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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24. 2020

인버전, 코로나, 폴리곤


본 적이 없는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연하겠지만, 본 적이 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제대로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내용을 알 리가 없고, 내용을 알지 못함에도 어떤 말을 한다는 건 허언이거나 거짓의 범주에 든다. 하지만 나는 허언과 거짓을 말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 영화의 이름은 <테넷>으로, 놀란이 만들어낸 가장 최근의 영화이자 코로나 시대의 한복판에 떨어진 ‘시간여(ㄱ)행’ 판타지이다. 작용-반작용은 멀쩡하되 엔트로피는 거꾸로 역행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지구는 현실을 지탱하는 물리 엔진을 자연스럽게 연산해낼 수 있을까? 


먼저 나는 ‘시간여(ㄱ)행’이라는 표기에 대해 논한다. 물론 다루고 있는 내용은 시간역행이라 보아야 하겠으나, 시간여행이라는 손쉬운 말을 두고서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 사소한 지점은, 어쩌면 영화의 이해가 아닌 ‘전달’의 측면에서 단순히 표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차적으로는 놀란의 전작들(<인터스텔라>, <메멘토>)을 보았던 관객에게 더 잘 호소할 만한 제목이 ‘시간여행’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시간여행을 하든 아니든 간에, SF 영화에서의 시간여행이란 특정 시간대로의 ‘여행’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장르적 관습에 따른다면 <테넷>을 ‘시간여행’이라고 부르는 일은 나름대로 관객에게 설명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여행이라는 말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나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보다 시간의 능선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놀란의 <테넷>에서 인버전이라는 용어를 시간여행이라는 단어에 대한 일종의 발화로 볼 수 있다. 먼저 총, 그들은 쏜다. <테넷>에서 총과 총알은 인버전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최초의 발화 장치이다. 이 발화는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지탱할 전제, 인버전이라는 테마를 설명하기 위해 감독의 입을 빌려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놀란은 영화의 대전제를 ‘테넷’ 작전의 수행자와 관객인 우리에게 ‘발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전체에 걸쳐 자행되는 총격전들을 두고서, 이것을 그들 사이에 오가는 원리의 물리적 교류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놀란은 항상 그랬다. 누군가와 놀란에 대해 대화할 때, 그를 설명하기 쉬운 단 하나의 단어가 ‘시간’임은 분명하나,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본다면 우리는 시간이 바꾸어 놓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된다. <인터스텔라>에서 시간이 바꾸어놓은 가족의 관계, <메멘토>에서 시간이 바꾸어 놓은 세상의 풍경, <프레스티지>가 시간에 대한 가벼운 장난질이라면 <다크나이트>는 시간의 자본화라는 금융자본주의 사회의 교과서였고, <덩케르크>는 지금의 우리가 어떤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게 되었는지를 따져 묻는 르포르타주였다. 또한 이 영화들에서 놀란은 영화의 전제가 되는 물리적 공식을 영상의 모든 것을 통해 표현하며, 이 법칙은 관객뿐만이 아닌 영화 전체의 인물에게도 메가폰처럼 전달된다. 그리고 이 전달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시간이 아닌, 그들의 여행길에서 무엇이 변해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수식을 쓰고, 그것을 물리적으로 증명해낸다는 것. 놀란이 최대한 CG를 배제하려는 이유는 물리적 현실의 구현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크라카우어의 책 이름처럼 물리적 현실의 ‘구원’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사용한 여행이라는 단어처럼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적 현실의 또 다른 판본으로 향하는 길을 열심히 생각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말은 단언컨대 영화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든 영화는 열차와 같은 시간을 나누었고, 창밖을 바라보며 경치를 감상하는 것도 우리들 관객의 몫이었다. 그러니 영화에서의 시간여행 장르란, 영화의 안쪽이 아니라 영화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이행해오는 공간의 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함으로써 러닝타임만큼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다. 혹은, 실제로 있을 법한 다른 평행 차원의 어느 시공간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동시성은 단순히 극장 안에서 단체 관람을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영화 이론이라면 관객이 일종의 탑승객이 되어 자신의 안전을 담보한 상황에서 바깥의 흥미진진한 것들을 보고 즐기는 ‘탐험’으로서의 면모를 제공한다 말할 수 있겠고, 현대 영화 이론으로 온다면 ‘관객’은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영화를 찾기 위해 길거리 한복판으로 뛰쳐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테다. 어쨌든 간에 중요한 건, 이 모든 (영화에 대한) 설명에서 공통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관객 자신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영화를 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테넷>을 보지 않았다. 또는 다른 이들이 흔히 이야기하듯이, ‘보았다’고 해서 ‘이해했다’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이 영화를 두고, 무릎을 치게 만들 그럴싸한 해설을 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문제는 언제나 현장에 있기 마련이다. <테넷>이 개봉하던 무렵 한국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감염 사태가 퍼졌고, 자연스레 나도 극장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영화를 보러 가기도 애매한 타이밍이 되어버린 처지에서 나는 VOD가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있는 이 현장에서, VOD로 놀란의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단순히 ‘놀란’의 영화를 본다는 것, 그 이외의 생각은 하기 힘들지 않을까? 


너무나 자주 언급되어서 이제는 김이 샐 정도의 생각이지만, 코로나가 바꾸어 놓은 것은 우리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다. 의료, 복지, 기술, 음식, 영화, 카페, 피시방, 노래방, 거의 모든 키워드가 코로나라는 원점으로 귀결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동안 알아왔던 세상에 ‘코로나’라는 수식 하나를 더해야만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더해진 수식 하나가 우리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코로나 이전에 집에 있던 이들이 히키코모리, 백수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완전한 ‘슈퍼 히어로’라고 바꾸어 불리게 되었다는 농담은 180도 달라진 우리 세상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코로나가 세계의 공식을 바꾸었고, 우리는 이제 세계의 지형도를 다시 그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마치 테넷처럼, 우리 생활에 들어온 하나의 법칙은 우리에게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노라고 속삭였다. 이 상황 속에 사람들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 발굴되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은 좀비라기보다 시간의 역행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듯 보인다. 이효리, 비, 유재석의 싹쓰리와 잊혀진 가수 양준일의 복귀는 우리 식의 구닥다리 용어인 ‘실재의 귀환’이 아니라 테넷에서의 ‘인버전’이라는 용어로 더 잘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용과 반작용, 기브 앤 테이크는 이전과 동일하지만 엔트로피의 역행은 동일한 현장에 존재하는 것들에게서 동일함의 운동 방향을 역주행시킴으로써 동일함에 대한 두 가지 순례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이를테면, “나는 너와 같다”라는 전통적인 말이 앞으로의 동시적 흐름을 염두에 두는 반면 “너는 나와 같다”라는 말은 앞서 나가던 상대방을 자신의 자리로 백워크시킴으로써 두 자리의 좌표값을 일치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냉동인간과 같은 말로서 조롱되는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공동화된 시간 안에서 양방향으로 나뉘면서 같은 물리적 작용을 하는 시간 역행자들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코로나라는 하나의 물리적 법칙이 우리 세계에 적용되었다는 점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패치가 불러온 파급은 우리 세계의 관점을 정 반대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전에 유흥과 활기의 상징이었던 술집 골목은 모두가 피해 가야 할 코로나 슬럼가가 되었고, 이전에 티브이에 나오던 것이 텅 비어버린 관광지의 이례적인 모습이었다면 오늘날 티브이에 나오는 것은 밀집된 채 몰려있는 이들의 집단 감염 가능성이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우리가 들여다보게 되는 건 매체의 안과 밖이다. 어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매체가 말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실존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형체가 없으니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 가짜뉴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형체 없이 존재하는 모든 유동적인 것에 적용된다. 가령,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유동적인 형상으로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들, 수조 수경 개의 폴리곤 덩어리들이 자아내는 기이한 점묘법들이 눈앞에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코로나에 대한 시선을 다시금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코로나바이러스의 원형질 형태는 너무 미세하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이 숙주에 감염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칭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해, 이 폴리곤들은 우리의 인체를 통해 자신의 데이터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 지도는 다시 쓰여진다. 데이터가 폴리곤을 구축하는 것보다는 폴리곤이 데이터를 더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 날씨 데이터를 조합해 예상 강우량을 예측하는 것보다는, 딥러닝을 통해 바둑 대국을 수만 번 시켜보는 게 더 나은 결과를 초래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명백하게 존재하는 이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고, 이 사이버 세상으로의 가속화는 육체와 영혼의 동일시에 대한 믿음을 구닥다리처럼 만들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늘 동시성을 필요로 했다. 영화가 극장을 떠나 세상을 자신의 외화면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발언이 미술계로부터 먼저 나왔다는 점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는 극장을 떠났고 세상의 한구석에서 관념적으로 자신을 재생산시키고 있다. 무언가를 본다는 생각이 과거의 영화를 지배했다면 오늘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다고 말하는 게 영화라는 형식을 장식하고 있다. 예컨대, 이제는 우리가 말해왔던 그 동시성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깨어져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세상이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미, 중 무역분쟁과 같은 곳에서도, 중화사상이나 미국의 패권주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고 다른 곳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은 세분화되지만 사상은 그보다는 더 통합되어 있으며 이것은 마치 군데군데 박힌 점조직의 형태를 띤다. 리오타르가 유려하게 지적했듯이 거대한 것들은 붕괴했고, 자신을 세상에 빗대어 생각하는 이들만이 남아 그들 각자의 가치관만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프리즘 안에서 우리는 여태까지 알던 것들이 다양하게 갈라지는 모습과, 그것들 각각의 세상이 별개로 태어나는 것 또한 지켜보게 된다. 이른바, 분화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와 코로나라는 하나의 현상 안으로 우리를 집어넣는다. 이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코로나와의 동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고, 희미해진 육체의 분화를 이어주는 것은 세밀하게 나뉜 영혼들의 약하고도 끈질긴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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