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
*헛갈릴 수도 있기에 미리 용어를 정리해둔다. 이 글에서 ‘본작’이라 함은 중점으로 다루는 외전 작품을 뜻한다. 또한 ‘본편’이란 외전 작품의 모태가 된 원작을 뜻한다. 본작과 본편을 헛갈리지 않도록 유의할 것. 본작의 제목은 첫 기재 이후 <외전>으로 축약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본편을 잇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본편의 외전인데, 이러한 점이 본작을 정의하는 데 헛갈리게 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1시간 30여분 분량의 이 작품은 영화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영화의 형식을 한 TV 애니메이션, “극장판”
영화라는 형식이 중요한 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평가기준이 작품 내에서 발단, 전개, 결말에 이르는 인과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쉽게 말해, 영화 한편만으로 관객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세세한 배경설정부터 후일담까지 (혹은 여지라도) 일반적인 2시간 내에 모두 제시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완급조절이다.
반면 TV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매화가 분절되어 있다. 제작진은 각 화에 맞추어 완급조절을 하면서도, 시즌 전반에 대한 완급조절도 수행해야만 한다. 물론 이는 시리즈 형태로 진행되는 여타 다른 매체들, 이를테면 드라마나 웹툰과 같은 것도 동일하지만. 적어도 TV 애니메이션에서는 부가적으로 다른 특징 하나가 따라붙는다. 정확하게는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예외적 수입으로 처리되는 것은 주로 ‘극장판’이다. 애니메이션 본편만으로도 원작 소설, 만화의 판매량이 뛰고 피규어와 같은 기타 상품을 판매할 수 있지만, ‘극장판’만큼이나 ‘한탕’을 할 수 있는 건 드물다. 이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영화라는 상품의 특성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며,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을 제작할 때는 비교적 낮은 위험을 떠안는다는 점이 ‘극장판’이라는 기획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오타쿠의 유희 상품에 가까운 극장판
그렇다면 ‘극장판’은 왜 낮은 위험을 갖는가?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최소한의 흥행이 보장되어서다.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의 주요 향유자인 오타쿠의 힘을 제작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마도 승패는 여기서 갈리는 듯한데, 오타쿠를 중심으로 만든다는 건 일반인들에게 진입장벽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중심의 포스터나, 원작을 보지 않으면 이해에 무리가 따르는 ‘외전’의 성격이 됨으로써 일반인들의 작품 유입을 막는다.
이처럼 극장판은 일반적인 영화의 작법과는 다르다 할 수 있다. 허나 문제는 영화라는 형식을 띈 극장판이 그것을 영화로 인식한 일반 관객에게 모종의 괴리감을 준다는 점이다. 극장판이 노리는 주요 수요층인 오타쿠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극장판은 불친절하다. 극장판은 작품 안에서 알아야 할 주요 설정을 예습해왔다는 전제로 진행되며, 예습해오지 않은 학생은 중간에 낙오되고야 만다.
더 나아가서, 오타쿠의 취향에 맞추어 스펙터클만을 보여주는 서사는 불이해를 기반으로 작품 전반을 무너뜨린다. 소위 말하는 ‘총집편’ 성격의 극장판이라면 더욱 끔찍하게 된다. 팬심으로 N차 관람을 하는 이들에게도 종종, 이미 보았던 것을 모아둔 것에 불과한 총집편은 ‘스킵’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래서인지 오타쿠 커뮤니티 안에서는 ‘본거 또 보고’를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는지가 신앙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나마 <걸즈 앤 판처>처럼 4DX효과를 더한다면 극장에 갈 이유는 충분하다.)
극장판, 영화인가 외전인가?
이쯤에서 오타쿠의 유희 상품에 가까운 극장판 이야기는 접어두고, 영화로서의 극장판으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위에서 말했듯이 TV 애니메이션의 총집편에 불과한 걸 ‘극장판’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극장판이라는 단어가 ‘극장 판본’의 축약어라는 점에서는 옳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내에서 이야기가 갈무리되지 않으므로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예컨대 우리가 극장판을 논할 때는 이것이 OVA와 같은 성격의 외전인지, 아니면 독립된 레이블로서 기능하는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외전>이 레이블 전체에서 갖는 지위는 굉장히 모호해진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으로 등장한 이 작품은 외전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본편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본편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해에 무리가 따르는 건 아니다. 애초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던 본편의 서사가 그런 이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기도 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이야기에 욕심 부리지 말고, 감정은 먹을 만큼만
사람들을 만나고 감정을 배워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일상을 영유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일상물의 지위를 어느 정도 겸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작품처럼 단순히 일상을 영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편안한 삶을 적극적으로 향유한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른 경향을 보인다. <고바야시네 메이드래곤>이나 <도우미 여우 센코씨>와 같은 작품이 그런 부류인데, 이런 작품들은 거시적인 이야기가 뚜렷이 관측되지 않거나 배제됨으로써 미시세계의 감정에 집중한다.
이런 작품들이 소소하게나마 인기를 끄는 건 거시세계의 이야기에 매혹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가 아니다. 거시세계의 알력에 끌려 다니는 개인에게서 자기 삶을 바로 세우려는 기립의 에너지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운명을 개척한다거나 사명을 완수해야한다거나 하는 식의 거창한 이름은 세계로부터 부여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게 이 시도가 품은 주장이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 하루를 여닫는 셔터맨으로의 역할이고, 이것이 TV 애니메이션의 분절된 형식과 결합할 때 그 둘은 시너지를 내게 된다.
낭만과 사랑의 시대, 벨 에포크
그렇다면 <외전>이 본편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도 본편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알아간다는 SF 장르의 담론을 19세기 후반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포괄적으로 보면 비(非)인간이 인간이 되어가는 모습과 시도를 그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 비(非)인간이라는 범주가 끌어안는 담론은 굉장히 넓다. 그 중에는 인종차별이나 여성 문제가 있을 테고, 작품의 배경처럼 전장에서의 아군과 적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작품 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의 의미가 굉장히 훼손되었을 테다. 그런 담론이 옳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기에 모두 표현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본래 하려던 말도 구심점을 잃고 흐려져 버리게 된다.
본편은 이를 피해가기 위한 방책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세운다. 크고 작게, 주인공이 겪는 옴니버스 이야기들은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기계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분적 결핍이기도 한데, 본편은 이를 기계 느낌이 물씬 나는 의수를 통해 표현한다. 잘린 두 손을 대체한 이 의수는, 감정을 방출하기에 적절한 도구인 손을 기계화했다는 점에서 전달 신경의 마비와 같은 인상을 준다. 신체의 말단이자 인간 신체의 꽃인 손이 촉각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촉삭돌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따르면 주인공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캐릭터 디자인은 그것만으로도 인물의 감정상태를 온전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신경이 절단되었다는 점을 표현하는 캐릭터 디자인에는 그럴싸한 설명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를 위해 도입된 게 바로 전쟁영웅이라는 설정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전투에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는 설정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투 미소녀 양식에서 DNA를 따왔으면서도 작품 속 배경을 담론 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탁월한 센스라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리되었던 당대의 배경에서 여성이 손을 통째로 잘릴 만한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다. (이는 작품 속에서도 주인공의 손을 보는 주변인물의 반응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흉악한 철골 구조물은 어떻게 파리의 상징이 되었는가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여성이 노동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었다. 차별이라던가 하는 게 아니라, 공장에 나가 손을 잘릴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의수는 단순한 설정임에도 당대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보여주는 상징물이 된다. 여성이 전쟁에 나가 손을 잘려올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다르게 보면 노동이 양손 절단의 사유를 쉬이 추측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배후에 진행되는 전시라는 역사가 자칫 합리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는 것을 납득하게 해준다는 점이 전쟁에 대한 비극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작중 배경이 실제 역사와 백퍼센트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도, <외전>의 배경에서 건축 중의 에펠탑이 보이는 걸 감안하면 아마도 1880~1890년 사이의 파리 어딘가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본편의 마지막이 전쟁의 종결이었고, 외전의 배경이 기술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도중의 파리라는 점에서, 이는 보불전쟁 이후부터 벨 에포크 시대로 이어지는 파리임이 분명하다. 이때 배경적으로 보이는 미완의 에펠탑이 전해주는 건, 훗날 파리의 명물로 자리 잡은 ‘흉악한 철골 구조물’인 에펠탑을 통해 보여주는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훗날이다. 이것이 벨 에포크라는 풍요의 시대와 겹쳐져 그녀의 밝은 미래를 ‘기술적’으로 예언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이후 파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는 건, 너무 과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응당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펠탑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점령 사진의 독무대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는 본편과 외전 밖에 자리하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반전 성격이 짙은 본편의 설정과 묘하게 공명한다. 이를테면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 대한 강렬한 해방의 염원이 그렇다. 만약 우리가 에펠탑을 주인공을 묘사하는 장치로 본다면, 전시에 점령당한 파리의 에펠탑은 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해방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된다.
신체에서 감정으로, 노동에서 서비스로 ‘혁명’
본편에 벌어졌던 잔혹한 전쟁사가 여성의 잔혹사에 대입됨으로써 우리가 은밀한 방식으로 여성의 ‘해방’을 염원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염원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의수에 집약되고, 이는 에피소드의 매 시작마다 놀라던 주변인물의 반응을 통해 강조된다. 신체는 한번 훼손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감정만큼은 인간의 그것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본편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말해주는 사실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통해 구시대와 신시대의 지위가 바로 그런 식으로, 신체적 선천성에서 감정적 후천성으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개입하게 되는 SF 담론은 타고난 신체가 개인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바이올렛 에버가든에게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던 소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이 여성의 자기해방에 관한 페미니즘적 담론이 되는 건, 위의 노동사와 관련하여 작품 내에서 언급되는 몇몇 여성사의 에피소드 덕택이다. 이를테면 <외전>에서는 신부 수업을 받아 귀족의 부인이 되는 게 여성의 최고 영애로 묘사된다. 그러나 작품은 결혼 후에도 일을 이어나가는 여성이 근래에는 흔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후의 진행을 귓뜀해준다.
한계 또한 명백한데, 전후의 풍요를 보여주는 <외전>이 말해주는 한 가지 사실은 과거는 여전히 그곳에 남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전쟁 동안 사용된 기술이 민간에 급격히 스며들게 된 전후의 기술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폭력의 DNA는 여전히 대를 잇는 것이다. 즉 과거의 여성들은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본작이 견지하는 유물론적 태도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면, 그녀가 만난 여성들은 모두 과거에 갇혀 주인공 본인의 성장을 위한 유물론적 단계로만 소모될 뿐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주인공의 손을 잘라내는 본편의 선택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탈락된 손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여전히 기계처럼 살아왔을 것임을, 사망한 군인들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잘린 손에서 전쟁이 아닌 편지를 떠올리자
요약하자면, 본편은 역사를 개인-부분으로 축소해 거시담론으로 편입해버린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외전>에서 이곳 파리의 풍요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위기에 처할 운명에 처해있다. 본편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한참을 진행해야만 하지만, 이는 역사의 거대한 구름이 되어 미완의 철골 형태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따라서 <외전>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지, 아니면 본편의 연장선인지를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만약 <외전>을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영화로 본다면,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자구책을 탐색해야 한다. 풍요 뒤의 먹구름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외전>을 본편의 연장으로 본다면, 자신이 묘사하는 것처럼 폭력의 DNA를 생활의 기지로 응용하는 반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위에서 수행했던 비판의 지점을 작품을 관람하는 ‘지금-여기’를 논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 주장의 논지는 <외전>을 영화의 형식이 아닌 본편의 연장으로 보았을 때, 몰락에 갇혀 미래의 파멸로 나아가기보다는 본편의 종결로부터 미래의 포문을 여는 지점의 어느 단계로써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비유하자면 잘린 손에서 전쟁이 아닌 편지를 떠올리자고 말이다. <외전>에서 생략되는 소소한 배경들은 본작이 보여주는 전쟁과 해방의 역사를 통해 이미 종결된 사건들이며, 묘사될 필요가 없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본작은 가공의 현실역사를 작품 안으로 편입함으로써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언과 그에 대한 자구책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역사의 현실과 모순을 차례로 맞닥뜨리며 옴니버스 구성을 통해 정반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덧붙임 :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반여성적 서사로 규정되는 건 바르지 않다. 이 작품은 묘사되는 현장을 통해 무언가 반면교사를 얻기보다는, 구현되는 현재를 바로잡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취한다. 이 모습은 주체적으로 지위를 획득하는 여성상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묘사이며, ‘수기 인형’이라는 단어에서 여성의 타자화와 같은 대목을 지적하는 건 레이블 전체를 너무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어쩌면 여성이 인간의 기술사를 이끌어왔으며 그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건 ‘문자’와 ‘타자기’라고 말하는 키틀러의 논의가 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키틀러에게 가해지는 비판도 위와 유사하다. 만약 레이블 전체를 본문에서 잠시 언급한 SF 담론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