게 있다. 천황의 재위기간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인데, 엄청 낡아보이지만 공문서에도 여전히 병행표기되고 있다. 여기서 뭔가 시간 운동을 끌어낸다면 시작지점은 부드럽게, 종결지점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중략하자면, 일본 경제 부흥의 한 시기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시작’이 아닌 ‘종결’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이상하다. 더 나아가면 작품 전체가 그런 식의 이상함에 사로잡혀있다는 게 기억의 외재성이라는 주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안에 인용된 오즈를 오마주 이상으로 본다면, 이런 감독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오즈의 작품 스타일이 후대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즉 오즈는 선례로 남았고 그래서 오즈는 다시 나올 수 없는 감독이다. 마찬가지로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건 다음 것을 고대한다기보다는 이전 것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아쉬움의 뉘앙스가 더 강한 것 같다. 다음 날에도 해는 뜬다고 말하는 건, 거대한 돔 안쪽이 언제나 해질녘 노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정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바깥은 분명 있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이 돔은 정말로 이상하다.


영화를 보는 입장이라면 밖에서 안을 투사하는 게 되므로 우리는 돔 밖에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은연 중에 영화의 안쪽에서 밖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에 젖어서 영화의 밖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후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후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러니함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점이 작품이 개봉한 2001년이라는 시기가 갖는 지정학적 특성이 아닐까 싶다. 단순화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소위 말하는 1980~9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이 지나간 자리에 ‘포스트’의 ‘포스트’가 등장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기막한 일이다. 이후의 이후를 상상하니 모든 게 사라졌다. 음에 음을 곱하면 양이 나오는 것과 유사한 이치인 듯싶지만, 경제 부흥 시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모든 게 사라진 현재는 그런 과거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남기는 운동 에너지는 수직의 방향으로 잔상을 남긴다. 짱구는 악당을 붙잡으려 탑을 뛰어 올라가는데, 미래를 구한다는 점에서 미래로 달려가는 것만 같지만, 이 기억의 바깥이 우주와도 같은 진공 상태라는 게 그런 가정을 거부한다.


이는 악당들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방식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전에 말한 오즈 야스지로의 수평 쇼트가 위나 아래, 어디에도 시선을 두는 게 아니라면 그건 모호함의 다른 표현이다. 이때 악당들은 과거를 흩뿌리려는 의도를 미래로 두고 있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승한다. 그러나 그게 좌절되자 기억의 가장 순수한 에너지인 중력에 의존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지구 바깥의 검은 우주보다는 지구 안쪽의 검은 사후세계가 더 현실적인 장소이다. 이 점이 영화의 안쪽으로 파고들 수 없는 우리 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운도 그렇게 남긴다.


다른 영화는 또 어떨까. 실은 이 영화를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하라 케이이치의 다른 영화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에는 <어른제국의 역습>과 유사한 장면이 하나 나온다. 맥락이 많이 다르지만 이 영화에는 짱구가 탑을 올라가듯 쿠가 탑을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주제의식이 다르므로 이 모티브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기는 힘들지만, 하라 케이이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라 케이이치에게 탑은 기술이나 시대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아래로부터 위라는 시간의 흐름에 관계되어 있다. 이는 삼백년 전 에도시대에서 현대로 떨어진 작품의 설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기적처럼 과거로 돌아가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쿠는 동족을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마지막에 본 갓파는 백 년 전이었다.”는 말만을 들을 뿐이다. 이런 묘사를 보면 하라 케이이치에게 과거란 멸종된 무언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바라본 타임머신이 과거에서 미래로만 가능한 것처럼 영화를 일종의 타임캡슐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캡슐 안에는 진한 기억이 밀봉되어 있고, 가정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밖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이다.


<어른제국>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다거나, <갓파 쿠>처럼 동족을 다시 만날 수 없다거나 하는 비가역성이 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게 하라 케이이치라는 사람의 가치관이다. 이런 점이 그가 존경하고 자주 인용하는 오즈 영화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기에 직접적인 대응은 불가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물화된 기억에 무게감을 두는 방식으로 부모의 무게를 표현하는 반면에, 하라 케이이치는 그런 무게를 자녀 세대에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게 오즈 야스지로의 고전 시대와 하라 케이이치의 포스트 포스트 시대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제를 좀 전환하자면 가장 최근에 우리가 겪은 포스트가 바로 코로나 19 사태이다. 이 사건이 끝난 후에 많은 것이 바뀌리라는 사실을 미리 예견하는 시대가 역사상 여러 차례 있었는데, 최근에는 <어른제국>의 2000년이 그것이고 이후에는 코로나 19사태이다. 둘 간의 차이점은 기술이 결합되어 있다는 게 있다. 2000년대가 기술이 가져올 종말이 모종의 희망처럼 여겨지는 ‘세기말’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코로나 19 사태에서 기술이 가져온 희망은 구시대에 완전한 종말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스마트폰이라던가 하는 게 구시대와 신시대를 막연하게 연결해두던 상황에서, 완전한 종지부를 찍은 게 코로나 19사태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 논의는 여기서 끝을 내야 할 것 같다. <갓파 쿠>도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여러 방면으로 논지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삶이 고달플수록 무게를 갖는 기억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고도화될수록 개인은 점차 점으로 수렴하기 마련인데, 이런 개인주의가 존재의 가벼움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불안이 무게에 대한 집착을 부른다.


물론 영화에 천착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에 기억을 부여하는 작업이 물질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굉장히 위험하다. 정확하게는 영화에 얽힌 기억을 물질로 만들어 사고파는 시장에 관한 이야기다. 쉬운 말로 하면 취향을 사고 하는 것쯤이 아닐까 한데,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취향을 갖고 살아가려는 이들이 <어른 제국>의 돔 안에 살고 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뭔가 감동을 얻거나 하는 게 아니라, 공유될 수 없는 추억이 공유되고 있다는 게 이 현상의 전체주의적 기괴함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라면, 속을 비우고 남은 텅 빈 기억을 방어해야만 하는 근래가 유독 슬프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대사를 하나만 가져와 보고 싶다. <어른 제국>에서 어려진 짱구 아빠가 “그냥 돌멩이가 아니라 아폴로가 달에서 가져온 돌”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과 외계 안에 자리한 우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유심히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fL86bdiPl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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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 아빠 신형만의 성우, 오세홍과 후지와라 케이지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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