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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8. 2020

<데이빗>, 생기를 잃은 위대한 별종

 *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471


1.


네이버 웹툰에 올라오는 신작들이 완전한 ‘신(新)’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네이버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도전만화 시스템이 가장 대표적인 등용문이지만, 기존에 다른 곳에서 이미 연재되었던, 준수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을 섭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준수한’ 이라는 수사는 해당 작품에 어떤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나 작가의 숨은 역량이거나 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남은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남은 이야기를 꾸려 나갈 재능이 있어야 네이버에 입성할 수 있다. 이는 비단 네이버 웹툰에만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지만, 네이버 웹툰이 모든 웹툰 작가의 종착역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네이버 웹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웹툰 플랫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많은 웹툰 지망생들이 네이버 웹툰 데뷔를 꿈꾸며, 그런 의미에서 네이버 웹툰은 웹툰 그 이상의 위치를 점한다. 기회의 땅이라는 점에서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나 <원피스>에서의 라프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주어지는 건 당연하게도 고난과 역경을 거치며 성장한 주인공의 모습일 것인데, 그런 기회의 땅을 실현하려면 그만한 노고를 들여야 해서다. 예컨대 어느 날 갑자기 단번에 성장해버리는 주인공은 없다. 처음부터 준비된 인물이 있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원펀맨>, <베르세르크>)


위의 사례로는 ‘웹툰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빼어난 실력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현실에서 찾기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지만, 논의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건 아무래도 플랫폼이다. 웹툰이라는 ‘형식’이 더는 물질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게 되었다. 웹툰은 물질을 담아내는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으며, 그곳에는 수천에 능히 닿을 천수관음이 잠들어 있다. 출판 만화처럼 단행본 권별로 스케쥴을 조절할 필요가 없기에 분화의 세밀도가 더 높다. 이러한 점은 웹툰을 상품 자체로도 볼 수 있지만, 파생 상품을 위한 플랫폼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반대로 보면 이 플랫폼에 도착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장 서사를 지닌 만화에서 모험가들은 레벨 1부터 시작하곤 한다. 완성형 주인공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완성형 주인공도 세상을 모험하며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건 단순한 힘이나 재화 이상의 경험이다. 이를테면 <원펀맨>의 주인공 사이타마를 중심으로 여러 실력있는 이들이 모여들고, 그들 개인의 사연이 만화 전체의 레이블을 구성한다.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가츠에겐 삶의 온갖 절망이 모여들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기억의 분절을 상쇄한다.


수상한 점은 이 플랫폼의 왕도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이타마와 가츠라는 플랫폼은 분명 많은 것들을 오가게 하지만, 그것을 운송하는 왕도 밖에 어떤 지대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는 출판 만화에서 권과 권 사이의 필연적인 분절, 웹툰에서는 화와 화 사이의 찰나의 단절에 해당한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품 안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이야기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이 간극은 아주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그것을 상쇄하려는 시도로 돈을 내고 미래를 들추어 보는 ‘미리 보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의 선형을 이루는 연극이나 영화에 비하면 그 단절은 크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농담 하나만 건네자면, “배고파요, 쿠키.” 쿠키는 네이버 웹툰에서 미리 보기를 위해 사용되는 재화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작품 안에서 만나고 사라지는 것들 바깥의 무인지대를 적극적으로 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무인지대는 인간이 살아보지 못한 곳이어서 어떤 형태로의 방문도 신선함을 마주할 수 있다. 이 무인지대에 생겨난 단절은 불현듯 생겨난 심해의 배수공과도 같아서 심해 생물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모험가들이 추구하는 건 왕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정도는 아니다. 이 균열에 자리한 것을 마주할 때 우리가 작품에 틈입할 생각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이 짧은 순간에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가능성은 어쩌면 가장 마지막 자리에서 돌아보는 삶의 주마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마등은 들이닥치는 다음 화에 의해 분쇄되고 다시금 새로운 주마등을 우리는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섬망 현상이다.


2.


디시인사이드의 카툰-연재 갤러리에 올라와 사이트의 간판을 장식했던 d몬 작가의 <데이빗>은 ‘인재 발굴’의 전형적 사례에 해당한다. 정확한 절차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른 곳에서 인정받은 인재를 자사의 플랫폼으로 영입한 네이버의 공이 더 커 보인다. 물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를 우선시 해야겠지만, 그런 재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현재로서는 네이버 웹툰이라는 점이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두고 네이버 웹툰이라는 거대 플랫폼의 위계와 권력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네이버 웹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연재할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위계이다. 그리고 그 위에 자리 잡는 건 권력이다.


네이버 플랫폼의 거대한 힘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재 영입(혹은 헤드 헌팅)은 양쪽 다 윈윈하는 구도다. 그러나 그곳이 가장 나은 처우를 해주기에 희망한다는 것과, 그곳이 자신의 이상향을 온전히 펼칠 수 있기에 향한다는 말은, 확실히 다르다. 많은 독자를 만나기 위해 사람이 많은 거리로 나가야 하는 것에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연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돈이나 인기의 문제와 손쉽게 결합하기는 해도, 작가 개인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에 따라 다른 논의를 도출할 근거를 마련해준다.


그에 앞서 d몬 작가와 같은 사례의 선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국내에서 가장 큰 웹툰 작가 등용문이 네이버가 운영하는 도전만화 시스템이라는 점이 있다. 이는 출판 만화에서 투고 시스템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매해 다양한 공모전을 열어 특정 장르의 작가를 영입한다. 대회라는 점에서 후자가 인재발굴 성격에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은 투고 시스템이야말로 인재발굴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공모전은 현재 자사 플랫폼에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면을 보완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모전이 스타 시스템이라면 투고는 길거리 캐스팅이다. 공모전이 신인을 루키로 만든다면 투고는 신인을 천재로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 정확한 절차까지는 알 수 없다는 각주를 붙였었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플랫폼의 눈에 들기 위해 다양한 사이트에 자신이 그린 만화를 올리곤 한다. 웃긴대학, 루리웹, 디시인사이드, 개인 블로그 등. 이들 사이트는 커뮤니티 별개의 성격을 유지하지만 개별 플랫폼으로의 성격을 갖지는 않는다. 독자들이 만화를 다른 커뮤니티로 퍼 나르면서 만화의 정체성은 어느 한 곳에 귀속되지 않게 된다. 이 경우 플랫폼이 되는 건 만화 자체이고 그는 하나의 생(生)이 된다. 이 만화가 여러 커뮤니티에서 독자 성향에 따른 다양한 반응을 끌어낼 때, 커뮤니티 사이로 보이는 단절은 여러 커뮤니티를 하는 독자가 자신을 틈입할 여지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웹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그렇게 반응은 연쇄한다.


도전만화에서 올라왔든 공모전에서 선행 연재되었든, 다른 커뮤니티에서 이미 보았던 것들이 정식 웹툰으로 올라올 때 댓글란에는 늘 언급이 등장한다. 선행 독자들이 새로 진입해온 이들에게 스포일러를 하기도 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작품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플랫폼의 지위를 자신에게서 네이버로 이양하는 작품을 보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네이버 웹툰이라는 플랫폼에서 그는 별개의 작품이 아닌, 네이버 웹툰 중 하나로만 평가될 뿐이다. 여기서 독자가 틈입할 틈새는 미디어 믹스를 위한 것으로만 활용될 뿐이고 그 외의 남용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작품을 향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고, 그렇게 작품은 생기를 잃어 껍데기뿐인 인형으로 남는다.


그리고 여기 생각하는 돼지 데이빗이 있다. 데이빗은 말하는 돼지이지만 그를 설명하는 문장에서 주어는 ‘돼지’이다. 그는 돼지 중에서 말하는 개체일 뿐 말할 수 있는 돼지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발화라는 특권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돼지라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그가 자라온 좁은 집에만 그칠 뿐이다. 동시에 우리는 카툰 연재 갤러리에서의 데이빗과 네이버 웹툰에서의 데이빗에 대해 생각해본다. 둘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한쪽에서는 위대한 별종으로 취급받던 이가 다른 한쪽에서는 순위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돼지우리에 사는 돼지는 누구인가. 그들을 대표하는 데이빗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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