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을 둘러싼 문화 콘텐츠의 문제
1. ‘한국 웹툰’ 자체가 하나의 작품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에서는 K라는 말까지 붙여가면서 웹툰이 한류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이 웹툰의 종주국이라고 말하면서 웹툰=한국이라는 공식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시사저널에 올라온 3.16일자 기사 “잠재 시장만 100조원…K웹툰 新한류을 이끌다”를 참조할 것). 하지만 ‘한류’라는 미심쩍은 말이 과연 여기에 들어갈 만한 것인지는 재고해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한류라는 말은 국격을 상승시키는 요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웹툰이 정말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언론에서는 이것이 한류라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있기까지 한류라는 말이 일종의 국위선양용 단어로 사용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웹툰이 한류를 주도한다는 말이 과연 진실일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순전히 내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기에 해외의 반응을 고찰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에서 조사한 몇몇 자료들을 보면 한국의 웹툰 사업자가 이끄는 해외 플랫폼들은 확실히 시장 선도자로써 우위를 점하는 게 눈에 띈다(네이버의 피코마와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이 웹툰 산업을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K-웹툰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는 단지 플랫폼의 문제일 뿐 아니던가? 한국 웹툰 산업이 발달한 것과 한국 웹툰의 질이 우수한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소리다. 따라서 웹툰 한류라는 말은 절반은 옳고 나머지 절반은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산업으로서는 한류가 맞지만,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한류라고 볼 수 없다.
누군가는 이태원 프리덤(다음)과 스위트 홈(네이버)이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졌고, 이 드라마 콘텐츠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을 웹툰 한류의 근거 중 하나로 삼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두 콘텐츠의 드라마화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콘텐츠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는 원작 웹툰이 그만큼 잘 만들어졌고 그래서 다른 매체로 번안했을 때도 쉽게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목격한 건 ‘웹툰이 원작이 될 가능성’이지 ‘원작 웹툰’의 가능성은 아니다. 웹툰이 원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콘텐츠 사업자들이 웹툰 시장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일조할 뿐이다. 원작 웹툰, 그러니까 어떤 웹툰이 정말로 ‘작품성’ 있다는 생각으로만 드라마화, 영화화 등을 결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작품성이라는 말보다는 상업성이나 가능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대개 작품성 있는 웹툰이 그렇게 ‘간택’ 받을 확률이 높기야 하겠지만, 사업자로서는 작품성이 그렇게 높지 않더라도 돈만 잘 벌어다 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구심은 작품성 없는 웹툰이 거머쥔 상업성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점이다. 다양한 게 이에 해당할 수 있겠지만, 캐릭터들의 매력을 강조하는 캐릭터성이나 혹은 세계관 자체에 기반을 두는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캐릭터성을 강조할 경우 캐릭터는 다양한 매체와 작품에서 등장할 수 있으며, 캐릭터 고유의 매력을 통해 피규어와 같은 파생 상품등의 출시도 가능해진다. 또한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경우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하나의 작품에만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매체로 나아가게 하고 이에 따른 확장의 가능성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 대목에서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말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가 밝혀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 하나의 틀 안에 있는 것들로만 평가하자는 ‘작품성’에 전면적으로 위배된다. 작품성이라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작품이 가지는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이 내세우는 하나의 틀 안에 있는 것들로만 그를 평가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한 편은 그 영화 한 편만 보고서 평가해야 한다, 혹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공연한 규칙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즉 하나의 작품 안에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모두 담겨있어야 한다는 완결의 속성을 뜻한다. 물론 이 구분은 엄밀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겐지모노가타리와 같은 근대적 의미의 소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서 주인공이 대를 이어 바뀌어 나가는 연재소설이었다(겐지모노가타리는 11세기 일본 고전 소설이다).
이러한 사실은 장편소설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점과 동시에 작품성이라는 말이 과연 하나의 작품으로만 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들게 한다. 꼭 하나의 작품으로 끝나는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작품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만약 한 편의 이야기가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어 있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만을, 혹은 ‘시리즈’ 전체를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테다. 이로 인해 등장하게 된 게 바로 위의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이었고, 이 개념에 따라 만들어진 콘텐츠들에 소비자들이 적응함으로써 오늘날 세계관이라는 말은 정말로 중요해졌다. 여기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상상 하나는, 한류라는 말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바로 그 세계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작품성이라는 말이 작품 하나로만 한정될 필요가 없다면, ‘한국 웹툰’ 자체가 하나의 작품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를 보고 듣게 만드는 것, 즉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플랫폼이 되도록 하는 게 한류의 정의라 할 수 있다. 한류가 국격을 세우는 것에 일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문화 교류의 플랫폼이 된다면, 여기서 그러한 플랫폼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한류 콘텐츠다. 한국의 문화를 세계관으로 만들어야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르다가 다른 한류 콘텐츠로 넘어갈 가능성이 생긴다. 즉, 단순히 하나의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고서 다른 작품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들려면 한류의 형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K-웹툰이라는 한류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이라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에 일조하는 게 되어야 한다. 예컨대 한국이라는 나라가 플랫폼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안의 문화 콘텐츠를 일종의 시리즈로 구성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류는 그러한 시리즈로 가는 별개의 작품들, 즉 입구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2. 웹툰, 산업인가 문화 콘텐츠인가?
‘입구’라는 개념을 다소 느슨하게 적용한다면, 단지 콘텐츠를 구성하는 것만이 세계관 안으로 편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에는 많은 요인이 자리한다. K-웹툰을 통해 외국인을 한류에 편입시킬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한류 세계관 안에서 웹툰이라는 길로 나아갈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웹툰을 해외에 서비스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위의 두 가지 방향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이는 현재 웹툰을 서비스하는 방식이 플랫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웹툰의 고전 시기라 할 수 있는 2000년대 중반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나 개인 블로그 등에서 산발적으로 올라왔었고, 이를 하나의 장소에 묶어 독자들이 보기 편리하게 해주었던 게 바로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해외에 작품을 선별 및 공급하는 매니지먼트 사업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해외의 외국인들이 한국 웹툰을 접하게 되는 것에는 플랫폼 사업자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개인 블로그에 올라오는 웹툰을 독자적으로 구독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어떤 작품을 외국에 소개할 것인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웹툰과의 ‘첫 만남’을 담당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랫폼 사업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소개할 웹툰을 선정하게 될까? 잘 팔릴 만한 콘텐츠를 선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대중적인 플랫폼을 택한다면 한국 콘텐츠만의 특색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굳이 한국 만화를 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동일한 장르에 비슷한 컨셉이라면 한국 웹툰 플랫폼은 다수와 경쟁하게 될 테다. 반면 한류 세계관에 있는 웹툰이라면, 독자들이 이 플랫폼(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야만 할 이유는 충분해진다. 여기서 플랫폼 사업자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한류 콘텐츠를 원하는 해외 독자가 있는 반면, 자기들에게 익숙한 느낌의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국내 웹툰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도울 수 있다는 장점과 기존 IP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현지화의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후자의 사례, 즉 현지 작가를 섭외하여 작품들을 들여놓는 일이 권장된다. 문제는 이 둘 사이의 비율인데, 웹툰을 산업으로 접근하는 경우와 문화 콘텐츠로 접근하는 경우의 수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논할 가치는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 있었던 밤토끼 사건과 같은 사례가 해외에서는 빈번하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현실적으로 해외에 있는 불법 업로더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을 단순히 ‘팬’이라는 말로 지칭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들이 해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만화를 번역해서 자국 커뮤니티에 소개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한국 만화의 팬이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가 한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불법으로 번역된 작품을 보고서 한국 만화의 팬이 된다는 말은, 그 작품을 볼 수 있는 게 바로 정식 플랫폼일 때만 옳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해적판’ 만화들은 콘텐츠 ‘시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자는 해적판 만화들도 결국에는 그것이 한국 만화임을 인지하고 보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류 형성에 일조한다고 말한다. 정식 서비스되는 작품이든 아니면 해적판 만화이든 간에, 한류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입구 역할을 하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볼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이러하다. 불법 콘텐츠 이용자도 잠재적 고객이라는 점에서 사업상으로 도움이 된다는 생각, 자국의 문화 콘텐츠에 어떻게든 유입된다면 이런 관심이 다른 한류 문화로 확장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웹툰에 관심이 있을 때 비로소 돈을 쓰게 된다는 점은, ‘기다리면 무료’나 ‘미리보기 이용권’ 등의 웹툰 수익 모델에서 이미 검증된 바 있다. 따라서 웹툰에 돈을 쓰게 하려면, 설사 그것이 불법이라 한들 일단은 볼 수 있게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이 관점은 언뜻 보기에 산업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만, 웹툰을 문화 콘텐츠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가 산업이 되려면 해당 문화를 먼저 알리는 게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들의 의견을 반박하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해외 팬들의 웹툰 불법 번역을 막아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은, 불법을 저지르는 이들은 그러한 불법 번역본이 있는 한 정식 플랫폼에 찾아오지 않으며, 심지어는 정식 플랫폼에 찾아오는 이들도 무료로 만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버릴 테니 양쪽에서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불법 번역의 경우 불균질한 번역 퀄리티로 인해 한국 만화 전체에 대한 인식이 낮아질 수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즉, 해적판은 문화 콘텐츠 시장의 형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장에 대한 인식을 실추시킴으로써 웹툰 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화 콘텐츠 없이 문화 콘텐츠 ‘시장’이 성립할 수는 없다. 문화 콘텐츠 산업은, 산업이기 이전에 문화 콘텐츠이므로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 웹툰을 문화로 보았을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웹툰은 문화 콘텐츠에서 출발했고, 지금에 와서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지만 이 시장은 그들의 과거가 없을 때 유지될 수 없다. 즉, 웹툰 산업은 어디까지나 웹툰이 문화 콘텐츠라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웹툰을 문화 콘텐츠로 보아야만 K-웹툰이라는 말은 비로소 한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한류’가 될 수 있다. 헌데 그렇다면, 우리는 웹툰 사업자 즉 플랫폼들에 어떠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 콘텐츠 유통 사업에서 중요한 건 해당 문화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일이니 말이다.
플랫폼이 해당 콘텐츠로 가는 입구라면, 첫인상은 몹시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건 검열의 문제이다. 검열이라는 말은 작품 안의 민감한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에서부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품을 아예 플랫폼 진입시키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문제는 검열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검열이 악용될 우려에 있다. 아무리 인터넷 공간이라 한들 지면이 한정된 것은 동일하므로, 어떤 웹툰을 자사 플랫폼에서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해주어야만 한다. 이는 과거 출판만화 시절부터 있던 고민이지만, 오늘날에 이 권한은 편집자가 아니라 마케터에게 있다. 다음 단락에서 보다 상세히 논하겠지만, 이를 짧게 간추리면 다음처럼 쓸 수 있다. “웹툰을 검열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플랫폼 전체의 문제가 된 것이다.”
3. 편집과 배치의 문제: 웹툰에서의 검열이란
과거의 편집자 역할이 오늘날에는 편집부에, 즉 플랫폼 사업자의 손에 맡겨졌다. 웹툰 산업에서 편집자라는 말은 사라졌는데, 이는 예전처럼 지면이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면의 문제는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굉장히 파급력이 큰 변화였다. 예를 들어 출판만화 시절에 만화를 연재한다는 건 온전히 편집자의 개인 판단에만 의존했었다. 여기서 편집자는 자신이 만화를 발굴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고, 이들과 만화가 사이는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예술적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 만화가가 작품을 하는 아티스트라면, 편집자는 그 옆에서 전체적인 모양을 잡아주는 조력자였던 것이다. 이는 물론 콘텐츠 발행자로서 자신들의 플랫폼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하다. 허나 출판만화의 편집자는 그 자신만으로도 한 명의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웹툰 만화 시장에서 편집자는 웹툰 산업의 일부로만 치부된다. 이들에겐 웹툰 작가를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빼고 남은 무기력함만이 남아있다. 이 무기력함은 웹툰 플랫폼에서 근무하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웹툰을 작품이 아닌 하나의 비즈니스로만 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플랫폼에 들어올 수 있는 작품군이 한정되어 있지 않은 만큼, 편집자들이 작품 하나하나를 특별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윽고 편집자는 PD라는 호칭으로 변형되었고, 작품 하나보다는 플랫폼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위치에 더 가깝게 되었다. 오늘날 웹툰 프로듀싱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웹툰 PD가 작품 피드백, 작가 섭외 등의 역할을 하는 건 동일한데, 정작 지면에 웹툰을 배치하고 조율하는 일은 마케터와 기획팀의 역할로 넘어가 버렸다.
출판만화 시절과 현재의 웹툰 시장을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출판만화와 웹툰은 만화라는 하나의 큰 틀에서만 비교될 뿐 세부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매체이다. 연출 방식이나 배급 방식에 있어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만화라는 큰 틀에서 두 매체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큰 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검열이다. 오늘날 웹툰 PD 혹은 플랫폼 사업자들은 작가에게 별다른 조언이나 코칭을 하려 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그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작가 개인이 SNS와 같은 곳에서 어떠한 말을 하여 작품의 흥행에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보에 플랫폼이 개입하는 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작품을 검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아니라 플랫폼 소속의 마케터가 웹툰 배치의 권한을 얻게 된 것은, 이것이 세계와의 ‘첫만남’ 즉 입구라는 점에서다. 플랫폼 사업자는 잡음이 있는 웹툰 작가로 인해 자사의 플랫폼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사태에서 ‘편집’과 ‘배치’의 권한은, 트러블이 있는 작가와의 관계를 끊는 것에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권력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갑질의 문제로 바라보며, 결과적으로는 검열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가는 단순히 돈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작품을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 플랫폼과의 관계를 나쁘게 할 수만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편집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즉 생살여탈권을 손에 쥔 플랫폼 사업자에게 대항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검열의 행위는 부도덕한 처사로 이해되어왔다.
2020년에 있었던 네이버 웹툰 검열 논란을 떠올려보자. 이는 네이버 웹툰을 운영하는 네이버 측이 전체이용가를 표방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포털사이트의 특성상,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콘텐츠를 검열하는 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웹툰의 머리에 권장 연령을 표기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작품이 어느 연령대를 염두에 두는지가 미리 고지된 상황이었다. 결국 네이버 웹툰 검열 사태는 플랫폼과 독자 사이의 대립 구도라기보다는 플랫폼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플랫폼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려한 게 아니라, 이 작품이 자사의 플랫폼에 어울릴지 아닐지를 미리 파악했다.
그에 대한 증거 중 하나는, 미리보기 서비스에서는 검열되지 않았던 장면이 무료분으로 전환된 상태에서는 검열되었다는 점이 있다. 미리보기 서비스에서 연령이 제한되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리보기와 무료 연재분 모두 권장 연령이 동일했음을 고려할 때, 네이버 측의 검열 행위는 더 많은 독자에게 이 작품이 노출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모종의 트러블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트러블을 방지했을까? 이러한 행위는 발생할 수 있는 일을 두고서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발 빠른 대처에서 작가들의 동의는 없었다. 어쩌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해결’한 것이기에 작가들의 동의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논의를 따르자면, 작품은 플랫폼이 대중에 공개하기 전까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 되어버린다. 즉 작품을 콘텐츠로 구성하는 것에는 작가가 아니라 그것을 공개하는 플랫폼이 최종 권한을 지닌다는 말이나 다름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 웹툰의 검열 문제에서 대두된 것도 이러한 부분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검열되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랫폼은 작가가 대중과 만나는 거의 유일한 창구이며, 개인 블로그나 트위터와 같은 곳도 창구가 될 수는 있지만 플랫폼에 연재할 때만큼 안정적으로 돈을 벌지는 못한다. 즉, 문화 콘텐츠를 지향하는 작가도 그런 콘텐츠를 대중에게 공개하려면 산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모순점이 생겨난다.
따라서 2020년에 있었던 네이버 웹툰의 검열 문제가 왜 문제였었고 어느 지점에서 독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웹툰을 산업으로 볼지 아니면 콘텐츠로 볼지에 대한 논의였다. 네이버 웹툰 플랫폼은 웹툰을 하나의 산업으로 보았었고, 그래서 행여나 있을 불이익을 우려해 작품을 검열 조치하였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웹툰은 엄연한 콘텐츠이자 문화였고, 그들에게 검열이란 작품 고유의 결을 해치는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분명 우리에겐 필요한 검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웹툰이 산업이기 전에 문화 콘텐츠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K-웹툰이라는 말에 있어서 한류라는 표현의 역할이 바로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웹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게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한류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4. K-웹툰이라는 웹툰 플랫폼, 혹은 그러한 시스템에 관하여
K-웹툰이라는 말에서 검열의 문제를 떠올리는 건, 해외에 웹툰을 서비스하는 플랫폼 사업자에게는 어떤 작품을 소개할 것인지와 같은 배치의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현지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 만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안정적인 콘텐츠들이 있으므로 이를 잘 활용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바꾸어 말해 한국 웹툰에서 한류라는 말은, 플랫폼 사업자가 우세를 점하기에 그만큼 한국 작가들이 도드라져 보이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K-웹툰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한 작품적 성과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한다. K-웹툰은 한국을 잘 대표할만한, 혹은 해외에서도 잘 통할만한 코드를 지닐 작품을 철저히 골라내어 출품한 결과물이다.
출판만화 시장에서 편집자의 권한이 막중했던 건, 작가의 작품을 연재 중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편집자는 이 작품이 잘 팔릴만한 것인지와 회사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것인지와 같은 포괄적인 고려를 해야 했다. 그러나 웹툰 플랫폼에서는 지면의 문제가 사라짐으로 인해 배급에도 제한이 없어졌다. 이제 남은 건 이것이 해외에서도 먹힐까 하는 고민뿐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 웹툰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면, 특정한 작품을 보고 플랫폼에 유입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플랫폼에 유입된 후에 다른 웹툰을 접하게 되는 게 먼저일까. 전자의 경우는 어떤 경로로든 해당 웹툰을 접하게 될 여건이 되어야만 하며, 후자의 경우는 플랫폼 자체에 대한 홍보를 해야 한다. 이때 그 방법이란, 한국 문화가 아니라 웹툰 산업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 공산이 크다.
예컨대 K-웹툰이라는 말은 한국의 웹툰 산업을 지칭하는 것일 뿐 웹툰 콘텐츠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물론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웹툰의 몇몇 특징들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두고서 K-웹툰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K-웹툰을 한류의 일부로 보는 것과는 달리 웹툰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미지를 재고하게 하는 건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보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언이 있다. 그건 바로 게임의 사례를 논하는 것이다. 게임도 분명 한류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지만(배틀그라운드나 검은사막, 던전앤파이터와 같은), 이러한 게임들이 한국 문화를 해외에 알린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제작사인 걸 모르는 게이머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게임은 단지 재미있는 즐길 거리에 불과하다. 현재 웹툰의 위치가 그것과 같다. 웹툰은 어떤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보다는, 쉬는 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보는 스낵 컬처에 더 가깝다. 즉 웹툰은 단지 재미있는 즐길 거리에 불과하며, 웹툰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린다는 말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K-웹툰 전체에 일반화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게임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웹툰의 배경이 한국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몇 가지 현상들이 있다. 이를테면 일본 만화에서는 팬들이 작품 속에 나오는 실제 배경을 직접 탐사하는 ‘성지순례’ 문화가 있는데, 이는 만화 콘텐츠의 소비가 실제 관광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외에서 흥행하는 몇몇 웹툰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고, 이때 웹툰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류가 된다.
하지만 웹툰을 해외에 선보이는 것에는 많은 난관이 자리한다. 웹툰을 해외에 적절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를 배경으로 하여 현지화 작업이 요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웹툰(현 카카오 웹툰)에서 연재되어 드라마화가 진행되었던 ‘이태원 클라쓰’가 일본 현지에서는 롯폰기로 번안되어 연재되었던 사례가 있다. 혹은 한국어 고유명사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도 있다. 긍정적인 점은, 최근 들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짐으로써 이러한 고유명사들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기는 풍조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누구(Nugu)’라는 말이나 ‘오빠(oppa)’와 같은 호칭은 한류 팬들 사이에서 어떤 번안 없이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아마도 이들에게 웹툰은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오르게 하는 한류 문화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독자가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진 채 웹툰 플랫폼에 진입하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 사업자로서도 모든 독자가 한류 팬인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한류에만 의존한다면 사업의 안정화를 이루어낼 수 없게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플랫폼 사업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 작가를 포섭하거나 현지화 작업을 철저히 하는 등의 만전을 기한다. 사실 플랫폼 사업자에게 한류 팬들은 적극적인 포섭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주된 목표는 웹툰이라는 매체를 하나의 콘텐츠 풀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지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국위를 선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플랫폼 사업자는 한류를 이용하거나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즈니스에 불과하며, 그러한 비즈니스에서 파생되는 게 바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즉 한류이다.
웹툰을 스낵 컬처로만 바라보는 게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웹툰이 연재되는 온라인 지면의 특징을 잘 살리는 방안에서 웹툰은 스낵 컬처(Snack culture)가 된다. 제한 없는 지면에는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킬만한 편협한 작품도, 다수의 취향을 충족시킬 만한 대중적인 작품도 올라갈 수 있다. 즉 장르를 가리지 않고서 최대한 다수에게 어필할 만한 여러 작품을 들여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요일당 스무 편 넘는 작품이 연재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스무 편의 작품들 모두가 주간 연재를 한다는 점은, 그렇게 작업하는 작가들 이외에도 웹툰을 바라보는 독자들에게도 피로감을 준다. 너무 많은 웹툰이 매일 같이 쏟아지니 당최 무엇을 보아야 할지 잘 모를 지경인 것이다. 아무리 과자가 많더라도 손이 가는 제품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의 취향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편협해진다. 자신과 다른 취향의 웹툰에 섣불리 손을 대는 게 두려워지며,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취향의 다양화를 꾀하는 웹툰 플랫폼은 한 명의 헤비유저가 아니라 다수의 라이트 유저를 생성하며, 이러한 가벼움은 웹툰 콘텐츠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것에 일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벼움은 대개, 그 웹툰이 품에 안은 콘텐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그냥 단발적인 관심에만 그치고야 만다. 즉 웹툰을 대하는 태도가 심오하지 않게 됨으로써 웹툰이 원천으로 삼은 소스에 대한 관심도 산발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 점을 플랫폼 사업자 또한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한류에 편승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에게 잘 먹힐만한 대중성을 주로 확보하려 하며, 이 과정에서 K-웹툰은 한국 문화가 아니라 그들이 발명해낸 웹툰 플랫폼, 혹은 그러한 시스템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5. 일본에 재패니메이션이 있다면, 한국에는 K-웹툰이 있다
웹툰 형식이 한국에서 발명된 게 아닐지는 몰라도, 웹툰을 서비스하는 플랫폼 사업자 방식은 한국에서 최초로 고안된 게 맞다. 우리가 K-웹툰이 한류라고 말할 때는 그러한 플랫폼 사업자 방식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K-웹툰이란 ‘웹툰을 서비스하는 형식’의 유행인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플랫폼들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홍보할 만한 내용의 웹툰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일일 연재’라는 한국식의 형식이 더 잘 도드라져보인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소위 ‘웹툰=한류’라고 생각하는 일은 틀렸다. 웹툰은 한류가 아니라 하나의 매체 형식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웹툰은 위에서 아래로 보는 형식이 주를 이루는데, 한국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러한 형식에 도전하여 다른 형태의 ‘웹’ 툰이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중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류이다.
네이버 웹툰의 경우는 만화를 하나의 컷으로 분할해 차례로 넘겨보는 형식의 컷툰을 실험한 바 있다. 이 실험이 실패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형식을 채용한 웹툰 중 ‘유미의 세포들’이 시즌이 바뀌면서도 줄곧 같은 형식을 유지하는 걸 보면 컷툰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혹은 플래쉬 파일 형태로 제작되고 업로드되었던 ‘러브슬립’의 사례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아니면 호랑작가가 네이버에서 연재했던 몇몇 공포만화 단편에서 사용된 플래쉬 웹툰 기법을 가져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네이버 웹툰, 카카오웹툰, 레진코믹스 등이 2D 웹툰 원안을 바탕으로 Live 2D 방식을 적용한 홍보 영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모든 사례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웹툰이라는 형식을 최초로 대중화한 한국 플랫폼 사업자들이 단순히 웹툰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글 전반에 걸쳐 던져왔던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웹툰의 사업적 측면을 강조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K가 될 수 없다. 웹툰을 문화 콘텐츠로 바라볼 때 K-웹툰이라는 표현은 옳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웹툰=한류’가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웹툰이 담은 게 한국 문화여서가 아니라, 한국 플랫폼 사업자들이 웹툰이라는 매체 자체에 계속해서 도전하기 때문이다. 웹툰이라는 매체에 대한 여러 시도가 한국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K-웹툰이라는 이름이 왜 부끄러운 ‘자칭’이 아닌지에 대한 합리적인 반박이 된다. K-웹툰은 웹툰을 한국식으로 가공하여 내놓은 일종의 프렌차이즈 형식이다. 이것은 단순한 국위선양이라기보다는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단어처럼 한국에서 최초로 유행했고 지금도 계속 발전해나가는 중의 콘텐츠라는 점에서 착안된 용어일 것이다.