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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7. 2020

채드윅 보스먼을 추도하며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물론 나는 이 시기를 ‘시대’라고 지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라는 말은 기억의 과거의 저편으로 퇴적해버리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 경우, 시대는 지칭되는 순간부터 이미 현재를 바깥으로 퇴출해버린다. 하지만 오늘을 전후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시대’라고 부를 법하다. 이른바 구시대와 신시대, “이전과 같은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코로나 시대의 담론은 일종의 호소가 되어 우리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우리에게 이전이란 정말로 있었을까? 시대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역사를 분절된 시간으로 볼 경우뿐이다. 역사를 선형적(linear)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현재의 우리가 겪는 단절이 과거와 이별해서 유발된 게 아니라 무언가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대한 징조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코로나라는 현상이 이전과 같은 삶의 불가능성을 재현하는 분절의 역사가 아닌, 과거로부터 시작된 균열로부터 본격적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한 모종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이곳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성일 평론가가 KMDb에 기고한 최근 글을 읽었다. 그는 글의 서문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약간만 검색을 해보면 (…) 사람들은 대부분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거의’ 전문가들이다.” [1]  글의 서두를 읽으면서 나 또한 이 지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내가 코로나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코로나 시대라서 새롭게 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도 하고 있었던 생각인데 단지 ‘코로나’라는 그럴싸한 이름만을 붙여놓은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자는 골방의 철학자 같은 느낌을 주지만 후자는 기회주의자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누구나 코로나에 대해 말하는 게 사회적 트렌드를 충실하게 따라간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누구나 코로나에 대해 한마디씩 해야 하는 게 의무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역사의 몇몇 사건들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을 다시금 꺼내어보고 싶다. 어떤 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이야기를 가십처럼 소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연예인의 자살과 같은 사건에도, 수학여행을 떠나던 배가 침몰한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우리가 하물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들이 동시대에 대한 참여의식인 건지 아니면 담론의 파도타기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인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글을 쓰는 2020년 9월 2일을 기준으로, 구글에 ‘Covid 19’를 검색하면 64억 2천만 개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이 숫자는 오늘자 전 세계 인구인 78 억명을 거의 따라잡았다. [2] 아마도 올해가 지나기 전에 이 숫자는 지구 인구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이 속도의 증가세가 마치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속도처럼 보인다. 이에 따르자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인터넷 상에서 현실의 영향력을 담보로 한 채 무지막지한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영향력이 큰 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체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체감의 정도가 위에서 언급한 검색 데이터의 증가 속도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면, 전 세계 인구수를 코로나 19 검색어 데이터가 넘어서게 되는 순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인간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영원히 패배하고야 마는 것일까? 데이터의 형상을 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뒤덮을 때 우리는 비로소 코로나 ‘시대’라는 이명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분명 우리는 코로나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에 대한 담론이 시대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버리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으레 장난처럼 말하곤 하는 “우리는 ~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말은 사실, 우리의 후세대가 그들로서는 과거일 ‘우리의 현재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와야 할 대사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농담처럼 건네는 저 문장은 현재가 없는 자리에서 현재를 언급하는 게 된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현재에 있는 우리가 현재를 언급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현재가 없는 자리’를 가정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왜 현재를 살면서도 현재를 없는 것으로 취급했을까? 현존에서 부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부재를 현존화하는 방식은 그저 그리움의 정서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사례로 나는 지난 5월 23일에 있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서 정세균 국무총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3] 그는 “노무현이 없는 시대가 왔다.”고 말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친다. 이 발언은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했던 인터뷰에 대한 뒤늦은 응답에 가까운데, 중요한 것은 인터뷰가 진행되던 당시에도 인터뷰어가 ‘노무현 대통령의 부재’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라고 인터뷰어가 운을 떼자 노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4] 2002년에 진행된 이 인터뷰가 노 전 대통령의 사후에 재조명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이 인터뷰가 지금만큼의 파급력은 없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요컨대 노 전 대통령이 현존에서 부재를 끌어냈기에 그가 부재하는 현 상황이 더욱 현존화되었다는 가설이 가능한 것이다.  [5]


이처럼 “~가 없는 자리에서 ~를 생각해보기”라는 문장은 분위기의 측면에서 정치적인 일들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이때, 정치가 꼭 분위기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딱 잘라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동구권과 서구권이 분위기에 올라타게 된 것이 어떠한 ‘시대’적 맥락으로 설명될 수 없듯이, 정치적 안건에서는 어떤 시대의 전과 후를 나누는 일이 불가능성에 대한 단절의 ‘만약’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전후 맥락을 파악하면서 선형적인 계보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 선형성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부터 시작된 균열을 찾아 헤매는 기억의 중추를 만들어내며, 선형의 전부를 그려볼 수는 없더라도 인식이 닿는 한에서는 분열의 이전에 자유로웠던 줄기세포를 찾아내는 것에 일조한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빅뱅처럼 여기게 되며,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은 바로 그때부터였다고 말하면서 과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지질학에서 어느 지층을 중심으로 지질 시대를 나누게 되듯이, 코로나가 떠도는 이 시기에 축적된 여러 수치들이 우리들의 시대를 앞뒤로 갈라놓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전후를 나누는 그래프는 점진적으로 축적되는 데이터를 통해 그려지며, 이때 그려지는 도표들에는 명확하게 지정되는 시작점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지난 1월이다. 하지만 우리가 코로나 ‘시대’를 말하면서 나누는 대화들이 과연 코로나 시대에만 유효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가 코로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쌓아 올리는 범죄의 지형도가 지난 1월이라는 명확한 시공간을 지적하고 있을까. 이 시공간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재평가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다. 코로나라는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1월 무렵부터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내게 되었다. 집합금지명령이 발효되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대명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체의 의미는 개인에서 단체, 단체에서 사회로 다시금 옮겨간다. 마치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과정처럼 우리의 주체의식은 나만이 아니라 서로를, 서로만이 아니라 사회를 생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일상이 없는 자리에서 일상을 생각해보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때는 우리가 그에 일상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지만, 오히려 상황이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일상 개념에 대한 접근이 해금된다는 점이 이 상황의 아이러니함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게임이 아니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여도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 2회차 플레이를 시작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세이브 포인트 지점이 명확히 나뉘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저 망망대해의 허공으로부터 흘러가버린 것들의 존재를 희미하게만 인식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코로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느림, 혹은 그리움의 정서인 것 같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속화된 디지털 혁명은 우리를 머나먼 항성계로 퀀텀 점프를 하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부터 혁명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멀리 있는 것들의 지점에 접속하던 우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특이점이 아닌 최초의 탄생으로부터 현재를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재매개(remediation)가 아니라 매개(mediation)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코로나 19의 시대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역사의 한 지점에서 코로나를 만난 것이다. 이전까지 해오던 일들이 재평가되는 일은 우리를 후회와 그리움의 영역으로 밀어 넣지만, 우리는 사실 오래전부터 그들을 그리워해 오고 있었다. 


<블랙팬서>(2018)의 트찰라 국왕 역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채드윅 보스먼이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애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개봉 후에 이루어진 ‘엔드게임’에 관한 인터뷰 하나 [6]를 찾아냈다. 작품의 종결장인 <엔드게임>을 두고서 한 명의 기자가 채드윅 보스먼에게 소식을 알려달라 말했고, 그는 “나는 죽을 거에요”라고 답했다. 이 인터뷰는 영웅들의 절반이 사라진 <엔드게임>의 도입부에서 블랙팬서가 사망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그의 사망 직후에 네티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현재의 맥락에 맞게 재매개했다.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그가 2016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네티즌들은 보스먼의 해당 인터뷰를 모종의 심경고백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록 보스먼은 지금 세상에 없지만 우리는 인터뷰 영상 안에 현존하는 보스먼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 사회 안에 부재하는 보스먼의 이미지를 보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두고 ‘코드 없는 메시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인터뷰 영상에는 보스먼의 죽음이라는 코드가 없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메시지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부재를 현존화하는 것이 되어 수신되지 않을 먼 미래로 나아간다. 


당신이 이 글을 두고서 한낱 추도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뿐이라 비판해도, 나도 돌려줄 말이 없다. 그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설리와 구하라, 종현의 죽음 소식이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 그것을 ‘추도’가 아닌 ‘가십’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 또한 기억한다. 그리고 굳이 코로나 시대를 어느 개인의 죽음에 대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거시맥락화 한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개인이 어떤 사건의 과거 시작점이 되는 일은 그/녀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고통분담 혹은 윤리적 경감의 차원에서 이러한 모습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가 우리에게 잊혀졌었고 사라졌던 것들을 다시금 무대 위로 올려둔다는 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한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안이 제정되는데, 말하자면 누군가의 죽음이 변화를 위한 신호탄이 된다. 사람들은 피해자를 위한 법안에 피해자의 이름을 넣는 것을 경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물의 시작점은 하나의 이름 속에 집약되어 있고, 이 뭉침은 과거로부터 진행된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아래로 편입한다. 따라서 이때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가 아닌 어떤 시간들의 흐름을 대변하며, 끊겨진 수맥은 무한의 지대로 흘러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게 된다. 


코로나 시대가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 그 도약은 ‘시대’가 아니라 ‘분위기’를 밟고 이루어져야 한다. 그저 시대로만 우리의 환경을 파악하는 일은 이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성급히 지나가야만 하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시대를 단지 극복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그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의 시대는 잊혀진 것이 되어 버리고야 말며, 과거의 교훈은 교과서로만 만나볼 수 있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될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자문하고 그 부재를 통해 부재의 현존을 불러내야만 한다. 코로나 시대에 소리소문없이 진행되는 것들은 이제 과거의 잊혀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우리 곁에 침투한다. 코로나의 무증상 환자들은 아무런 흔적 없이 다른 이들에게 병을 전파하며, 다른 이들에게 증상이 발현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증상 환자라는 단 하나의 지점으로 시공간의 흐름이 집결하게 된다. 여기에는 거리두기와 같은 브레히트적인 맥락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서 부재를 당겨오는 능력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코로나 19로 인해 가속화된 디지털 혁명이 어떤 것들을 부재하게 만들고, 어떤 것들을 새로이 창출해낼 것인가. 이렇게 새로 생겨난 사회적 관습이나 기술은 처음에는 분명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우리의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것들의 미래 재매개라 볼 수 있으리라. 출발 지점에 선 데이터가 우리의 기준선을 통과하고 나면 그 예측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포섭되지 않는 데이터는 오히려 우리의 인식 안에서 부재하기에 더 큰 반향성을 띄고 우리의 곁으로 돌아온다. 이른바, 부재를 통해 부재를 인식하기. 이것은 우리가 사라져버린 것과 사라져가는 것들을 추도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들은 유령의 형태도 망령의 형태도 아닌 병균의 형태로 우리의 삶에 동화된다. 많은 학자들이 코로나 19는 감기처럼 앞으로의 인류와 함께하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고, 우리는 코로나 19를 마음이 아닌 몸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1] https://www.kmdb.or.kr/story/237/5435

[2] https://www.worldometers.info/에서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하다.

[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3590, 2020년 9월 2일 확인

[4] 이 대화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선택의 순간들 : 2002년 노무현 대선 승리의 기록』, (파주: 생각의 길), 2006”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이에 대해서는 김병규 평론가의 <변호인> 평론을 참조해볼 수 있다. 그는 해당 평론에서 스크린을 통해 노무현을 현존화하는 방식이 오히려 노무현의 부재를 부각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부각된 부재의식은 오히려 부재로서의 현존이라는 ‘유령’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 자리는 비어있지만 누군가의 존재를 나지막이 암시한다. 극장의 객석은 법정의 빈 자리가 되어 어떤 관객 (Spectatorship)을 이 자리에 초대한다.

[6] https://www.youtube.com/watch?v=eBDMGQmep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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