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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2. 2020

거울 상의 루머 : 딸랑이는 방울 소리를 찾아


시네마스러움 그리고 영화 같음 


순수하게 영화를 보며 얻는 감상은 아마도 다음의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영화를 보며 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인데, 이는 지적이고 사적인 언어의 조합 게임이다. 반면 이에 소속되지 않는 두 번째는 영화를 보고 나서 불현듯 드는 생각들인데, 이는 이미지의 궤적이 남긴 잔상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 두 가지 분류가 단순히 언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과, 설명되지 않는 것을 말로 풀어보려는 일종의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본다면 우리에겐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무언가를 경험했던 때가 있었다.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아주 영화 같은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던 때가 있었고, 그걸 보면서 나는 ‘시네마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시네마’스럽다고? 고고한 척 영어로 서술했지만 우리말로 하자면 ‘영화 같다.’ 정도의 표현이다. 그러니 우리말을 사랑한다면 ‘영화스럽다’라는 대안어를 사용하는 게 좋을 테다. 다만 우리는 ‘시네마’라는 표현이 갖는 오묘한 뉘앙스 차이를 잘 알고 있기에, ‘시네마스럽다’라는 문장을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우리들 중 다수가 들뢰즈의 명저를 떠올리리라는 걸 나는 확신한다. 그는 두 권에 걸쳐 ‘시네마’를 다루었으며, ‘시네마스럽다’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시간과 운동 이미지의 조합이고 이는 이따금 우리가 현실과 영화에 발을 걸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영화’를 느꼈던 것은 마음 때문도, 경험 때문도 아니었다. 운동과 시간이라는 물리적 원리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무엇’ 속에 살고 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 덕택이었다.


들뢰즈에게 운동 이미지란 시간 이미지를 견인하기 위한 도구 같은 것이다. 이는 시간의 우열성을 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미지가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시간은 시작된다. 바꾸어 말해, 이미지가 자신의 신체성을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실존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느꼈다면 그 순간의 우리는 영화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화에 푹 빠져 자신을 잊었던 우리에게 첫 번째로는 신체가, 두 번째로는 그 위에 딸린 시간이 섞여 들어오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서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외계인의 시간 개념을 배운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외계인과 인간의 차이로 묘사되는 건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언어이다. 주인공은 외계인들의 외모에 별다른 편견 없이 다가가지만 오히려 그런 점으로 인해 언어의 차이가 더 돋보이게 된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그들 사이에 언어 뿐만이 아니라 시간 개념도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즉 여기서 언어의 신체성은, 언어의 체화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방법의 달라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주인공은 외계인의 언어를 마스터하며,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기억을 건네받지만 끝내 그 기억은 언어로 서술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아마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왜냐하면, 운동이 시간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은 그 무엇으로도 서술될 수 없는 세계 내의 절대자이다. 우리가 그 기억을 드러내는 방법이란 언어를 통한 도려냄이 아니라, 그곳과 남은 곳을 서로 음각과 양각으로 만드는 것뿐이다. 요컨대 이들은 내가 없으면 너가 드러날 것이고, 너가 없으면 내가 드러날 것이라는 밀물과 썰물과도 같은 관계이다.


이처럼 기억의 부재란 기억의 저편이 훌쩍 다가와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해준다. 이 해변에 물이 빠지는 순간 우리는 물이 돌아올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과거와 미래, 현재의 구별이 마땅치 않던 이 해변에 미래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표(index)인가? 우리가 해변을 거닐다 불현듯 목격하게 된 누군가의 발자국은 어느 시간을 그 안에 품고 있을까? 영화를 본다는 게 이것과 같다. 영화를 보며 그곳에 동화된 관객은 어느 순간 자신이 영화에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밀려남의 사건은 브레히트와 같은 배격의 감정,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반발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부재한 것에서 다가올 것들을 어렴풋이 직감하게 될 때야 비로소 그 시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이른바, 껴안음의 이중주에 관한다는 것을 말이다. 


껴안음의 이중주


이 껴안음의 관계를 두고서 우리는 ‘불안함’의 감정을 가장 처음으로 떠올린다. 이를테면 미구엘 고미쉬의 <타부>에서 서로의 품에 안긴 남녀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듣는다. “하지만 그 품에선, 미래는 애매하고 실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우로라는 점점 내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고미쉬의 이 설명은 두 화자가 하나로 결합했을 때 미래는 모호해지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래의 상실이 아니라 과거와 현실과 미래의 혼합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둘은 과거와 미래처럼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는, 아니 모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접촉을 통해 양쪽 모두가 공허로 상쇄되어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준다는 점을 ‘몸소’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러하니, 시네마스러움이라는 말을 두고 이렇게 서술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영화의 한 장면을 품에 안은 순간, 그 매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만남의 끝자락에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모종의 믿음을 남겨둔다. 남겨둔다기보다는 그가 우리를 찾아온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영화를 보며 본능적으로 나와 그 간의 거리를 느끼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그를 마음속에 품어버렸다. 이 안김의 감각은 파도치는 해변의 물거품처럼 곧바로 사라져버리지만 삶의 언젠가에서는 ‘불현듯’ 돌아와 버린다. 우리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예견할 수도 없다. 단지 그의 출몰 순간에 해변에 서서 찾아오는 것들을 품에 안기만 할 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그의 첫 번째 저서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언어의 껴안음에 대해 말했다. 데리다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찾아낸 ‘he war’라는 문장 하나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문장에서 ‘war’는 영어에서 ‘전쟁’으로, 독어에서 ‘존재했음’으로 독해되고, 말하자면 이 단어의 품에는 두 개의 뜻이 안겨 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발음할 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한 번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둘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로서 하나의 단어(여자)를 가지고 싸우는 두 개의 뜻(남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것들이 품에 안길 때 양쪽 모두는 서로를 통해 상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대립은 무한한 것인가? 오히려 이 대립의 상황을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위치는 전보다 확고해진다. 다가가면 밀려나는 존재, 하지만 내가 그를 밀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하니 우리가 ‘시네마’라는 단어를 영화와 우리 사이에 걸쳐 놓을 필요도, 혹은 명확하게 분리해야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둘이 한자리에 모인다 해서 서로가 감쪽같이 증발하는 일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 둘이 아슬아슬한 빗겨나감의 관계를 유지한다 해서 서로에게 잠재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영화를 보며 그들에게 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말하자면 알 수 없는 불가항력을 통해 그들로부터 밀려나는 것이 나에게 어딘지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며 그게 바로 운동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한 시간은 존재할 것이며, 그 시간의 어딘가에는 오늘과 같은 순간의 반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시네마스러움이란 언젠가 마주치게 될 것에 대한 미래적 암시이다. 사실 아즈마는 위의 책에서 그 암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라깡은 편지를 도둑맞았지만 어쨌거나 그 자체로도 제 할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편지가 도착하는 곳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말이다.’ 재미있게도 아즈마의 이 말은 라깡의 이야기에서조차 편지는 적어도 ‘우리’를 통해 하나의 흐름으로 관찰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르자면 이 편지는 마땅한 목적지를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운동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편지가 떠돈다는 말은 시간의 허리가 잘렸다는 말과도 같다. 비록 허리는 잘렸지만, 언젠가는 내 품에 안긴다: 또 다시 떠나가고, 기억은 단절된다. 


딸랑이는 방울 소리를 찾아서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영화라고 느낄 때 내뱉는 감탄사가 바로 ‘시네마’이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나머지 반은 진담이다. 그런데 무엇이 영화인지를 찾아 떠나는 모험은 단어의 모호함으로 인해 각자의 갈림길 안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기술을 찾고, 누군가는 의미를 찾는다. 누군가는 교묘한 순간의 어울림을 지적하고, 누군가는 시간의 우연 앞에 자신을 내놓는다. 이들은 각각 능동형과 피동형이라는 두 개의 수사로 정리될 수 있는 듯 보이는데, ‘내가’ 발견한 순간이라는 점과 ‘나를’ 마주한 순간이라는 점에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나’는 눈앞의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헌데 시네마스러움이란 것은 원래 그 운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 마치 모니터 위에 그려진 윈도우의 화면 보호기처럼 나 자신은 세상을 부유하는 존재임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시네마스러운 장면을 만난다.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우리는 이 감정을 결코 설명할 수 없는데, 왜나하면 이것은 운동이 아니라 시간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데쿠파주의 정밀함을 지적하는 정도라면 장인에 대한 감탄, 미학적 배열과 수식의 배치에 대한 수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 뿐이지만. 본디 운동에 딸려 들어와야 할 시간이 그보다 먼저 우리의 앞에 드러나고 있음은, 아주 분명한 예외적 현상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언제 마주했을까? 유년기? 사춘기? 아니면 아주 먼 미래?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심장소리를 따라 흘러 들어온 걸까? 이 경험의 신비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점은 이것이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들이 무수히 많은 과거와 미래의 반복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 발자국에 대한 어렴풋한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시네마는 삶의 어느 순간에 불현듯 떠올랐다가 이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 사라짐은 영화의 쇼트처럼 ‘Cut’의 형태로서 잘려지는 게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 사이 어딘가를 계속해서 떠돈다. 나에게는 이러한 기억이 몇 개 있는데 아마 남들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그중에 하나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지난 삶을 회고하며 만든 <꿈>이라는 영화에서 나온다. <꿈>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태의 영화인데,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불현듯 다가와 사라지는 것들, 구로사와가 겪은 시네마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와 꼬마 한 명이 나오고, 어머니는 꼬마에게 말한다. ‘날씨가 맑은 날에 비가 오면, 그건 여우가 결혼을 해서 내리는 것이므로 함부로 집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꼬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간다: 여우들의 행차를 목격하며 알 수 없는 순간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발견한다. 이 정적 속에서는 오직 꼬마의 눈과 여우들의 방울 소리만이 살아있다. 이 경험은 몹시 황홀하고, 숨 죽은 듯 고요하지만. 꼬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기억 속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꼬마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황홀감의 잔해를 두고서 그것을 합리적으로 규명해보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꼬마는 이날의 경험을 잊는다. 하지만 언젠가 여우비가 내리는 날에 그것이 다시 생각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꼬마는 자신이 경험한 이날의 사건에 대해 그 시작과 끝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꼬마는 이 기억을 평생 살아가야만 한다. 바로 이날 꼬마는 시네마를 경험했다. 자신이 숨은 나무 뒤에서 말이다. 


이 꼬마처럼 우리는 나무 뒤에 숨어 그 앞에 펼쳐지는 환상을 맛보았다.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기묘한 신비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껴안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후방과 전방 사이에서의 합의점은 그곳이 교차지점일 뿐이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켜줄 뿐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 양방향의 두 남녀가 만나는 순간이 아주 황홀하게 묘사되듯이, 그것을 마주하고 나면 얼마간은 그 거리의 넓혀짐으로 인해 기억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구를 도는 혜성처럼 그는 돌아올 것이며, 우리는 그를 파격적으로 끌어안지만 이내 곧 부드러운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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