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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4. 2020

시간의 등속 운동에 저항하기, <체크포인트>

 *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672


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고이거나 잔류하는 것이 되었다. 외부보다 내부에 머무르는 게 강제되는 이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갑갑해하고 있고 우리의 일상은 공간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집중되었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며, 밖에서 소모하지 않는 시간들은 집 안의 규율에 따라 느리고 파편화된 채 흘러간다. 태국의 예술영화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이하 아피찻퐁) de filmekrant에 게재한 편지1) 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며 슬로우 시네마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느림을 강요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슬로우 시네마라는 일상에 대한 탐구는 오히려 일상 그 자체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느린 영화가 너무 빨라졌다고 비난”하게 될 것임을 예견한다. 요컨대 그는 우리의 현실이 영화의 현실보다 더 느려지게 될 것임을 경계하는 듯 보인다. 만약 24프레임으로 진행되는 영화보다 우리 현실이 더 낮은 프레임으로 흘러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연하는 시간에 가까워지려 노력했던 슬로우 시네마는 오히려 그 자신의 배후에 있는 가속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슬로우 시네마의 ‘속도에 저항하는 능력’은 오히려 그 자신을 있게 하는 속도감으로부터 이탈해 자기 자신을 미래로의 등속 운동으로 만들 것이다.

 아피찻퐁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코로나 19의 환경은 만연하는 시간에 가닿으려는 영화를 오히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등속 추진체로 만들었다. 보이저호처럼 마찰계수 없이 끝없이 나아가는 것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현실의 안쪽에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현실의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영화들이 다시는 극장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측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속화된 영화의 대탈출은, 코로나 19의 참상이 끝나고 나서 극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관객의 존재를 암시하며, 따라서 우리의 불안은 속도에 저항하는 능력을 상실했던 우리가 다시금 원래 속도로 돌아가야 할 때 마주하게 될 마찰계수의 불쾌한 잡음에 의거한다고 말이다.



 반대로 물어보자. 코로나 시대가 제시했던 영화관으로부터 이탈은, 코로나 사태가 끝났을 때 우리가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합당하게 제시할 수 있을까? 한번 추방된 이들이 다시금 (상대적으로 느려 보이는) 낙원의 땅으로 돌아오는 일은 가당키나 한 걸까? 이 물음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웹툰 <체크포인트>는 이 물음과 묘하게 맞물리는 한 가지 질문을 품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체크포인트>의 2부는 하루를 기준으로 시간이 되돌아가는 도시를 다루는데, 이 이야기 속 악당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천재들의 재능을 꽃피운다는 것이다. (천재에겐 하루라도 시간이 아깝다.)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인지할 수 있던 것은 처음에 소수였지만, 루프의 횟수가 쌓여가며 점진적으로 데자뷰를 느끼게 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작품 내에서 이들은 ‘자각자’라고 불린다.

 작품의 주요 이야기는 납치당한 시간 능력자를 구해 루프되는 도시의 시간을 되돌려 놓자는 것이다. 1부에서도 등장했던 시간 능력자는 빌딩의 상층부에 감금되어 있고, 그는 매번 탈출을 시도하지만 악당은 “루프를 포기하면 오늘 죽은 이들은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 말하면서 그를 협박한다. 트롤리 딜레마를 닮은 이 협박에서, 시간 능력자는 오늘을 영원히 삼으로써 단절될 수도 있는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이 루프에서 벗어남으로써 구할 수 있는 미래의 몇몇 가능성보다는, 지금 당장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급박한 구원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혼자만을 우선시한다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악당에 의해 세뇌되어 집단 자결을 택하는 이들을 다시 살려내지 못한다. 시간 능력자가 루프를 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이 자결한다. 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탈출이 아니라 ‘루프’라고 악당은 말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가치는 루프되는 시간의 총량만큼 계속해서 증폭되며, 지금이 아니라면 안 될 일들에 대한 의사결정은 윤리나 소비와 같은 충전재들을 집어삼켜버린다. ‘자각자’들은 내일이면 되돌아갈 시간이기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빌딩의 상층부에는 반복되는 매일을 무한으로 즐기는 이들이 즐비하다.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지금의 것들을 즐긴다. 그리고 이것들은 영화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프레임 전체를 가두어 놓는 방법이나 만화가 서사의 등속운동을 포착해 나란히 펼쳐놓는 방법과 유사하다: 한국에서 주로 만화라 불리는 것, 웹툰은 위에서 아래로의 스크롤을 통해 영화의 고전적 움직임을 수평에서 수직으로 전환하며, 이러한 운동의 전환은 본작에서의 빌딩이 시간의 움직임으로 보여지는 것을 허락한다. 영화가 점진적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가듯이 만화는 탑의 꼭대기에 올라 임무를 완수하고자 노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다음처럼 서술될 수 있다.

 시간의 막자리인 상층부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시간 능력자가 자리한다. 이 빌딩의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권력은 강해지며 힘 또한 그만큼 집중되고 압축된다. 반면 빌딩 밖의 평평한 대지에서 사람들은 윗사람들의 말만을 들을 뿐이고, 그들의 힘은 서사의 가장 아랫부분에 산재해 있다. 고로, 우리는 만화의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여정동안 시간의 수렴점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이후를 탐하게 된다. 우리의 서사, 그 위에 얽힌 시간이 단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고 나면 나머지 힘들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만화에서의 바벨탑, 여기서 용사들이 최상층부를 정복하고 나면 작품 하나가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러닝타임,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주인공이 과업을 다 완수하고 나면 평행으로의 등속 운동은 끝이 난다. 어쨌거나 그들의 연속성은 작품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이들 매체의 핵심인 것이다.

 <체크포인트> 2부의 최종 목표는 능력자를 구해내고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이다. 매일 반복되는 느릿한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작품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느림을 강요받는 코로나 시대의 일상 담론을 여기에 펼쳐볼 수 있다. 도시의 악당은 지금-시간(Jetztzeit)을 한 곳에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의 현실을 시간의 등속 운동을 위한 추진체로 만든다. 하나의 프레임과도 같은 하루 안에서, 다양한 분야의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차례로 완성해나가면서 같은 속도로의 미래 방향 가속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 반복되는 시간은 다양한 각도에서 하루를 조망하는 프리즘적 시야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는 관성에 몸을 맡길 뿐이다. 요컨대, 우리의 시간에 대한 자각은 관점까지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들의 시야는 늘 항상, 영화에서의 정면과 만화에서의 허공만을 응시하게 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 도시는 나아가는 시간보다는 사라질 예정인 시간을 보존하는 것을 택했다. 이는 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미래가 아닌 과거의 현상 유지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재를 발굴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성장을 제공하고 사라져가야 할 시간을 억지로 붙잡아둠으로써 보들레르의 찰나를 영속시키려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점은 슬로우 시네마가 제안하는 만연으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바, 밖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도시를 두고서 코로나 19시대의 우리를 쉬이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나도 이 작품이 코로나 19시대의 위상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춰지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을 발명한다면 기술도 인간을 발명한다”는 마셜 맥루한의 오래된 인용구처럼, 작품이 시대를 발명한다면 시대도 작품을 발명해낼 테다.

 예를 들어, 나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지난 2020년의 1월 이후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듯한 현실에 조금은 싫증이 나 있다. 잊을 만하면 다시금 코로나의 확산이 고개를 들며, 3월과 9월의 대확산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과거와 미래 모두로 상호소통한다. 집 안에서의 풍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각으로 바뀌어질 무렵의 그 긴장과 나태함을 동시에 겪고 있다. 만약 영화의 발명이 열차 안에서 바라보던 창밖의 풍경을 열차의 밖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바꾸었다면, 우리의 코로나 시대는 열차의 안쪽에서 무언가를 바라만 보던 일이 아니라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서 열차를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흔드는 일만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는 늘 항상, 우리의 일상이 느려지는 영화/만화보다 더 느려지기만을 염원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혹은 그에 맞추어 플랫폼의 안쪽으로 스며든 영화/만화가 일상 속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1] https://filmkrant.nl/opinie/signs-life-a-letter-from-apichatpong-weerasethak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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