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의 카툰 연재 갤러리에 올라온 작품 다수는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올라온다. 애초에 작가 개인이 만들어 올리는 것이므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만화가 지망생(으로 쓰고 웹툰 작가 지망생이라고 읽는)들은 자신의 만화가 플랫폼 담당자의 눈에 들길 원한다. 그래서 다양한 곳에 자신의 만화를 업로드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담당자가 각종 커뮤니티를 눈팅하고 있고, 그에 따른 데뷔가 잦은 걸 고려하면 그들의 행동은 타당하다. 타당하다기보다는 합리적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작가 본인에게도 여러 독자에게 피드백을 받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인디’로서 독립된 팬층을 형성하는 게 후광에 힘입은 플랫폼 입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보게 되는 건 팬들의 반응이다. 담당자는 자기 플랫폼의 빈자리에 넣을 원석을 구하는 것이지만, 독자들에게는 우연한 만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작가가 각각의 커뮤니티에 만화를 올렸기에 커뮤니티 별로 작가의 팬덤이 갈리게 된다. 커뮤니티 여러 개를 동시에 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하나만 하기에 그들 사이에 교류는 별로 없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작가에 대한 다양한 팬덤이 생기게 되고, 이는 팬덤 사이에서도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지게 되는 원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기성에 알아왔던 성별과 나이에 따른 구분과 다르다. 철저히 커뮤니티의 성격을 따라가는 작품의 선호 요인은 하나의 작품에서 다양한 방향을 끌어내는 단초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라디오에 낀 잡음은 점진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팬덤에 힘입어 작가가 성공적으로 플랫폼에 진입하고 나면 이 잡음은 불쾌한 소음으로 변모한다. 최근 네이버 웹툰 <데이빗>의 댓글란에서 벌어진 참극이 좋은 예시다. <데이빗>은 카툰 연재 갤러리에서 연재되어 사이트의 메인인 HIT 갤러리에 등재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 과정에서 20화 분량의 완성된 작화가 ‘선공개’ 된 셈이 되었는데, 참극의 원인은 그에 있지 않다. 철학적인 소재를 대중적으로 잘 풀어낸 이 작품의 국적을 따져 묻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물음은 핌피가 아닌 님비이다. 작품이 본래 연재되었던 카툰 연재 갤러리의 유저들이 평소에 적대하던 커뮤니티인 루리웹 회원들의 이름을 사칭하며, “그들이 이 작품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긴다.”고 주장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야 할 베스트 댓글란이 ‘국적 논란’으로 도배되었다는 점이 이 사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알려준다. 소위 말하는 ‘주작’인지 아닌지는 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혐오 발언을 베스트로 올려놓는 것에 동조한 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군중이자, 유저이고, 팬덤이지만 선인은 아니다. 피카레스크에 등장하는 악인들처럼 누가 누가 더 사악할 수 있는지를 대결하는 것만 같다. 뭍에 오른 악어들이 서로를 향해 이빨을 크게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여러 커뮤니티에 만화를 올리면 아무래도 작가가 어느 커뮤니티 소속인지를 따져 묻게 된다. 이는 명시적으로 표기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임에도 우리가 암묵적으로 합의하길 원하는 ‘이상한’ 본능 중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커뮤니티라는 게 소속감을 주는 장소이기에 그렇다. 커뮤니티 유저들은 커뮤니티의 성향에 어떤 형태로든 동의하기에 그곳에 남는다. 이와 비슷하게 커뮤니티에 진입하는 것들은 모두 커뮤니티의 법도의 따라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커뮤니티의 의견이 대상에 대한 미시 세계를 규제하려 시도하지만, 결국엔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 희키의 <우물 안 개구리> 단편처럼 세상을 향해 목청을 높이지만, 결국에는 올려다봄에 지나지 않는 이 시선의 주인공은 괴테의 심연처럼 구덩이 안에 갇혀 있다. 목줄이 걸린 개처럼 행인을 향해 맹렬히 짖지만 그들을 규약하는 목줄은 그들 커뮤니티 안에서만 유효하다. 목줄이 끊어진 순간 마당은 세상의 연장이 아닌 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과 분리된 것에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모습은 인간이 근친을 자연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모습과 그 이유를 같이 한다. 본질적으로 비슷한 유전자라고 생각되면 신체는 그와 결합하기를 격렬히 거부한다. 이런 거부감은 에로스가 갖는 가항반원의 안쪽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다. 위의 맥락으로 되풀이하면 커뮤니티가 작가를 자신의 안으로 편입하려는 것은, 완전한 합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근친상간에 대한 우상적 소비와 그 이유가 같다. 근친상간이 현실에서 온전한 거부를 성사시킴에도 기타 매체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소비되는 것은, 가족의 뿌리를 유전자가 아닌 사회적 유대에서 찾으려는 보살핌과 애호로의 회귀를 꾀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가 남매였다는 기막한 사실, 혹은 이복남매이기에 사랑해도 괜찮다는 논리는 이 대목에서 성립한다. 그들은 존재의 외로움을 사회적 유대로부터 메꾸고자 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가족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공동체에서 가장 기초적인 존재감을 결여하고 있다.
가족은 커뮤니티다. 이 커뮤니티 안에서 유저들은 소속감을 안지만, 세포가 모여 기관이 되고 인체가 되는 구조에서 세포 하나의 사멸은 그리 큰 존재감이 없다. 사랑하는 이의 관심을 얻고자 장난을 친다 한들 자신이 목격한 그녀는 자신에게 목격담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즉 상상은 늘 어긋나고 그렇게 환상이 되어 우리의 실재를 타격한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파도에 보내는 사랑과도 같다. 파도는 해변에 밀려와 잘게 부서지는데 우리가 사랑한 것은 오직 물결뿐이다. 우리가 파도를 껴안으려 할 때 그는 알갱이로 부서져 다시금 바다로 환원된다. 덧없는 시선은 자신이 목격한 장소에 따라 주위의 지대를 어느 정도 몰고 가는데, 이 운전(Drive)은 자신이 펼쳐 놓은 영역이 타인의 영역과 부딪힐 때 유효거리 위반에 따른 경고음을 낸다. 더는 자신의 지대를 망치지 말라는 경고음이 위의 적대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반대로는 우물 밖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애호를 강조하는 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면 적대는 호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적대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에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주는 동물적인 본능이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이에게 구태여 장난을 거는 비뚤어진 심리가 이에 해당한다. ‘아마도’라는 어미를 덧붙인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하나는, 적대와 호감이라는 두 가지 본능이 기관의 성질과 만날 때 동물화하는 인간의 성질로 변모한다는 점이다. 커뮤니티가 수행하는 몇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 세포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때, 그곳에는 동물의 탈을 뒤집어쓴 인간이 생겨난다. 이들은 본능을 주체할 수 없는 척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무를 피해 간다. 이는 일원인 것처럼 행동하며 면역계에 침투해 이상 반응을 끌어내며, 그렇게 생겨난 자가면역질환은 자신의 신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맹렬히 거부한다.
면역 거부 반응이 일어난 부위는 필연적으로 탈락하게 되어 있다. 어느 작가의 발자취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여와 그들과 우리의 팬심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그에 해당한다.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팬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이들은 하나가 되려 하지만 유전적 동질성에 의해 근친을 자연스럽게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탈을 쓰고 진입하는 방식으로 지대를 이탈한 이들은 그런 유전적인 면을 무시할 수 있다. 이렇게 교란된 체계에서 이들은 서로를 향해 맹렬히 적대하게 되며, 이 상황에서 학대는 애호의 동물적인 버전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반(反)애호 행위가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만화 작가의 팬덤이 아닌 성별 갈등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이들이 집단을 내재화하고 자신의 사랑을 숨기는 방법은 다름 아닌 면역계 교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