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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09. 2020

동시대의 핍진함에 강하게 <현혹>된다는 것


*이 글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시되었다.

http://dml.komacon.kr/webzine/review/27920






목격담




어떤 것에 대한 목격담이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는 주로 기괴하거나 두렵거나 하는 등의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이전까지 없었던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인간의 안전과 직결된 것도 그렇지만, 우버(Uber)처럼 여러 현실적 제한으로 인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틈새들, 스마트폰처럼 완전히 공상에 가까웠던 것이 우리 일상에 친숙한 무언가로 다가오는 과정들은 모두 낯설고도 반가운 감정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때 ‘신기하다’라는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군’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표정은 다음의 두 가지 감정으로 분산된다.




하나는 그것이 기존의 사회에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기존의 사회에 받아들여졌을 때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전자의 경우는 무언가의 등장을 마주한 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이지만 후자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저 뉴스 속 이야기나 주변의 가십으로 치부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물결이 나에게 닥쳐온다면 계산기를 두들기며 손익계산을 하기에 바쁠 테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영화를 사진의 연장선으로 보았고 그것이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상영하는 사이에 그들의 아버지가 “영화는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했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가 보여주었던 삶의 짧은 조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찍었던 도심 속의 짧은 일상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이는 여행이 대중화된 시대에 산보자들의 거동속에서 당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 충분했던 것이다.




어반 판타지




홍작가의 <현혹>을 보며 내가 위의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은 이곳에서 어반 판타지라는 배경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공식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앞서 어반 판타지라는 장르를 정의해보자. 우리는 그것이 도시화의 이후에 등장한 현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만 한다. 도시화가 시작되기 이전에, 시골이라는 공간은 비교적 판판하고 넓은 지대를 점유하긴 해도 자연의 충만함이 늘 함께 하곤 했었다. 하지만 도시라는 공간은 사람으로 가득하긴 해도 근본적으로 공장의 기계의 부속물로서만 존재하는 삭막한 인간들을 만들어냈고, 그곳의 사람들은 일종의 ‘다중’으로서 아무런 교류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완전한 타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 속에 타인이지만 결코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잭 더 리퍼’로 대표되는 이들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데, 그게 바로 도시라는 공간이다. 이들은 도심 속에서 소문의 형태로 나타나 그와 마주치는 이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고 가버린다. 몇 년 전에 크게 히트했던 프렌차이즈인 <트와일라잇>이나 <해리포터>시리즈도 대중의 이런 상상력을 반영한 작품 중 하나다. 그들은 우리와 구분되는 타자이지만, 우리 세계 안에 속해 있으며 그러나 마주하거나 부딪힐 수는 없다. 이른바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세계의 타자들이란, 공간의 기능이 다양하게 분리되고 있음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영화를 찍는 도구, 기술 등이 발달함으로써 우리는 영화 속의 공간이 현실과는 유사하거나 완전히 다르게 변화하는 것을 보았고, 그 안에 등장하는 이들도 우리가 알던 것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에 오히려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이 완벽한 타자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처럼 뱀파이어나 마법사는 아닐지라도 왠지 모르게 현실에는 없을 법한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매력 있게 다가온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의 안쪽에는 있다.












클리셰




여기서 현실과 영화를 갈라놓는 것은 단언컨대 ‘핍진성’이다. 핍진성이란 이 세계 안에서 진짜로 있을 법한 일, 혹은 그에 대한 설득력 전반을 일컫는 단어다. 그리고 이전처럼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남아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각자의 세계가 있고, 우리 자신만의 법칙이 있으며, 그 공식으로부터 판에 박힌 습관이라는 이름의 클리셰가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취향을 개인에게 익숙한 삶, 그 클리셰를 통해 구분 짓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클리셰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될 테다. 비유하자면 오목이 아니라 바둑을 선호하게 되는 셈이다.




이른바 클리셰라 불리는 장르적 법칙이 현실의 틈새를 정확히 공략한 공식이었다면, 현실의 틈새들이 계속해서 분할되어 점으로까지 나아가는 21세기에는 우리가 다루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공식들이 도출되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클리셰들 모두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 법한 일들이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는 ‘영화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시대에 ‘영화 같음’이라는 감탄사는, 취향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구멍 속에 바둑돌을 둠으로써 집을 짓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




이 연상의 다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웹툰 한편을 쭉 보고 있노라면 독자들의 무수한 ‘영화화’ 요청을 댓글란에서 목격하게 된다. 실제로 웹툰이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들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 요청을 단순히 ‘영화 같다’라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테다. 핍진성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이들의 요청은 만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도 보고 싶다는 일종의 호소로 읽혀진다. 다른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내가 사는 세계에 들어와 기존의 관습과 규약을 교란함으로써 무너져 내리는 클리셰의 가지런한 정렬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이른바 알까기다.




낡음, 늙음




웹툰 <현혹>은 흡혈귀 K와 그의 딸인 송정화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를 전부 서술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복잡한 관계는 작품 내에서 과거회상 형태로 나오며 주된 진행은 주인공이 경성에 머무르는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배경은 일제강점기이고 주인공 윤화백은 이곳 경성에서 송정화라는 귀부인을 만난다. 그가 초상 화가로서 들어선 이 저택에는 젊은 시절부터 늙은 시절까지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고, 그의 임무는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늙은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시대 이후를 묘사하는 작업을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동시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라던가 소설이라던가 하는 매체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서사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시간의 밖에서 작품을 들여다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은 우리와 점점 멀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열린 결말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는 말을 얼버무리는 것과 같은 흐릿함에 불과할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끝났으며, 동시에 이야기 안에 종속되어 있던 시간도 끝나버린다. 작품을 보는 우리는 낡음, 늙음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현실에서는 시간이 이야기를 서술하고 기록한다. 각자가 하는 일은 다를 수 있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변화하는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성격은 유순해지고 얼굴은 주름진다. 뱀파이어인 송정화에게 결여된 것은 이 부분이다. 그녀는 변화하지 않으며, 그러한 점에서 작품 안에서 영화와 같은 인상을 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윤화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게 송정화의 모습은 마치 영화 같은 것이었을 테다. 바쟁이 말했듯이 송정화는 시간을 빗겨나간 존재로서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현혹>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던 셈이다.












현혹


우리가 여태까지 했던 말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도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도시 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에 현혹된다. 즉, 다중 구조 안에서 구조의 안을 횡단하는 예외적 존재를 우리는 원한다. 2) 거대 서사의 붕괴로 인해 우리는 자기만의 클리셰를 갖고서 나에게 있을 수 없는 것에 현혹된다. 이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물적 갈망이 아니라 빈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바둑과 같은 게임이다. 3) 시간 안에서 누구나 맞이할 것들이 보편타당한 핍진성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동시대의 이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서 우리를 현혹한다. 헌데 이 미래는 읽히거나 예측되는 게 아니라 핍진성의 안쪽에서만 사고될 수 있기에 더 매력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 중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세 번째이다. 이 만화에서 뱀파이어의 피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긴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들은 서로를 거부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유를 통해 하나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를 두고서 일종의 가족 유사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의 대중은 점진적으로 파편화 되어 가고 있으나, 그만큼 여러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현상을 두고서 개인적 동물들이 공유지대에 방목되어 있다고 표현해보면 어떨까. 무언가를 소비하는 행위는 본능적이지만 그들이 발견하고 따라가는 지대는 엇비슷하다고 말이다.




다음으로 웹툰 플랫폼의 소비 구조를 떠올려보자. 일주일마다 무료로 공개되는 화가 있고, 재화를 통해 다음 화를 미리 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작품 연재의 기본값을 전자에 둔다면 후자의 행위는 미래를 엿보는 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작품이 연재되는 기본값인 동시대 이후를 엿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때 웹툰 한편이 결말을 향해 달려가며 점진적으로 풀려가는 복선들은 관람자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암시가 동시대에서도 충분히 남아있었노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지나쳐 온 과거는 동시대를 기준으로 핍진화되며, 현재는 미래에 현혹되어 그들 시간으로 강하게 이끌린다.




영화화


<현혹>의 인물들은 뱀파이어를 중심으로 강하게 현혹된다. 뱀파이어를 쫓는 사냥꾼에겐 뱀파이어를 쫓는 것에 대한 신념이 있고, 송정화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원수인 K 그리고 그녀가 집어삼킨 마리사, 동족으로 만들어서라도 살려내고 싶었던 진린 등을 생각한다. 윤화백을 비롯해 그동안 저택에서 송정화를 근거리에서 보았던 이들은 알 수 없는 것에 현혹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작품에서 목격하는 현혹은 컷 하나하나의 콘티를 머릿속으로 받아들이며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영상화, 혹은 영화화라 할 수 있다. 섬세하게 풀어보자면, 이 영화화라는 말은 원작을 바탕으로 예측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 보려는 일종의 구제 행위인 것이다.




여러 유사한 것들을 모았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것들. 이게 바로 클리셰의 특징이다. 이전과 같은 묘사는 배우의 나이, 성격, 촬영한 국가 등으로 인해 동일하게 되풀이되지 않는다. 따라서 클리셰라는 건 같은 서사 구조를 갖더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윤화백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송정화에 현혹된 윤화백을 두고서 사람들은 전에 찾아왔던 화가들처럼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화백들과는 달리 윤화백에게는 자신이 소속된 공간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었고, 그가 벽에 걸린 그림들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감지했을 때 이 이야기는 비로소 클리셰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꼭 뱀파이어만이 피를 통해 서로와 이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사실 피를 통하는 게 아니라 피를 경유함으로써 일종의 가족군을 형성하는 이들의 모습은 작품 내에서도 송정화의 상상을 통해 실현된 바 있었다.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하게 만났을 이들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그녀의 말이 실질적으로 ‘뱀파이어가 되었기에 만나게 된 이들’에 의해 파훼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의 다음 장면과 웹툰의 다음 화를 넘기는 작업은 지금을 있게 한 운동 에너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장에 대한 현혹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핍진함이 바로 그렇다. 그럴듯함이 아니라, 있어야 함에 대한 생각.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라도 공간의 휘어짐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와 같은 공간에 놓여있다는 것. 어쩌면 동시대라는 건 동일 공간에 대한 현혹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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