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것도 아닌 자
뇌의 주름 사이에 저장되는 정보처럼 육체의 주름은 기억을 새긴다. 이들은 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머리로부터 내려와 마음의 저장고인 육체에 기록된다. 우리는 이것을 추억 또는 회한이라고 부르면서 칭송하지만, 사실 이 단어는 그렇게 감동적인 것만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기억이란, 망각하지 못하는 자의 슬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고통스러운 순간을 우리는 잊고 싶어 하지만, 그것마저 품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니 우리는 망각의 이중적인 면을 두고서 이렇게 묻게 된다. 슬펐던 일이 사라지는 순간 기뻤던 일조차 사라지게 된다면, 이 망각은 그 무엇도 아닌 ‘무언가’일 것이라고.
무엇도 아닌 ‘무언가’인 사내가 덩그러니 앉아있다. 그는 내가 아는 누군가이지만 내가 ‘알던’ 누군가는 아니다. 만약 육체가 집에 빗대어질 수 있다면, 아마도 이곳에는 다른 세입자가 들어온 것만 같다. 같은 공간에 살지만 생판 친해지기 어려운 낯선 타인을 우리는 마주했다. 심우도의 <우두커니>는 치매를 앓는 노인의 탄생과 죽음을 다룬다. 자칫하면 오인될 수 있는 ‘탄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치매는 사람을 180도 바꾸는 질병이다. 치매에 걸리고 나면 그 사람은 여태까지 우리가 알던 누군가가 아니게 되므로, 가히 ‘탄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법하다.
이 표현은 부정명사가 아니다. 새롭게 태어나(Reincarnation) 새롭게 죽는다는 점에서 치매는 긍정적인 현상이 될 수 있다. 흔히 치매를 두고서 아기로 돌아가는 질병이라고 말하듯이, 치매 노인들은 기억을 잃어가는 게 아니라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인이다. 주변인들에게 치매 노인은 무엇도 아닌 무언가이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였을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저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noname)’로 돌아가려 한다. 마치 태어나기 전처럼 그에게 부여된 이름이 사라지게 되고, 그가 세상에 부여했던 이름도 사라짐으로써 세상은 일대의 혼란을 겪는다.
따라서 치매는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는 비극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당사자에게는 젊음의 환희를 선사하지만 주변인에게는 늙음의 외피만이 남는다. 안쪽에서는 행복했던 기억만을 남기는 작업이 수행되는 반면, 바깥쪽에서는 그렇게 버려지는 추한 것들을 온전히 받아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우두커니>는 그런 점에서 작품의 안팎을 공명시킨다. 심우도가 에필로그에서 지적하듯, 이 작품은 아버지의 치매 투병기를 그리려는 목적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병세가 깊어지고 고인이 돌아가심으로써 완결되었다. 즉 작품 안에서는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다면, 작품 밖에서는 고인이 없는 슬픈 현실만이 남는다.
2. 교차하는 기억과 운명
그러니 이 만화는 짙어지는 근심이 아니라 일종의 환희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이 만화는 고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그들이 행복했던 순간에 머물러 있다. 생각해보면 영정 사진이 항상 미소 짓고 있는 것도 ‘기억’이라는 이름의 환희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희망을 남겨두었듯이 이 프레임에 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삶에 대한 긍정이다. 마찬가지로 웹툰의 프레임은 그 안에 환희를 품고서 온갖 부정적인 것을 몰아낸다. 노인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듯 프레임 안에서도 기억은 사라져 가지만,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큼은 최후에까지 그릇에 남는다. 이것이 치매 노인이 아이가 되어가는 이유이다.
작품 안에서 부부는 임신을 함과 동시에 노인을 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 선택은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노인과 더는 함께 살기 힘들어질 것이고, 노인도 부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며 집 밖으로 나서기를 원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부는 괴로워한다. 여인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이가 된 아버지를 보내는 일이, 사내에게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내의 아버지를 보내는 일이 선택지로 주어진다. 예컨대 그들의 선택지는 무엇을 택하든 간에 하나로 귀결된다.
이처럼 아이를 택하는 일과 아버지를 택하는 일은 하나의 선택지와도 같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손쉽게 예측된다. 노인의 나이는 아흔 살이 조금 넘었고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은 기억의 상실을 통한 육체의 죽음을 암시한다. 육체에 새겨지는 기억이 일종의 주름이라면, 기억의 퇴행을 겪는 치매는 주름을 제거한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눈가의 주름도, 입술의 주름도 사라지고 나면 육신은 죽음을 맞이할 테다. 또는,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기억이 가장 없을 시절로 돌아갈 테다.
한 사람이 무(無)로 돌아가고 나면 다른 한 사람은 무(無)를 비집고 나온다. 노인이 태아가 되고 나면 다른 한쪽에서는 한 명의 태아가 생겨남으로써 이 만화는 종결된다. 삶과 죽음의 교차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말은 해보고 싶다. 이 만화에는 밤과 낮이 교차한다. 만화가 진행되는 41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하루가 지난다. 주로 집 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만화에서 시간의 진행은 밤과 낮이라는 극명한 표식을 통해 묘사된다. 바깥이 어두우면 밤이고, 바깥이 밝으면 낮이다. 이렇게 교차하는 시간에서 우리는 언젠가 교차해갈 이들의 운명을 엿본다. 누군가가 죽는다면 누군가는 태어날 것이다. 그 운명의 끝자락이 안개처럼 집 안을 적셔오고 있다.
3. 육체의 감옥과 떠오른 달
달이 뜨고 어둠이 찾아오면, 노인의 기억은 희미해진다. 태양광 아래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인 것처럼 어둠 속에서 노인은 약해진다. 6화에서 심우도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혼잣말인지 잠꼬대인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말소리가 자는 동안 중간중간 들려 왔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면, 아버지는 머릿속이 캄캄해지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다. 그곳에는 별도 달도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화면은 전환되어 베란다 위로 뜬 달을 보여준다. 안개처럼 적셔오는 운명이 어서 빨리 베란다를 통해 빠져나가기만을 그들은 기원할 뿐이다.
이 장면에서 베란다의 창살은 감옥을 연상케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위에 떠 있는 달이다. 이 묘사에서 화면의 절반을 채운 감옥은 감금된 육신을, 그 위로 두둥실 떠오른 달은 기억의 승화를 표현하는 듯 보인다. 나이가 들어가며 육신이 쇠하고 기억은 또렷해지는 것을 심우도는 그렇게 표현한다. 이렇게 지속되는 밤과 낮의 교차에서 노인의 하루는 영겁을 향해 내달린다. 병원에 방문하자 밤에는 유독 섬망증이 심해질 수 있다고 의사는 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기저에 깔렸음을 여인은 알고 있다.
여기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있다. 그에게 집행되는 것은 기억의 사형이다. 병원에서 보여준 환자의 뇌 사진은 80퍼센트가 손상되어있고, 그것은 죽음의 진행 상황과도 같다. 뇌 전체가 손상되고 나면 더는 사형시킬 기억이 사라질 테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기억이 다 죽고 나면 육체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뇌 사진을 바라보며 여인은 안절부절못한다. 그녀는 “우리가 너무 늦었다”고 자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만화에는 뒤늦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여인의 임신 소식이다.
여인이 산부인과에 방문했을 때, 의사는 “곧 있으면 심장박동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기다리던 그들이었으나 정작 아이가 찾아온 사실은 모르고 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탄생과 죽음이 일종의 교차점을 그린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의사의 말은 다음처럼 바꾸어 쓸 수 있다. 죽음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발견이 너무 늦은 것인지 “곧 있으면 (노인의)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을 부부는 알고 있다. 기억이 하나둘 사형되는 상황에서, 알맹이만 남은 육신은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를 잃고 쓰러져 갈 테다. 그렇다면 정녕 해답은 없는 것일까.
4. 괴물에 맞서 싸우다
29화에서 여인은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노인의 모습을 엿본다. 안과 밖이 모두 컴컴한 이 공간에서 노인과 대화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죽음이다. 매일 밤 집행되는 사형이 하나의 뉴런 세포를 죽인다. 이렇게 반복되는 사형은 언젠가 백 퍼센트를 채울 테다. 그러고 나서는 남은 육체마저 잡아먹을 테다. 따라서 이 죽음이라는 놈은 저승사자라기보다 저승의 괴물에 가깝다. 이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저승사자라는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이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신사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다.
해가 뜨고 어둠이 물러가면, 이곳에 죽음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어둠이 개이고 빛이 찾아온 이 공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환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밤사이에 찾아온 죽음의 흔적을 지우려면 바깥과 통하는 일이 우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사실만을 목격한다. 죽음의 잔향을 완벽히 몰아내었다고 생각했지만 괴물은 집안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괴물은 매일 밤 노인을 찾아와 기억을 잡아먹고, 상실된 부분이 커짐에 따라 노인은 포악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괴물이 노인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노인이 괴물이 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가냘픈 노인에게 찾아온 괴물은, 매일 밤 그를 괴롭히지만 형체를 드러내던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한밤중에 여인을 불러다가 호통을 치기도 한다. 이때 여인은 노인이 괴물에 잠식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노인과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35화의 묘사는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검은 물 위로 떠오른 작은 쪽지를 펼치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걸 그만두고 싶다. 아버지가 더 미워지기 전에 그만둬야겠다.” 여기서 검은 물은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어둠과 조응하며, 이 쪽지를 괴물에게 보내는 편지로 만든다. 그것은, ‘이제 이곳에는 노인이 없을 터이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일종의 전입신고이다.
문제는 불안감이다. 35화의 전조인 33화에서, 여인은 노인과의 마찰을 두고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쓴다. “지금 내 몸은 새끼 밴 고양이처럼 잔뜩 예민해 있고, 아기가 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잘 견딜 수 있을지….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다.” 이 문장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단연 ‘살얼음판’이라는 묘사인데, 계절로 치자면 겨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겨울이라 하면 죽음이라는 추상을 곧바로 떠올리지 않던가. 우리는 노인에게 바짝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이 대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노인은 이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야 만다.
5. 장마철
겨울이 죽음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만약 계절의 깊어감이 불안과 면밀히 연관되었다면 가을은 어떤 계절일까. 인간의 삶을 사계절에 빗대어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가을이 풍요의 계절임을 고려해본다면 가을은 기억을 거두어들이는 시기가 될 테다.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에 따라 겨울을 풍족하게 날 수 있을 테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다. 그렇다면 노인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만화는 노인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다음처럼 뜸을 들인다.
“가을이 오고 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도 가을볕과 시원한 바람이 들어갔으면…. 잘 마른 이불처럼 다시 보송보송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문장은 노인이 소변을 누어 이불 빨래를 하게 된 상황에서 여인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풍경을 보며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속내는 노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뇌 전체의 손상이 파란색으로 표현되는 MRI 사진 속에서 두뇌는 파란 물로 차오르고 있다. 파란 물이 다 차오르고 나면 노인은 죽게 되므로, 어서 빨리 배수를 진행해야 한다. 침윤되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남은 것만이라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상황에서 그녀는 말한다. “다시 보송보송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보송보송이라는 말에서 축축함이라는 심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두 단어가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여인이 노인을 생각할 때,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진다고 말이다. 이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노인과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 원인이다. 그러니 이 눈물은 일종의 ‘틈새’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기억을 꽉 붙들고 사는 우리이지만, 허를 찔림으로써 기억을 흘리게 되는 일도 있다. 삶의 기쁨이나 슬픔은 늘 예상치 못한 시기에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수분 손실에 허덕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실되는 수분은 얼마든지 수복될 수 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우리에게 기억이란 보충될 수 있다. 반면 노인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치매는 뇌에 구멍이 나는 질병이다. 구멍을 통해 기억이 빠져나가며, 새로운 기억이 보충된다 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침 여인이 노인과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중에는 비 오는 날의 정경도 있다. 비 오는 날, 아버지는 딸에게 다가와 우산을 건넨다. 이 모습은 마치 수분으로부터 딸을 지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모진 기억으로부터 자식을 지키는 부모처럼 보인다. 그러니 어쩌면, 이 우산에 구멍이 뚫린 이유는 그만큼 세상이 모질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지켜내는 부모라는 우산에 대해 생각해본다.
6.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침이 시작되고 집 안에서 열고 닫히는 문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듯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죽음이 다녀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죽음은 왜 갑자기 집안을 드나들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노인에게 죽음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이유로 들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마도 노인은 집안에 들어오려던 괴물을 막아주고 있었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의 우산처럼 딸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테다. 하지만 노인이 치매에 걸리고 나자 방어막은 약해지고야 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괴물의 침입을 허용했고, 그럼에도 죽음을 처치하고자 한다.
여인이 한밤중에 들은 노인의 중얼거림은 괴물과의 정적인 대치였다. 노인은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괴물과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노인이 절망에 빠지게 된 것은 그 괴물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을 때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바깥에서 들어온 침입자가 아니었다. 죽음은 노인의 안에서 흘러나와 집안을 잠식하려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노인은 자신을 집 밖으로 내쫓고자 마음먹는다. 예컨대 부부에게 모질게 대하면서까지 등을 돌려야 했던 건, 이제 막 태어날 손자를 포함한 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부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다. 밤마다 찾아오는 괴물에 대비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놓쳤다는 점에서 불안은 고개를 든다. 16화에서 여인은 “이상 행동이나 증상들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생각해보면서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많은 흔적이 있었지만, 이 작은 흔적들은 앞이 아니라 뒤에 있을 때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앞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부에게도, 노인에게도 잘못은 없다. 죽음은 도둑처럼 집안을 드나들기 마련이다. 무언가 훔쳐가는 게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 하여도 무엇을 훔쳐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38화에서 부부는 도둑이 다녀간 자리를 목격하게 된다. 노인을 요양병원에 보내고 난 후지만 집안에는 여전히 노인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름이 없는 자이기에 부를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줄 알았건만, 이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인은 아버지의 이름을 본다. 여인은 이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부재가 존재를 수행하는 방법이 바로 그러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이는 태어났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슬픔이 퇴거한 자리에 기쁨이 들어온다.
7. 에필로그
“이렇게 사는 게 고단한데, 아이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는 일이 잘하는 건가…”라고 말하면서도, “아이들은 빛이 난다.”고 말하는 여인의 대사에서 우리는 미래를 엿보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집안에는 어둠이 가신다. 겨울의 태양이 처마를 웃돌았다면 봄의 태양은 그보다는 살짝 더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 아버지의 빈방은 아이를 재우는 놀이방이 되었고, 여인은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작은 아이가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희망이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노인이 내쫓은 악몽의 빈자리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