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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31. 2020

트네필 시네필이라는 오타쿠


사진이 예술 활동의 일부를 대신하도록 둔다면, 사진은 머지않아 예술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타락시킬 것이다. 이는 바로 사진의 본질적인 동업자인 군중의 우매함 때문이다. […] 일단 사진이 무형의 상상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용인되고, 인간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것을 더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침해하는 일이 용납된다면, 우리는 곧 화(禍)를 당할지니라! -샤를 보들레르- [1]


*


얼마 전 CGV에서 아르바이트생이 관객을 ‘오타쿠’라고 비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사건의 전말이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지만, 오타쿠라는 단어가 자극적인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하다. 왜냐하면, 직원과 고객의 관계는 갑과 을이라는 계약서상의 계급적 단위로 간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의 문제에서 ‘갑’은 항상 고객이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이 관객 집단을 오타쿠로 규정했을 때는 갑과 을이라는 구분은 사라지고 오타쿠의 선별화라는 객체의 분리만이 남는다. 이 지칭에는 ‘나’에 대한 설명은 쏙 빠진 채로 ‘너’라는 이름의 오타쿠가 덩그러니 놓이고, 이때 오타쿠들은 실체 없는 주체로부터 공격받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두들겨 맞기만 해야 한다.


사람들은 직원이 고객을 비하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오타쿠’를 둘러싼 하나의 잡음으로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달리 말해서, 이 사건에서 오타쿠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이 유리 벽에 가로막혀 관객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잠깐, 여기서 내가 사용한 동물원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일종의 동물적인 무언가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전에 나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 말했고, 이것은 그들이 ‘~사피엔스’와 같은 부류의 차이를 지닌다는 뜻으로 사용한 문장이다. 종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오타쿠 집단의 무기력함은 그들 스스로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원초적인 차단막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무언가 투명한 막이 오타쿠 집단 사이를 둘러싸고 있고, 이 공간의 안팎으로는 어떠한 왕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 늑대와 개의 차이처럼, 어떠한 교배가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다른 집단이다. 


그렇다면 종의 기원이란 무엇일까? 종이 다르면 유전자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구닥다리처럼 정의해보자면 X세대와 기성세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두 집단의 유전적 교배가 가능은 하겠지만 청소년들은 어른들과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쉬이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타쿠와 비(非)오타쿠의 관계는 단순한 세대론으로 지칭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에서 오타쿠는 내가 없이 너만을 바라보는 일종의 허수아비 분신술에 가깝다. 달리 보면,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제기해볼 수 있겠다. 어떤 경로를 거치든 간에, ‘나’는 타자가 없다면 결국에는 ‘나’가 되지 못하는 미완의 존재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광학의 원리가 ‘나’라는 주체가 아닌 ‘세계’로부터 기원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지평선이 곧 개인의 시야를 결정한다. 


이 명제를 오타쿠라는 종에 대입하면, 오히려 우리가 오타쿠라는 수많은 ‘나’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대한 설명은 오타쿠들의 강한 자아 중심적 사고에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다. 즉, 우리는 타자를 의식하지 않는 오타쿠들이 두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오타쿠들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신을 움켜쥐고, 적어도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간편한 신성모독처럼 보인다. ‘나’를 인식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던 우리가, 망막에 빛을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세상을 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따른다면, 오타쿠인 그들은 아무런 외부개입 없이도 자아상을 찍어내는 사기적인 존재에 가깝기에 우리는 그 이질성을 두려워한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초월과 투사가 공존하는 원근법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그들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어쩌면 오타쿠라는 단어가 처음에 일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기원한 이유는,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이미지의 초월 변형(meta-morphing)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성질에 가장 유사하기 때문일 것 같다.)


빛에 대한 보강 설명. 빛은 타자이고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한 배타적 받아들임을 전제한다. 어쩔 수 없는 만남이라는 소리다.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없고, 그렇기에 조그만 양의 빛이라도 받아들이기 위해 아득바득거리는 게 우리의 눈이다. 그런데 사실 빛이 없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빛은 세상과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일 뿐이며, 이에 따르면 빛이 없는 세상이란 진공 상태에 비유될 수 있을 테다. 허나 그 진공이라는 게 진공 상태 안에 놓여있는 게 아니라 진공을 통해 분리된 두 개의 세계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진공인 세계에서, 바깥과 안이 소통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없다. 공기가 없으니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고, 진공 지대를 우회해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적당한 진공은 일종의 방음벽처럼 작동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더라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소란스러움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우리가 즐겁게 조잘대는 취미 생활의 일환이며, 작은 진공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만의 대화 공간이 필요함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함이다. 


*


이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본다면 당신은 오타쿠들이 세상과의 차단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 일종의 광(光)적인 진공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오타쿠들의 자아 유지 속성은 빛을 피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의 퇴화를 겪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어떠한 기회로 해당 지역에 서식하게 된 그들에게 빛이란 있든 없든 간에 그저 그곳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심해와 동굴 깊숙한 곳에 사는 생물들의 모습은, 바깥에 있는 것들의 모습과 이질적으로 다르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삶의 조건에 따라 몸을 변형시켰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예컨대 그 진화는 마법 같은 동굴 환경에서의 타락이 아니다. 오히려 적응에 더 가깝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왔다기보다 바깥이 아니라면 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을 밖으로 꺼내오는 행동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둠 속의 오타쿠의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해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생각이 단순히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오타쿠라는 단어는 이미 과거의 ‘멸칭’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있는 상태다. 오타쿠들은 방구석에 들어앉아 사회적 행동을 할 기능을 상실한 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참전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아즈마 히로키라면 이 문제에 대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를 꺼냈겠지만, 근래의 오타쿠란 이전처럼 ‘동물’에 가까운 무언가로 보기엔 너무나 많이 변형되어버린 이미지다. 이를테면 요즘 방송가에서는 ‘~phil’이라는 고상한 단어 대신 ‘오타쿠’라는 이미지를 택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한다. 그 요즘이라는 게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용례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쿠라는 이미지가 점점 밝은 곳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세상 이야기에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응한다. 마치 정지장 안에 갇힌 듯 안과 밖은 그리드 필드에 의해 분할된다. 공기는 통하지만 물질은 차단되는 이상한 일들이 이곳에서는 흔하다. 그 때문에 같은 대기에 살던 이들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커뮤니티는 마냥 폐쇄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선택적으로 공감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세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타쿠가 자신의 이미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이미지만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이때의 오타쿠는 이미지라는 가면을 쓴다. 물질이 시간의 지속에 대응하지 못하듯이 오타쿠 본인의 행복은 늘 이미지 자체를 초월한 채로 부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타쿠들은 세계의 이면을 방황하는 거리의 산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일종의 음각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오타쿠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세계의 저편에서 미지로 남아있던 것들은 이제 얼마든지 관측될 수 있다. 전통적인 광학으로의 지평선은 부정되었고, 지미집, 크레인, 드론, 인공위성과 같은 수직적 시야의 산물이 정방향의 지도 분할과 픽셀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온 것이다. 수평으로는 여러 장애물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수직 상으로는 광활한 지대를 확보한다. 수평만으로는 단순히 네모난 틀에 갇힌 풍경밖에 확보할 수 없지만, 수직을 응용한다면 국경과 지형 모두를 넘어설 수가 있다. 오늘날 트위터와 같은 인터넷 SNS 서비스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면서도 동시에 분리하기도 하며, 이곳의 인간들은 가면의 뒤에 부유하는 집단적 독백의 오타쿠가 된다. 이들은 마치 무리 동물처럼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고, 인간의 눈이 볼 수 없는 것의 다른 면모를 디지털 매체를 통해 실현해 보인다. 


이 약진이 의미하는 게 오타쿠라는 동물을 사람처럼 대하게 되었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행보인지, 아니면 정말로 오타쿠라는 동물상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인지까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하게 말해 둘 수 있는 건 취향 존중의 사회가 일종의 불간섭 조약처럼 서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데이터베이스의 사회에서 오타쿠들은 별개의 분할된 픽셀을 마치 방처럼 사용하되, 자신이 바라보는 곳에 즉각적으로 데이터를 불러오기도 하고, 조각난 사각의 바깥으로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오타쿠라는 단어가 광(光)적인 진공을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에 오타쿠의 범위는 본래의 발원지인 애니메이션보다 더 넓은 지대로 확장되었으며, 무언가에 파고드는 이들은 모두 오타쿠라고 불릴 만큼의 범용성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밀하고 집요하게 대상을 분리해내는 시야 안에서의 능력이 바로 오타쿠의 광학이다. 그것은 물질을 선택적으로 투과시키는 세포의 격벽이며, 바이러스와 같은 위협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면역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Charles Baudelaire, “The modern Public and photography.” In classic Essays in photography, ed, Alan Tranchtenberg (New Haven, 1980),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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