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풍광으로서의 바이올렛 에버가든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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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고향인 19세기 유럽의 풍경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자본주의라는 꿈을 동반한 새로운 잠이 유럽을 덮쳤고, 그 잠 속에서 신화적인 것들이 부활한다고 말이다. 벤야민은 이에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시선에 성찰적 태도를 부여한다. 정직하게는 ‘주마등’ 맥락적으로는 ‘환등상’으로 번안할 수 있는 이 용어에는, 당대를 이미지로 지칭하면서도 다음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변증법적 의도가 담겨있다. 동시에, 우리 삶의 마지막 지점에서 삶을 회고할 때 스쳐 지나가는 게 바로 그 환등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떠한 위기를 가정한다는 추측이 성립 가능하다. 벤야민에게는 거대한 잠의 끝자락에 닥쳐올 전쟁의 광풍이었을 텐데, 반대로 말하면 이 거대한 꿈속에 자리한 신화적인 것들의 모습은 폭풍 속의 고요와도 같은 이미지 상징물을 대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폭풍 속의 고요에서 파국을 추려내는 단서를 유추해내는 건, 유수한 탐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벤야민에게는 항상 지금-여기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역사철학테제』를 통해 강조했듯이, 과거가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지는 어떤 기회에 그것을 ‘반드시’ 포착해야만 한다. 여기서 재탐색되는 환등상의 이미지란 단순히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불과한 필연적 차례가 아닌, 역사의 징후로서 우리가 포착해낼 수 있는 일종의 ‘표지(index)’이다. 이때 이 표지는 메시아니즘에서의 구원자 형태로 세계에 도래해 우리가 그를 포착하는 순간 과거의 환등상을 타임라인의 가장 끝자락으로 데려다 놓는다. 예컨대 구원의 신호는 우리가 인제까지 결코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래의 순간에는 아주 확실히 사로잡게 되는 자기 반성적 환기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의 사실들이 현재의 우리를 신화적 풍경으로 밀어 넣을 때 그 거대한 꿈속의 것들은 환등상, 변증법적 이미지가 되어 우리에게 잠의 끝자락을 암시해준다. 단지 암시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에 떨며 도래할 반성적 환기의 순간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이미지란 단순히 특정한 단계, 시대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다가올 암시 속의 환기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현재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함께 살아가던 이들에게서 자욱한 안개가 걷혀지고 그 안에서 자기 반성적인 면모가 발견될 때, 비로소 우리가 그들을 비평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지라는 한계를 살아가기에 늘 위기를 마주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한계를 자기 반성적 의미로써 사용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았던 과거는 유한한 반면, 기억된 과거는 무한하다.”는 벤야민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베를린 연대기』에서 인용.) 영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면 기억이 아닌 생으로의 의지를 표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단계인 것이다.


2.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이미지는 에펠 타워라는 표지이다. 작중에 인서트 쇼트로 도입과 결론을 두 차례 걸쳐 마무리 짓는 이미지에서 창가의 노파는 다음처럼 말한다. “언제쯤 완성되려나.” 처음에는 ‘흉측한’ 철골 구조물에 의구심을 품던 노파에게 심정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작품의 서사와 연결되는 대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파의 해당 발언이 시사하는 건 작품 바깥이다. 왜냐하면 에펠 타워가 파리 만국 박람회라는 ‘지난 세기’를 되돌아보는 장소이자,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거짓 같은 풍경’에 대한 환상이자, ‘흉악한’ 철골 구조물의 모습처럼 닥쳐올 1,2차 세계대전 시기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품 전반의 이야기를 증착하기 위한 도입의 인서트 쇼트와는 달리, 마땅히 작품 내에 자리할 곳이 없는 결론의 인서트 쇼트는 작품이 지시하는 현실과 그곳으로부터의 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


현실 역사에서, 벨 에포크라는 자본주의의 안개 아래 거대한 신화적 형상으로 자리한 이 에펠 타워는 역사가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역사에 비준하여 작품을 바라보는 걸 경계해야만 한다. 작품은 자체적으로 폭풍 속의 고요를 유추해내고 있고, 그에 따른 미완의 시기를 예비하는 것이야말로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도 이미지 유추에 따른 환기를 시도할 기회가 된다. 예컨대 우리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의 현재와 우리의 현재를 일대일로 대응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곳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정된 과거로서 우리의 현재를 예비하는, 동시에 중간마다 무수한 변증법적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환생을 겪을 만한 사유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에펠 타워의 운명은 흉악한 것에서 파리의 상징으로 변모하는 환생의 절차를 갖는다. 이때 우리는 에펠 타워가 탈바꿈할 기회를 노렸다거나 포착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곳에 파리의 지표로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을 뿐이다. 작품이 에펠 타워라는 중심적 이미지를 통해 쏘아 올리는 신호는 강철 의수를 한 가녀린 소녀에게로 집약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흔히들 묘사되는 ‘가녀리지만 강인한’ 여성 전투원은 ‘흉악하지만 아름다운’ 철골 구조물에 비견되고, 동시에 이미지를 광학적 전사(optical transcription)처럼 겹쳐놓음으로써 소녀를 역사의 대변자로 만든다. 물론 소녀는 역사에 소속된 이로써 역사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런 간극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과 시대 사이에 변증법적인 다리를 놓을 수 있게 한다.


3.


현실 역사의 19세기 말에 그토록 자연스러운 의수를 만들 기술력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가 작품을 바라보는 것에 어떤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갖는 상반된 지위이기도 하다.) 전쟁이 막 끝나고 풍요가 도래한 시기를 적극적으로 묘사하는 이 작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꿈속에서 신화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 자체의 꿈 성질을 고려하면, 넷플릭스 자본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자본주의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신화적 풍경들, 그렇기에 우리가 발견하는 소녀의 의수는 지극히 신화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지표가 된다. 이 지표를 통해 우리가 집약하는 것은 전장을 겪은 소녀에게 주어진 기억의 흔적들이다. 이 기억의 흔적 안에서 그녀를 응집시키는 것은 사랑의 상대인 소령이고, 트라우적 형상으로 유출되는 이미지의 풍광은 이곳이 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아마도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는 관념이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 우리의 사고를 가로막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가 품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신체의 최전선에 드러나는 은빛 의수의 비가역적인 성질과 전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보면 개인과 시대를 마치 과거와 현재의 관계처럼 동떨어뜨려 놓은 의수와 에펠 타워 배치를 통해 작품이 의도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은빛 의수가 갖지 못한 촉각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적 의미에서 촉각이 의식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영역을 받아들이는 돌기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소녀의 의수가 사랑을 통해 매개됨은 작품이 의수를 그런 기술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우리가 이 의수를 바라보는 위치는, 내딛는 것으로의 현실이 아닌 과거와 이어진 현재가 되어야 한다. 역사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 의수는 시기상으로 전혀 있을 수 없고 심지어는 현재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법한 이미지이지만, 반대로 과거와 이어진 현재로서 이 의수는 기계에서 인간으로의 기술사를 실현하는 게 되니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이 기계와 일체화하려 시도했던 게 어느 시기쯤인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넓은 범주에서, 기술이 가져다준 삶의 기술사는 사진이 발명된 이후로 펼쳐진 광학적 무의식의 지평 안에 있으며, 광학적 무의식이 우리 시각의 기술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소녀의 의수에서 ‘촉각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얇게나마 짚어내 볼 수 있을 것이다.


4.


촉각적 무의식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술사적 맥락을 인용해보자면 그것은 다음처럼 옮겨 쓸 수 있다. “의수는 우리의 손이 의식적으로 감지하지 못했던, 세계의 은폐된 것으로 이루어진 지평을 넓혀준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의수가 의식적으로 탐지될 수 없는 것을 (촉각적 의미에서)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포착은 소녀가 겪는 내적 갈등처럼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아 알 수 없는 갑갑한 감정, 사랑의 따스함을 매개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오직 그녀만이 포착할 수 있는데, 이 점은 여태까지 진행되어 왔던 넷플릭스 판본과 본작에서도 여러 번의 옴니버스 이야기를 통해 확인된다. 직간접적으로 어떤 형태로의 사랑을 보여주는 별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묻는 소녀보다 그녀가 바라보는 의뢰인의 모습에 집중하게 된다. 이들의 모습은 외부 세계에 의해 단순히 지적될 수만은 없는, 마치 한편의 사진에 찍힌 배경적 서사의 ‘포착’을 통해서만 비로소 전경에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녀의 의수는 감정을 메만짐으로써 의뢰인 자신도 모르던 ‘촉각적 무의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아마도 촉각적 무의식의 서사에 개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타자기일 듯하다. 키틀러는 역사가 어머니에 의해 자손으로 전승되었다고 말하면서 여성과 타자기 사이에 유의미한 고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에 따르면 구전을 통해 자녀를 훈육하고 지식을 전달하던 이전 시대의 여성들은, 타자기의 발명을 통해 입이 아닌 손끝으로 정보 지식을 전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촉각적 지식을 얻은 대가로 발화하는 입을 빼앗긴 여성들은 묵묵히 일하는 기계 장치처럼 인간의 아래 등급으로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작에서 타자기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표현하려는 이들의 감정을 포착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그런 매개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촉각적 무의식이다. 이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이외에도 여타 다른 자동수기인형이 지닌 능력이지만, 그것을 관측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의수이다. (여담이지만 키틀러는 축음기가 청각적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보기도 했다.)


사실 타자수를 지칭하는 ‘자동’수기인형이라는 단어에서도 기술적 면모가 묻어나오는데, 여기서 ‘자동’이란 단어는 그들의 작업이 단순히 글을 대필해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먼저, 자동수기인형이 하는 일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작업에서도 드러나듯이 의뢰인에게 내재된 감정을 타자기라는 장치를 통해 양피지 위로 전경화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읽어내야 하기에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자동’이라는 말이 ‘인형’이라는 기술적 면모와 어울릴지는 몰라도, 그것들 별개는 자동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존재로서 부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기의 역할을 두고 우리는 촉각적 무의식이라 불렀었다. 바로 이 점이 자동수기인형이라는 단어의 이율배반적인 면을 돌파할 구석이라 할 수 있다. 이 타자기가 가능케 하는 것은 기술, 촉각, 감정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수면 아래에서 엮는 무의식의 형성이다.


5.


소녀는 전장을 떠나 타자기에 손을 가져다 댐으로써 자신의 외딴 손에 부여된 속성을 파괴에서 회복의 절차로 바꿀 수 있었다. 이는 인간에게 의수를, 시대에 에펠 타워를 지시한 이 작품이 <외전> 안에서만큼은 강한 생기를 불어넣으려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었던 본편이 전쟁의 종결이라는 아주 희미한 역사의 끝 부분을 지적했었다면, <외전>은 전쟁사가 기술사로 전환되는 절차를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하는데 아마도 이는 회복을 넘어선 자생을 뜻하는 것일 테다. 물론 신화적 풍광에 젖은 본작의 이야기가 각각의 옴니버스 이야기에서 얻은 단서들로 촉각적 무의식을 이미지화하고, 그것을 양분 삼아 변증법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를 불안이 해질녘의 땅거미처럼 대지에 서려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이라는 악몽이 잠시 물러난 자리에 몰려든 자본주의라는 꿈이 만들어낸 신화적 풍광, 그것은 중단의 지점에서야 비로소 깨닫는 환등상의 전개이다. 이 몽타주는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겪는 여러 옴니버스 이야기를 통해 (시간대는 겹쳐지거나 혹은 뒤죽박죽이기도 하지만) 현재가 과거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제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대필 작업은 의뢰인과의 만남이 모두 이루어지고 난 후, 각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며 이와 같은 점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절의 서사를 환등상 내의 변증법적 이미지로 가정할 수 있게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앞서 말했던 본작의 현재와 우리의 현재를 일대일로 대응하려는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변주를 시도해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작품 안에서 묘사되는 역사가 우리 현실 역사와 바르게 대응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나, 역사에서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그러하듯 둘 사이에는 어떤 유의미한 접점이 없는 게 당연하며, 그 과정에서 현재에서 과거로의 진입이 신화적 형상으로부터의 근원적 재귀를 꾀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점점 더 기술이 만들어낸 신화 안으로 진입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진과 영화는 게임이나 VR과 같은 뉴미디어에 기술사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다. 여기서 주도권이란 시각적 무의식의 시대에서 촉각적 무의식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전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한 자리에 집약하는 게 불현듯 한 발견의 순간을 제공했다면,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감응하게 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물 밑의 지옥과도 같은 슬픔들, 통증들의 경과를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6.


물론 우리가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읽을 때는 그가 처했던 상황이 풍요 뒤의 절망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 유사한 사례를 몇 차례 겪은 바 있다. 전쟁은 인류 역사의 오랜 친구였으며, 그에 대한 감정은 벤야민이 느끼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언제나 고통이었으며, 우리는 그걸 의식적으로 잊고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가라앉는 것들을 바르게 통제하는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본작이 제시하는 구원의 서사는, 이것이 설사 과도기적 완충 지대라 하더라도 우리 시대의 한 지표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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