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2011)
1.
신기하게도 어느 매체들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영구기관’으로 치환하려고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영구기관이라 함은 자신이 내는 힘으로 자신을 움직이는 식의 개념인데, 당연하게도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과학의 기초인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는 이 사실은, 에너지의 순환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말끔히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측면으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을 풀이하자면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인풋(input)이 없는데 어찌 아웃풋(Output)이 있으리요. 현재로서는 아주 적은 양의 자원을 투자하여 막대한 힘을 뽑아내는 것만이 가능하다. 핵분열-핵융합이 그런 부류이다. 하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이 에너지 생산 방식에 의구심을 품는 우리에게, 최초의 투입이 최후의 투입으로 남는 영구기관은 분명 매력적인 ‘개념’인 것만은 틀림없다.
욕망을 개념으로 치환해보려는 시도가 산업혁명이 꽃피우던 19세기 말 무렵에 시작되었다는 점이 위의 가정에 대한 기묘한 일치이다. 예컨대 프로이트와 벨 에포크는 엔트로피와 에고에 대한 실무적인 고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한정된 자원으로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인간이 어떤 에너지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두고서 “그런 에너지를 예술적인 것으로 치환할 때 인간은 긍정적인 삶을 얻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꿈’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너지를 상징하는 게 되었으며, 어떻게든 이를 다시 내면으로 환원할 수만 있다면 “삶을 살아갈 자원은 그것으로 완성된다”고 프로이트는 믿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골격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만약 욕망이 문자처럼 ‘추구되는’ 대상이라면 그것에는 우리가 손을 뻗을 만한 어떤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손을 ‘뻗는다’고 표현하면 그 손이 바깥으로 향하게 될 것임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고, 이 가정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디에 자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음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욕망이 내면에서 근원한다면 우리가 뻗는 손은 내면으로 굽을 것이며, 이는 심장을 움켜쥐는 행위에 비견된다. 말하자면 인간의 욕망을 그려본 도식에서 심장은 자가세동하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고대 아즈텍인들은 심장이 영원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고 여겼다. 이는 잘라내고 나면 곧바로 작동을 멈추는 다수 신체와는 다르게, 심장은 적출된 뒤에도 얼마간은 활동을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장도 조만간 활동을 멈추게 되어있고, 그 짧은 순간 동안 심장을 신에게 바쳐 생명력을 공양하는 게 아즈텍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을 발명해 내었을 때, 기관은 기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써 인간의 심장에 빗대어졌다. 이런 절차를 밟아 우리는 욕망-기관-심장이라는 세 개의 재료를 확보했고, 감정의 폭발-생동하는 에너지-솟구치는 피라는 결과를 내놓게 된다.
2.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하 마마마로 표기.)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건 큐베의 사상과 그 실천방안이다. 큐베는 “인간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 생겨나는 감정의 ‘낙차’야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 자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그는 “우주 전체로 보아도 손꼽힐 만한 에너지를 낸다.”고 덧붙인다. 여기까지는 인간 개인의 욕망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좌절시키는 방안으로서, 어디까지나 개인의 범주에 머무르므로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큐베가 고안한 영구기관은 1) 마법소녀의 욕망을 들어준다. 2) 마법소녀의 욕망을 좌절시킨다. 3) 욕망이 좌절된 소녀는 마녀가 된다. 라는 절차에 “마법소녀의 의무는 마녀를 처치해 세계를 안정화하는 것”이라는 독소조항이 붙는다. 이 독소조항은 법률적 강제가 아니라 마녀를 처치해서 에너지를 얻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육체의 제약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를 저장하는 기관은 마법소녀의 심장이자 전부로서, 욕망을 보존하는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는 외장 신체로 작동한다.
마도카가 큐베에게 기관에 대해 물었을 때 큐베는 “외장 신체인 덕분에 일반인보다 튼튼할 수 있다.”고 답한다. 큐베의 발언과 보여지는 이미지를 종합할 때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만, 심장을 떠올린다면 그건 다소 이질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게 된다. 심장을 밖으로 꺼낸다는 말은 곧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를 연약한 것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제언이 기관의 기능을 둘러볼 때, 꿈과 욕망에 관한 격언이 ‘연약한 껍데기’를 지적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의 근본은 현실에서 벗어난 것이 무의식에 잠기고, 무의식이 붕괴할 때 현실도 붕괴한다는 상호보완의 논리에 있다. 이는 산업과도 같아서 그 과정에서 손실되는 어떤 에너지를 가정하는데 그게 바로 꿈이다. 말하자면 꿈이 없는 인간이란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바로 그런 이유로 존재할 수 없다. 결론, 이를 도식화하면 꿈이 없는 것은 영구적으로 운동하는 기관이다.
큐베의 영구기관은 인간의 꿈을 밖으로 끌어내어 공의 존재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꿈꾸는 마법소녀가 꿈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균열이 일어난 신체가 그에 수반했던 에너지를 세계로 흩뿌리게 되는 원인이다. 물론 작품 내에서 마법소녀가 마녀로 변모하는 모습이 일종의 ‘탈피’처럼 그려진다는 게 그에 대한 직접적인 논증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가정한다 해도, 속이 빈 것을 뒤집어 놓으면 그렇게 생성된 껍질 또한 공허하리라는 점을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마법소녀와 마녀가 상충하는 존재라는 점을 그렇게 설명한다면 에너지 자원의 유용도 설명된다. 큐베를 통해 몸과 영혼의 분리로 영혼을 물화한 마법소녀가 마녀로 외피를 바꿀 때, 물화된 자원이 밖으로 방출됨으로써 까맣게 식어버린 백색왜성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마녀이다.
극장판을 제외한다면 작품의 결말은 마도카가 신이 되어 큐베의 기관을 파훼하는 것이다. 마도카의 파훼법은 마녀가 되는 소녀가 없게 하는 사후적인 보완이고, 그렇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근본을 바꿀 수 없다고 인정한 것이기에 작품의 논의는 인간의 범주 안에 머무른다. 쉽게 말해 <마마마>는 인간의 이후를 다루는 게 아니라 인간의 현재를 다룬다. 이 문장을 이 자리에 표기한 것은 우주적 법칙, 개념으로 탈바꿈한 마도카의 모습이 작품 내에서 인과율-엔트로피라는 말로 설명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사실 엔트로피라는 말로 표현하면 굉장히 느슨한 느낌이 나는데, 이 논의의 전제에 사랑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욕망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만큼/분노할수록 강해진다는 전투장르의 유고한 법칙이 정신의 물화로 표현된다면 어떨까? 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마마마>의 설정이 마법소녀 장르에 담긴다. 엄밀히 말해 이런 내용이 굳이 마법소녀 장르에 담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르라는 것은 필요에 의해 성립하는 게 아니다. 장르란 소비자의 선호에 따라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구축하는 대상(Cliché)의 모음집이다. 이 대목에서 제안하는 신기한 풀이 하나, 클리셰에 대한 사유는 외부로부터 수혈되는 선호도에 발원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클리셰를 볼 때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은 어디까지나 안쪽으로 국한된다. 장르의 바깥에는 막대한 풀이가 있으므로 비교적 수월한 안쪽으로 자리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클리셰 하나가 주어지고 나면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이 설명은 일방적이지만 작품 내에서는 무엇이든 옳다. 이렇게 생성된 세계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세카이(Sekai)로 변모한다. 이 자리에서 작품의 설정을 톺아보면 큐베가 유지하려는 우주가 다름 아닌 작품 전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큐베의 제안, “우주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유에는 우주 전체가 멸망하면 그 안을 살아가는 큐베 종족 또한 멸망하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간략한 설명만이 따라붙는다. 이른바 대의를 위한 소시민의 행복 찬탈, 어딘가 익숙한 문구이지만 이렇게 바꾸어 쓰면 신선하다. 장르적 쾌감을 위한 소시민의 희생, 이 안에서 등장인물은 장르를 위해 독자의 욕망을 파종하려는 착즙 장치가 된다. 말 그대로, 말린 오렌지처럼 거세게 쥐어짜질 뿐이다.
3.
이에 대해 <마마마>가 들려준 단순하지만 괴팍한 답변, 등장인물을 독자의 욕망으로 소비되게 하지 말고 그 독자의 자리를 작품 안에 내주어라.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마도카는 여러 번의 시간 반복으로 단련된 호무라의 비호를 받고 있다. 호무라는 시간을 반복하며 마도카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 모습이 작품 하나를 ‘N차 관람’하는 오타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호무라를 통해 우리가 눈치채는 단 하나의 사실은, 이 작품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거세되어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이 작품에는 클리셰를 상쇄하는 죽음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그 죽음이라는 게 우리의 최종 종착지는 아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도입부에서 마도카와 큐베의 계약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다음, 호무라를 등장시키며 욕망의 좌절을 겪은 소녀가 마녀로 변형된다는 점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녀가 탄생하는 원리에는 단순히 욕망의 좌절만이 아니라 ‘과열’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병행 표기해야 한다. 하강만이 아니라 상승 또한 성질 변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게 에너지 자원의 자유로운 유용을 보여줄 요인이다. 이는 극도의 혐오와 극단의 사랑이 등을 맞댄 감정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큐베의 맥락에서 엔트로피가 우주적 질서를 성립하게 하는 요인이라면, 마도카와 호무라의 맥락에서 엔트로피란 인간 개인에 대한 질서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마도카와 호무라의 논의는 큐베와 다른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마도카와 호무라가 시간을 다층적이라고 인식하는 반면에 큐베의 시간은 에너지의 총량에 가깝다. 이 지적은 마도카와 호무라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라는 감정적인 틀 안에 자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큐베의 개체적 합일과 차이가 있다.
소녀들의 뛰어난 공감능력이 시간관에 대한 인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법’소녀’ 측면에 적용되는 문구이고, ‘마법’쪽은 작품이 제시하는 클리셰에 적용된다. 클리셰가 작품이 따라야 할 정형화된 무언가라면 이는 마법소녀가 따라야 할 의무의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꾸어 서술하면 클리셰라는 것에 대한 작품 전반의 인식은 큐베가 마법소녀에게 부여한 의무와도 같다. 여기서 큐베와 마법소녀의 관계를 돌아보면 큐베의 발언 하나를 옮겨올 수 있다. 큐베는 마도카에게 “마법소녀의 힘은 마법소녀가 되기 전에 맺었던 사람과의 관계만큼”이라고 말한다. 큐베는 이에 대해 인과라는 주석을 덧붙이는데, 호무라의 법전 해석은 큐베와는 다르다.
호무라에 따르면, 마법소녀의 힘은 인과로부터 발원하기에 힘 자체가 그녀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된다. 인과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의 관계가 집결하는 요충지를 뜻한다. 그러니 그런 요충지가 파괴되었을 때는, 그에 딸린 관계가 낱실처럼 떨어져 나가리라는 점을 쉬이 추론해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법소녀는 결코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원이 아니다. 마법소녀는 세계와의 관계가 짙을수록 불안정해지며 그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반(反)의 에너지가 짙어진다. 말하자면 오히려 마법소녀쪽이 세계 안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는 존재이고, 이 반물질을 통제하려면 어떻게든 방출의 단서를 제공해야 한다는 게 큐배측의 생각이다.
독자는 장르 안에서 미끄러지는 자신을 보며 내면의 욕망을 발견한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과녁을 맞추는 행위가 아닌 대양을 횡단하는 여정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N차 관람을 통해 메타 인지를 발달시킨 호무라가 엔트로피의 예외적 인자로 진화하는 모습은, 에너지의 불안정함에 대한 구조적 논리를 파훼해보려는 산업적 시도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외장 신체로부터 멀어지는 마법소녀의 육체는 특정 거리를 넘어서면 접속이 끊어진다. 이 대목에서 특정한 거리가 공간의 측면에서 심리적 거리로 추산될 수 있다면, 욕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안으로 관측되는 지평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지평을 넘어서면 그것은 대양이 되어 통제 불가능한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마법소녀의 외장 신체가 욕망이라는 동력원을 상실하면 베일에 싸여있던 기관의 존재가 세상에 공표된다. 항상 연료의 형태로 제공되어 표피를 마주할 일 없던 개인에게 욕망의 작동원리를 마주한다는 것은 세상에 발가벗겨진 채로 내쳐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법소녀의 진실을 마주하고 난 후에 순차적으로 벌어지는 규율의 붕괴는 일종의 무규범 상태를 떠오르게 하고, 고장 난 기관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멈출 방법은 벽에 부딪히거나 동력을 제거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세계의 벽을 제거한다는 건 (세포가 그러하듯) 종언으로 가는 정도이고, 동력을 제거한다면 세계의 동력으로 사용되는 개인은 존재의 이유(Raison d'etre)를 잃게 된다. 호무라도 마도카를, 큐베도 마법소녀를 잃게 된다. 호무라와 마찬가지로, 큐베도 마법소녀가 없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세계로부터의-대상이다. 이들을 포함한 독자-오타쿠에게도 애니메이션이라는 틀/벽을 제거하는 건 종언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절충할 방안은 없는 것인가. 마도카는 그 둘을 포함해 세계와 개인 모두를 지켜내는 선택을 한다. 기관은 여전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더는 소모되지 않음으로써 마법소녀는 영구기관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욕망이 삶을 추동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